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시간(6.21) 공지입니다.
1) <물질세계> 3장 ‘유색을 형성하는 극미의 세계’(302~343쪽)을 읽어옵니다.
2) <물질의 물리학> 7, 8, 9장을 읽고 옵니다. 발제는 저, 이기웅 선생님, 김경아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3) 간식은 정혜윤 선생님과 이윤지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이기웅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우리의 탁한 언어와 ‘정립定立’
오전 낭독 텍스트인 <물질세계>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2장 ‘소지인 대상의 체계’를 다 읽었습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네요. 이번 주 범위는 ‘소량의 기타 체계’의 후반부였습니다. 5주차에 읽은 범위와 겹쳐서 ‘모순’, ‘관계’, ‘부정’, ‘정립’ 등의 논리학 개념들을 다시 만났는데 머리 아프면서도 조금씩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부정’의 수많은 용법(무차, 비차, 직접비차, 간접비차, 순간비차 등)을 따라가면서 저희는 ‘왜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이런저런 답들을 고민해보았습니다. 먼저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거칠고 탁한가를 생각하게 되었죠. 일상 언어 뿐 아니라 정치 언어, 법률 언어는 모호하고 말하는 이의 동기와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발뺌하고 빠져나가기 쉽게 쓰입니다. 부주의하게 표현하고 그 한 마디를 붙들어 말꼬리잡고 싸우기 일쑤죠. 이런 언어 생활 방식을 가지고 수행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언어가 기호이고 방편이라도, 엄격하게 정밀하게 가다듬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마음을 닦기 어렵지요.
‘정립’이라는 개념도 그와 연관된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정립의 정의가 왜 이렇게 복잡한가 의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정을 정의한 후에, 그것이 아닌 것으로 정의됩니다. “정립의 정의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식이 자신을 지각할 때 자신의 부정 대상을 직접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 법’이다.”(276쪽) 요약하면, 정립은 ‘부정이 아닌 것’입니다. 그 예는 단순하지요. “예를 들면 기둥, 색, 식, 소작 등이다.”(276쪽) 이렇게 ‘무언가’를 정립하는 일은 그것으로 판단되지 않는 것들을 다시 부정해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A’는 ‘not A가 아닌 것’인 셈이죠. 저희는 이런 정립의 효과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언어는 언제나 미끄러집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불교 철학이 말하는 실상은 어떤 법도 그 법으로 온전히 존재하지 않고 의존해서 존재하듯 언어도 그렇습니다. 책상 위의 리모콘을 가져다 달라고 할 때 우리는 “밥상이 아니라 책상에 있어”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헷갈릴 만한 것들을 쳐냄으로서 언어의 지시작용을 명료화하려는 것입니다. 이 작업은 정서, 기억, 이미지, 공상, 감각 등이 폭포처럼 뒤엉켜 일어나는 ‘마음’이라는 영역을 탐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입니다. 세세하게 가르고 나눌 수 있어야 번뇌가 어느 갈래에서 생기는지 파고들어 그 인과 연의 관계를 바꿔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현상이고, 현상은 얽힘/회절이다
“지시대상이란 관찰에 독립적인 현실이 아니다. 지시대상은 현상이다. (...) 즉, 객관적 지식을 위한 조건은 지시대상이 (관찰에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라) 현상이라는 점이다.”(캐런 바라드, <행위적 실재론-과학실천 이해에 대한 여성주의적 개입>, 76쪽)
“현실이란 물자체 혹은 현상-뒤의-사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현상-속의-사물로 이루어진다. 현상은 비이원론적인 전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현상 뒤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혹은 현상의 원인으로 존재하는 독립적 사물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헛소리다.”(79쪽)
이번 주에는 양자물리학자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에 대해 배웠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어떻게 딱딱해 보이는 물리학에서 이런 세련되고 영적인 철학이 나올 수 있었는지 놀람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선 바라드의 철학은 닐스 보어의 실재론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고 합니다. 양자 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보어의 인식틀에서는 ‘관찰 대상’과 ‘관찰 행위의 주체’가 분리 불가능하며, 특정한 물질적, 개념적, 인식적 실천 내부에서 서로를 공동으로 구성합니다. 이런 과학적 베이스에 푸코와 주디스 버틀러의 사유가 추가됩니다. 대표적인 개념은 ‘수행성’(performativity)입니다. 수행성은 현상은 본질을 반영한다는 재현 개념과 반대로, 앎을 구성하는 데 물질세계의 수행이 들어가 있고 물질이라는 것도 정신적 작업이 얽혀 들어가 있다는 개념입니다. 주체도 젠더도 신체도 특정한 문화적 정치적 물질적 배치 속에서 행위의 반복으로 형성된다는 것이죠. 이런 수행성을 인간의 범주 너머 비인간 존재들로까지 가져간 시도가 해러웨이에게 있었고,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까지도 재설정한 여성 양자 역학자들의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캐런 바라드의 행위적 실재론은 이런 철학들과 공명하며 형성된 개념입니다.
채운샘께서는 <물질세계>의 목차를 찬찬히 보면 이상함이 느껴진다고 하셨습니다. 소지인 대상들의 체계를 얘기하는데 어느 순간 소량의 방법들, 즉 인식론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 철학의 현대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이 떼려야 뗄 수 없게 섞여 있다는 점이죠. 촉觸이라는 개념이 그 얽힘을 잘 보여줍니다. 촉은 근-경-식의 화합입니다. 그 화합의 인因이자 과果이죠. 물질 세계의 접촉 갖지만 여기에는 언제나 식이 들어갑니다. 불교에는(무위법을 제외하고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항이 없습니다. 언제나 연기 조건이 중첩되고 있지요. 제법은 인과 연에 의지해 발생한다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 불교적 존재론의 근간이지요. 이것은 지난 시간 해러웨이에게서 배운 존재론 intra-action과 아주 유사합니다. 캐런 바라드는 이렇게 항이 아닌 얽힘이 선행하는 존재 양상을 ‘회절적’이라고 합니다. 회절은 파동들이 겹쳐질 때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증폭되고 상쇄되며 왜곡되는 변형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회절적으로 얽혀있는 것이죠. 양자역학을 경유한 캐런 바라드의 실재론은 불교의 진리와 통하는 지점까지 나아갑니다.
행위적 실재론은 그 자체로 윤리론이다
“행위적 실재론에 따르면, 현실은 다른 실천들을 배제한 특정 실천들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부터 천천히 침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추구하는 지식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도 부분적으로는 책임이 있다.”(80쪽)
행위적 실재론이 불교와 공명하는 지점은 존재론뿐이 아닙니다. 불교의 의타기성이라는 존재론이 아무런 걸림 없이 윤리론 혹은 수행의 방법론으로 이어집니다. 이 행위가 단독적으로 이뤄진 것도 그렇게 그냥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과 연의 다층성(바꿀 수 없는 이숙과와 바꿀 수 있는 요소들을 구분하는 일)에 대한 사유는 우리의 당장의 행동 반경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합니다. 행위적 실재론도 마찬가지로 책임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물질적-담론적 장치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구체적인 내부적-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현상이며, 이러한 내부적-상호작용에서 ‘인간이 아닌 것’(혹은 ‘인간’)의 차별적 구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출현 중이고 진화 중인 현상이 있음을 뜻한다.”(80쪽) 인간과 인간 아닌 것, 이성애와 동성애, 장애와 비장애, 나와 너 등 우리가 그어놓은 경계들이 있습니다. 경계는 일련의 반복적 행위들로 그어진 것이죠. 그리고 경계는 언제나 배제를 낳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배제에 당연히 책임이 있습니다. 바라드는 ‘행위주체성’에 대해 말합니다. 이것은 미리 존재하는 ‘주체’의 계획되고 의도된 행위가 아닙니다. 나라는 주체의 의도나 선택 이전에, 나를 경유하여 실행되고 있는 있는 무수한 정치적, 사회적, 물질적 실천들 및 내부-작용들을 발합니다. 바라드는 “행위 주체성이 책임성과 직결되어 있음”(81쪽)을 강조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임의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적 현실이 우리가 그 형성에 역할을 담당하는 특정 실천들로부터 침전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81쪽)
우리는 의식하든 못하든 수많은 경계선들을 만들어 놓고 살아갑니다. 물론 주체의 의도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이 지리, 이 문화의 행위적 현실 배치 안에서 ‘절합’하게 된 것이죠. 그렇기에 그것이 어떤 그림자와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무엇을 허용하고 배제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를 경계화하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지금’이라는 시간은 어디까지인가? ‘세계’, ‘인간’, ‘생명’의 경계는 어디에까지 그어져 있는가? 이 경계선을 뭉뚱그리지 않고 더 구체적으로 더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데에서 자기변형은 이뤄집니다. ‘모든 이에게 자비’가 늘 쉽지 않은 것은 비근한 자기 느낌들을 직시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몸을 갖고 살아가는 이상 경계선은 이미 수없이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없애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고 재구성하는 일입니다. 이 경계선이 왜 어떤 힘들과 더불어 그어졌는지 묻고 부수고 다시 만드는 데에서 윤리적 응답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민호샘 후기를 읽다보니 물질을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를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디까지가 물질의 경계가 되는 건지, 혹은 이 경계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건지, 단지 그렇게 인식되는 건지 알쏭달쏭 해지네요. ^^;;
반장님의 친철한 공지 매 주 고맙게 읽고 있어요~! ^_^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런걸 공부했나 싶네요. ㅎㅎ. 가물가물.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 임의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행위적 현실이 우리가 그 형성에 역할을 담당하는 특정 실천들로부터 침전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에 책임이 있다.”는 말이 와닿네요. "현실은 다른 실천들을 배제한 특정 실천들을 통해서 세계를 인식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부터 천천히 침전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바로 어떤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침전되어' 나타난다. 좀 무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