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 저희 불교팀은 불교와 과학에서 말하는 물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 오후 시간에는 채운샘을 따라 물질에 대한 캐런 바라드라는 철학자의 의견을 고찰해보았습니다.
1. 왜 캐런 바라드인가?
캐런 바라드는 이론물리학자이면서 페미니즘철학자로 주디스버틀러, 도나해러웨이, 푸코, 그리고 이론물리학자인 닐스 보어의 사상에 기반한 통찰을 보여주는 철학자입니다. 그들의 철학에 의지하면서도 그들의 의견을 재의미화하고 그 경계를 넘어가려고 노력한 철학자입니다. 근데 그의 명성과는 달리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그의 대표적 저서『Meeting the Universe Halfway』(우주와 중간에서 만나기)가 아직은 출간 전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그의 주된 사상이 담겨진 논문『Agential Realism』(행위적 실재론)이 학술지에 번역되어 저희는 그것을 가지고 공부했습니다.
캐런 바라드는 양자물리학이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합니다. 양자물리학의 지평 속에서 현대철학이 문제 삼고 있는 것들(페미니즘, 퀴어, 반인종, 동물학대 등)의 한계를 넘어가려고 노력한 거죠. 근대학문들은 인간을 다른 종들과 다르다라는 전제로 형성된 것들입니다.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을 규정하고 경계 지으면서 발전한 거죠. 그러면서 타자만 경계 지은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스스로도 경계에 갇혀 버립니다. 인간이 비인간에게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 고찰함으로써 인간의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 캐런 바라드가 추구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입니다.
2. 행위적 실재론 Agential Realism
2000년대 들어와 물질에 대한 이해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이라는 개념입니다. 캐런 바라드에게 모든 것은 행위입니다. 앎도 느낌도 행위인 거죠. 행위함으로써, 실천함으로써 드러나고 존재하는 것이 전부인 겁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실체화하는 순간, 먼저와 나중을 규정짓게 되면서 우열을 가리게 됩니다. 귀속관계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앎이 먼저이고 실천이 뒤따른다고 생각합니다.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적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을 정신에 귀속시켜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하죠. 캐런 바라드는 이를 전복하기 위해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성Performativity이란 개념을 가져옵니다. 이는 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앎은 없다는 것입니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란 책에서 ‘젠더’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행위를 반복(수행)함으로써 형성된 것입니다. 수행성은 본질을 넘어선 실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실천이 먼저라고 강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실천 속에는 이미 인식이 같이 개입되어 있는 거죠. 실천이 곧 인식이고 인식이 곧 실천인 것입니다.
캐런 바라드가 행위적 실재론을 얘기하면서 가져온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이 인트라액션Intra-action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분별하고 전제함으로써 인식의 출발을 삼고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은 먼저 있다고 가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너와 나’ ‘주관과 객관’은 언제나 주어진 항들로써 그 자리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Interaction만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트라액션Intra-action은 다릅니다. 실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트라액션의 효과로 드러난 것입니다. 현상은 인트라액션의 산물인 겁니다.
3. 경계 만들기
개체가 인트라액션에 의해 드러난다면, 그럼 우리의 몸은 어떻게 드러나게 되는 것일까요? 거미불가사리가 그렇듯 외부환경에 따라 변형됨으로써 경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자연의 생리입니다. 경계를 만드는 실천 속에 우리는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먼저 있고 실천이 있는 게 아니라 실천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 속에 이미 앎은 내재되어 있는 것이죠. 그리고 실천에 의해 신체성은 매번 구성됩니다.
과학자들이 과학의 진리를 밝히는 과정도 단순히 물질세계 자체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담론적" 실천인 것입니다. 과학자가 과학탐구 과정에서 현상을 보는 행위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훈련이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행위입니다. 행위적 실재론적 관점으로 보면 내가 글을 쓴다고 할 때 펜, 손, 뇌의 정신 작용 등 그 모든 구성 요소들은 동등한 하나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행위주체성”을 갖습니다.
4. 회절적 독법 Diffractive reading
불교팀에서는 오전시간에 같이 읽고 토론하는 『물질세계』에서는 불교에서 말하는 물질은 무엇인지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너무 디테일하게 법(실체)을 나누고 쪼개어 법을 분석하는데요. 그것은 그 법이 법으로써 온전히 존재하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캐런 바라드가 사물과 현상을 독해하는 ‘회절적 독법’이라는 방식도 이와 의미가 통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파동과 파동이 만나 왜곡되는 게 회절입니다. 그렇게 왜곡되고 굴절되고 변형된 것이 현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배제된 것들과 배제의 방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실재 현상을 그 자체로 있는 것으로 보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이 어떤 실천 속에서 객관적 사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 뭘 배제하는지를 읽어내는 게 회절적 독법입니다. 어떤 현상이든 회절적으로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리학자 보어는 물질과 의미의 얽힘을 얘기합니다. 물질과 의미는 서로 얽혀있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봅니다. 불교 역시 존재와 인식을 따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책에서도 물질을 분석하는 와중에 슬며시 의식체계를 끌어오죠. 의식을 벗어난 물질도 물질을 벗어난 의식도 없다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5. 경계 만들기의 실천과 윤리
물리학자 보어는 양자현상을 설명하려면 실험배치와 관련된 모든 기술적 특징(장치)들을 서술해야한다고 얘기합니다. 그 장치apparatus들은 현상의 일부인거죠. 그리고 그 장치는 수동적인 관찰 기구가 아니라 동등한 자격으로 현상에 녹아 있는 겁니다. 따라서 양자 현상 ‘그 자체’는 없습니다. 보어의 인식틀은 내가 어떤 방식으로 현상을 포착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바라드가 보어에게서 읽어낸 철학적 의미입니다. 현상 자체는 “물질적-담론적” 실천들과 불리 불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구성하느냐는 내가 무엇을 배제하는가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경계는 그렇게 만들어집니다. 경계는 나의 아주 구체적인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죠. 아무 생각 없이 이루어진 행동 하나에도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식들이 내재하죠. 그런 실천 하나 하나가 모여 경계를 만들고 나의 몸은 구성되어 갑니다. 여기서 몸의 경계를 내 알몸의 물질덩어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동물운동가나 생태학자, 집을 떠나 노숙하며 지구를 온 몸으로 느끼는 누군가에겐 몸의 영역, 세상을 느끼는 경계가 다를 수밖에 없죠. 따라서 경계 만들기는 윤리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자신의 윤리성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몸을 어떻게 경계 짓고 있는지...“경계를 질문하는 순간이 경계를 해체하는 순간이다.”
후기 좀 짧게 쓰고 요약만 하지 말자 주장했던 제가 결국 요렇게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든 채운샘 강의를 이해하고 싶었으나...어렵네요. 그래도 규문에서 최신?학자들의 고견을 탐색하고 여러분들과 같이 얘기할 수 있어 좋습니다. 민호샘이 오전수업은 스케치해주시리라 믿으며~ㅎ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당~~~
우리 자신의 신체의 경계란 어디일까? 라고 수업 시간 중 채운샘께서 질문하셨던 게 떠오릅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을 보고 구성하느냐에 따라, 내가 무엇을 배제하느냐에 따라 경계가 만들어 진단 말이죠... 우리들 각각이 느끼는 신체의 경계, 불교에서 말하는 色으로서의 신체는 어디까지일지, 문득 이게 무척 오묘하고도 심오한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혜윤샘 후기를 읽으면서 수업 시간에 놓치고 지나간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자세한 정리 감사혀요~ ^^
요약만 한 후기라고 느껴지지 않는데요. 덕분에 복습 잘 했어요. '타자와의 관계맺음을 통해 자신의 윤리성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내가 나의 몸을 어떻게 경계 짓고 있는지...“경계를 질문하는 순간이 경계를 해체하는 순간이다.”' 이 대목이 눈에 쏙 들어오네요. 자신의 안전을 위해 경계를 짓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을 가둬버리게 되는 일을 반복하곤 하는데, 계속 자기 발 밑을 봐야겠네요. 샘도 쓰느라 고생했슈.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