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8 불교+철학 2학기 9주차 후기
1. 강독 : 『물질 세계』
2학기 물질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오전에는 2500년 전 붓다가 설하고 제자들이 정리한 여러 경전에 흩어져 있는 물질에 대한 텍스트들을 강독하고 오후에는 21세기 가장 핫한 물질 세계인 양자와 위상물질들을 공부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다닌 것처럼 정신없이 헤매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물질 세계』 ‘제4장 시時의 체계’를 같이 읽고 이야기 해보았습니다.
정말 시時란 무얼까요? 불교 부파들마다 시 자체도 다르게 정의했습니다. 감관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법을 실유實有로 바라본 설일체유부는 시를 세상의 길이라는 의미에서 ‘세로世路’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생주이멸하는 유위 세계 자체를 ‘시’라고 본 듯합니다. 유위有爲는 찰나멸하는 무상無常의 세계이고 시간 초월적인 무위無爲는 항상합니다. 뭔가 항상하다는 건 어찌 보면 상상 불가능한 세계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은 항상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유부의 모토는 ‘삼세실유 법체항유 三世實有 法體恒有’, 삼세는 실재하고 모든 법은 항상 있음입니다. 유부에게는 인식으로나 감관으로 마지막까지 쪼개서 인식할 수 있는 게 실유입니다. 쪼갤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하게 항아리와 흙으로 비유하자면, 항아리는 더 쪼갤 수 있으므로 실유가 아니고 가유假有이며 더 쪼갤 수 없는 흙이 실유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과거도 인식하고 미래도 인식하므로 인식가능성으로 볼 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는 ‘실유’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싹에는 싹인 삼세가 존재하여, 싹은 보편이고 싹인 삼세는 싹의 개체”(347쪽)입니다. ‘싹’이라는 보편 차체는 실유가 아니고, 과거의 싹, 현재의 싹, 미래의 싹으로 드러날 수 있는 싹만 실유입니다.
삼세실유 법체항유는 무상과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고 유부에서 변하면서도 상속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현재 싹이 실유이려면 과거싹, 미래싹이 인식 가능한 ‘실유’여야 합니다. 어떤 법이 실재해야 생주이멸 4相과 인연 조합하여 찰나멸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생주이멸의 생生은 법 자체가 없다가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찰나적 존재로 인식되는 순간을 말합니다. 무언가 현재의 법으로 인식되려면 미래의 법(미래싹)에서 지금(현재싹)으로 출현하여 과거(과거싹)로 이동되는 방식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후 경량부, 유식, 중관학파 등에서는 이런 삼세실유를 비판하며 현재만이 작용으로 드러날 뿐 과거, 미래가 따로 있지 않다고 합니다. 시時라는 것은 전적으로 의존하여 성립하는 법이며, ‘시’가 시를 가지는 법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법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시는 무상, 인과, 연기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가설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물질을 설명하는데 ‘시’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물질이 항상하지 않고 변해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질의 무상함과 별도로 지나가는 ‘시’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그냥 존재가 변해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무엇도 한순간에 ‘~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무엇이 아니게 되죠. 생과 멸이라는 작용만 있을 뿐인데 우리는 자꾸 뭐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스피노자가 항상 주장하는 바, 물속에서 젓가락이 구부러져 보이는 현상이 왜 그런지 안다고 한들 그게 똑바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공부와 사유를 통해 인과법칙을 아는 것은 우리의 생존 조건 속에서 드러나는 현상이 왜 그런지 알기 위해서이지 현상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현상은 조건 속에 나타나는 무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뭐가 실체로 있는 것 같은 현상에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고성제와 집성제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일체 유위는 자신을 생기게 하는 원인 그것으로써 소멸의 본성임이 성립된다.”(383쪽)
무언가가 생할 수 있는 건 멸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생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더해진다는 이미지만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은 무언가의 사라짐, 파괴로부터만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무언가가 생길 수 있는 것은 계속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먼지 하나 생겨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멸의 원인인 ‘무상’이 생의 원인이며, 생의 원인인 ‘무상’이 멸의 원인이기도 합니다. 낡고 사라지는 것은 세월이 흘러서도 누군가가 해코지해서도 아닙니다. 생이 멸을 조건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재는 ‘소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멸은 우리가 착각하듯 외부의 다른 원인 때문이 절대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소멸성을 본질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가 해하더라도 소멸할 수 없습니다. 변하고 사라지는 소멸성은 나, 사물, 자연이라는 모든 존재 자체의 본성입니다. 슬퍼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존재는 찰나멸, 무상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 순간도 나일 수 없기에 무아無我이며, 거기서 시간은 나와 분리되어 따로 지나가는 실체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성사찰나와 시변제찰나라는 두 가지의 찰나 개념이 있습니다. 논리적 개념으로 보이는 시변제찰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짧은 단위의 순간을 말하며, 성사찰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서 사라지는 큰 시간 간격, 예를 들면 나의 생애 같은 구체적 사건의 긴 시간입니다. 성사찰나도 순간적 존재를 설명하는 시변제찰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찰나성을 우리 삶의 본질로서 사유할 수 있게 합니다 . 생이 멸을 본질로 하는 사건이라면, 나의 생은 바로 죽음을 본질로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끝날 날이 올 것이고, 만나면 헤어질 날이 오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태어났고 사랑했고 만났기 때문입니다. 아주 심플한데 이걸 받아들이기는 쉽지는 않습니다. 무언가 스러질 때 여전히 슬프지만 감사의 마음도 더 크게 들것 같기는 합니다. 그들의 멸로 인해 생하고 있으니까요.
2. 강의: 『생동하는 물질』
불교 내에서도 부파 간에 물질에 대한 의견들이 다릅니다. 그래서 물질을 이야기할 때 항상 세트로 달라붙는 것이 정신입니다. 세상이 온통 물질이라면 ‘물질이 뭐지?’라는 질문이 생기지 않았겠지요. 물질과 다른 무엇들이 있어 보이니 물질과 비물질을 어떻게 구분할까라는 등등의 질문들이 생기게 된 듯합니다. 그런데 ‘물질은 무엇이지?’라는 질문은 물질을 무엇인가로 정의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2학기 공부들은 바로 이 질문의 전제를 깨는 과정이었습니다. 물질과 정신, 물질과 생명, 문화와 자연 등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의심을 해볼 여지가 없었던 이분법에 틈을 내는 텍스트들이었습니다.
남녀의 성차를 가르는 섹스, 문화적 규정인 젠더, 그리고 성적 욕망이 나타나는 방식인 섹슈얼리티가 각각의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디스 버틀러는 섹스/젠더/섹슈얼리티 이 세 가지는 이미 모두 사회적이고 문화적 담론으로 규정된 ‘젠더’라고 주장합니다. 여자, 남자는 타고난 생식적 차이라고만 생각했던 우리에게 성별 차이가 정말 ‘자연적인’ 차이로 말해질 수 있는지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거죠. 어설픈 지식이지만 더듬더듬 공부해온 양자역학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물질의 파동성과 입자성은 그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그것이 놓인 작동 조건, 관찰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어차피 나타나는 것으로 그 물질을 ‘감각’할 수밖에 없는데, 물질은 물질 그 자체로 정의되거나 관찰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둘러싼 개념, 관찰도구와 기계들, 관찰 행위를 둘러싼 사회적 욕망들이 투영된 담론적 결과물이 물질이죠. 물질은 정신이나 인식 등을 포함한 실천적 활동과 분리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정화스님 말씀대로 항상 ‘물질이면서 동시에 정신’입니다.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소위 수동적인 객체로서 생각하는 물질이 과연 활동성과 능동성이 없는 ‘사물’일 뿐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정신과 물질 이분법은 물론, 물질 세계도 활력없는 물질(사물)과 생동하는 생명으로 나누어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물질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임팩트가 없을까요? 생명 그 중에서도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착각하는 인간이 모든 사태를 진두지휘하고 있을까요? 저자는 이 책에서 비인간 물질의 능동적 역할인 ‘사물-권력’(thing power)을 주장합니다.
스피노자는 신체에 고유한 생기를 부여한다. “각각의 사물res은, 자신의 능력이 미치는 한,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고 노력한다conatur.", 코나투스conatus는 ‘능동적인 충동’ 혹은 지속에 대한 지향을 뜻한다.
비록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는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덕”을 갖고 있다며 그것을 다른 신체와 구별했지만, 모든 비인간 신체는 모든 인간의 신체와 욕망하는 본성을 공유한다. 코나투스는 모든 신체에 있는 힘을 지칭한다. “무엇이건 간에 모든 사물은 더 완전하든 덜 완전하든, 그것이 존재함에 따라 동일한 힘을 갖고 언제나 존재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이런 점에서는 모든 사물이 동등하다.” (생동하는 물질, 37쪽)
줄기세포 이슈가 우리에게 낯설지는 않죠. 부시 대통령은 배아줄기세포가 생명이 될 수 있는 배아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줄기세포 실험에 대한 반대 성명을 냅니다. 그리고 바로 3일 후 “4년 동안 3698명의 미국 군이 전사하고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 사이의 이라크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추정되는 선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그가 생각하는 소중한 생명은 무엇일까요? 배아줄기세포는 ‘미래 생명’이기에 소중하고, 전쟁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군인’, ‘적’으로 규정될 뿐 생명이 아닌 것일까요? 정말 소중한 하나의 ‘생명’이라는 개념이 가능한지 궁금해집니다. 이런 질문은 단지 부시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는 정말 생명이라는 걸 뭐라 생각하는지에 따라 나의 입장표명이 가능합니다. 생명뿐만 아니라 장애문제, 원자력, 성소수자, 노란봉투법 등등 뭘 몰라서 뭐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겸손’으로 회피하기에는 절박한 사안들이 바로 우리가 사는 현장에서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2003년 북아메리카의 정전사태는 그 거대한 전기시설 자체가 인간의 컨트롤을 벗어나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자기 자신의 규칙에 따라 살아나고 죽었다’고 합니다. 인간의 해석이나 개입이 불가한 복잡 상태로 자기 고유의 배치에서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스스로 알고 행위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태들 앞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인간이 모든 걸 좌지우지 할 수 있고 인간이 만들어낸 피조물이기에 얕보는 그 믿음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어떤 작가의 글이나 말이 고스란히 그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도 연결됩니다. 살아오면서 듣고 읽었던 이야기의 총체로 우리 각자는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지요. 나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내 생각이지만 내가 그런 사회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내 생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극한으로 따지면 하나도 내 생각인 게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 말이 소중히 경청되기를 바라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욕심을 갖고 있습니다. 중론의 행위자 없는 행위, 신유물론자들이 말하는 행위성 이론들이 말하는 것은 상황, 배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나 물질과 같은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그 조건들 속에서 가능한 행위만 있습니다. 그 행위가 굳이 인간의 행위인지 비인간의 행위인지가 초점이 아니게 됩니다. 오로지 행뿐이라면 말이죠. 행위를 꼭 생명이나 인간이 한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그 극명한 예가 쓰러기 더미입니다. 쓰러기 더미 자체적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가스와 열, 분해작용들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생기하는 물질'로서 자체 사물-권력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인간도 이 쓰레기 더미인 비인간 물질의 하나의 행위소입니다. 이 배치에서 더 이상 인간 중심을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스피노자가 ‘신체를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 정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낱낱이 밝히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체의 변용능력은 결국 관계능력이고 어떤 배치, 어떤 관계에 놓일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관계로부터 발생하는 사건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상이 발생하는 배치를 볼 수 있어야 그 사태 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주체가 있어서 관계가 발생하는 게 아니라, 관계 속에서 주체가 생성되는 것이라는 걸 이해해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비인간 사물이 단지 우리가 지켜야할 환경이나 소중이 다루어야할 어떤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작동하는 ‘생동하는 물질적 행위소’라면 인간과 비인간 행위소는 종속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며 대등하게 작용합니다. “만약 벌레나 알루미늄(혹은 먹을 수 있는 것이나 줄기 세포) 그리고 그것들의 의욕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인간이 훌륭한 의지나 의도를 발휘하는 것은 설사 불가능하지는 않았더라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비인간 행위성을 인간 행위성의 가능 조건으로 상정해만 한다는 것은 분명 타당해 보인다.”(245쪽) 불교 유부의 능작인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입니다. 항아리를 직접적으로 깨버리는 망치를 빼고는 세상 모든 것은 항아리를 존속하도록 하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능작인입니다. 세상 어떤 조건 하나라도 빠지면 항아리는 지금 항아리로 존속할 수 없기에 세상 자체가 항아리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 물질성들에 행위소, 권력과 같은 말들을 붙이고 나아가 정치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인간을 ‘의인화’하며 여전히 인간중심적인 관점이 아닌가하는 비판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양태라는 조건을 벗어날 수 없듯 우리는 인간주의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오히려 그런 인간주의적 사고를 이런 비인간으로 확장할 수 있는 있습니다. 이런 의인화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구성되어 연합을 형성하는 물질성의 세계를 발견해낼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겁니다.
뭔가를 공부하면 알게 되는 것이 많아져야 할 것 같은데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곤 합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 답하기 어려워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물질은 무엇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안 것으로 위안삼아 이번 학기 공부 마감합니다. 모두들 수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인간주의적 사고를 인정하고, 한계가 있지만 비인간 물질들에 대한 정성을 다한 의인화를 시도하고,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물질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를 유보하며 고민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공부가 현재진행형임을 잘 보여주는 것 같네요!!
친절한 후기 덕분에 배운 것들을 다시 환기하게 됩니다! 2학기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주의적 인식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조금이라도 인식의 영역을 넓히고자 노력하는 이 과정...이것밖에 우리한테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해요.
저는 보통 후기를 쓰기 위해 녹취며 노트 보며 샘들 말 옮기기에 급급한데, 샘은 소화한 만큼 풀어쓰고자 노력하시는 게 보여 보기 좋습니다. 또 배웁니다~
후기 쓰느라 , 바지반장?으로서 한 학기 애써주셔서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