9월6일 수업 참여 후기
주관적 의식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부터 성실한 모범생이었고, 무엇이든 정신만 멀쩡하면 파악할 수 있고 못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자의식이 강하다는 소리도 몇 번 들었고, 나의 노력으로 이루어낼 밝은 미래에 대한 환상도 컸었다. 그런데 이번 학기 들어 4번의 세미나와 4명의 학자의 각기 다른 의식에 대한 강의를 들은 후, 의식에 대한 나의 무지만을 계속 발견하고 있다.
2교시 세미나에서 다루는 주관적 의식은 이번 학기에 들은 의식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중 가장 좁은 범위의 의식을 말한다. 이번주에는 인간의 (주관적)의식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사에서 태동되기 시작하는 과정을 공부했다. 우뇌의 환청이나 환각을 좌뇌가 실행하기만 하는 양원적 정신의 시대가, 점차 사회체제가 복잡해지면서 단일한 신의 명령이 먹히지 않으면서 붕괴되기 시작한다. 신이 더 이상 명령을 내려주지 않자 불안해진 사람들이 그를 대체하기 위해 기도하거나 천사/악마/천국을 상정하기 시작하고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점술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점술이 의식 발생에 미친 영향은 분명해 보인다. 신의 뜻이 은유를 통해 표현되고 이에 대한 해석이 시작되면서 이야기를 엮기 시작한다.
그리스 시대로 넘어가, 전쟁을 위한 도구처럼 묘사되던 신체 일부(사이키, 누스등)들이 추상명사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서양 이원론의 시작을 설명한 부분이 흥미로웠다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슷한 의식발생의 과정을 밟았던 인도와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 어떤 차이에서 비롯되는지 궁금했다.
무의식에 대한 부분도 정리가 잘 안된다. 프로이트에게 의식은 무의식이 왜곡 변형 조작된 징후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주관적) 의식 발생은 무의식을 억압하는 시작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가하면 융의 집단무의식이나 베르그손의 기억은 생명 자체의 발생과정에서부터 기원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양원적 정신과 집단무의식은 어떻게 구별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혼란스러운 의식/무의식
지난 4회의 강의에서 우리는 좀더 넓은 범위의 의식/무의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각자 조금씩 다른 메커니즘을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범주를 설명하기도 해서 혼란스럽기도 한데, 그만큼 의식/무의식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철떡 같이 믿었던 자아 의식은, 프로이트 말대로 무의식적 불안과 분노의 단면이기도 하고, 베르그손의 말처럼 유용성을 중심으로 편집된 것일 수도 있고, 줄리언 제인스 말대로 필요에 의해 생성된 것이기도 하다. 건강한 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이면의 무의식을 계속 접속하고 해석해야 의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알 수 없는 세계이다. 무의식의 일부를 언어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자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을 구성해온 가족이나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는 것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의식/무의식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기보다, 자아를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적 관계들을 오작동시키는 실험을 하라는 들뢰즈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가장 심오한 의식
1교시에 낭독한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심오한 의식은, 다른 차원의 의식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모든 존재에게 심오한 의식이 있어서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서 위로를 받는다. 의식/무의식으로 분별하여 인간 정신의 우열이나 위계 설정을 피하기 어려운 서양사상과는 다른 접근인 것 같다. 가장 심오한 의식이 모든 존재에게 있다는 말은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과 통하는 것 같고, 분리된 나란 일시적으로 구성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무아사상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가장 심오한 의식에 접속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나를 넘어서게 하는 시작일 수도 있겠다. 이어서 꾸준한 인식의 방법(view)/명상(meditaion)/행동(behavior)을 지속할 것을 제시한다. 불교를 모르는 불교맹의 한 사람으로서 인식의 방법이나 명상은 잘 모르지만, 중생을 위한 이타행이란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어린 시절 확고하다고 믿었던 자아의식 혹은 주관적 의식은 실재하지도 신뢰할만큼 안정적이지도 않기에 자아에 대한 착각에서 벗어나야 나의 번뇌를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방법론으로, 무의식을 해석하거나 접속하라는 해법보다는, 나의 욕망의 관계들에 균열을 내보라는 해법이 좀더 설득력있게 느껴진다. 이타행을 실천하라는 말과 실험하라는 들뢰즈의 말이 나에게는 묘하게 연결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 가르침을 실험하고, 행하기 위해 ,나는 무슨 욕망에 균열을 내고 어떤 오작동을 시작할지 고민해 봐야겠다.
우리 공부는 하면 할수록 오리무중인지 ㅎㅎ 저희들이 한 학기 동안 헤맸던 질문들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타행의 실천은, 그냥 자비이기 이전에, 유용성-불안-분노로 작동하는 자의식을 균열내는 일이기도 하기에 실험이 될 수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