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기 첫 번째 시간(7.19) 공지입니다.
1) 강독 텍스트는 프란시스코 바렐라의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예류출판사)입니다. 1장~2장(~84쪽)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
2) 첫째 주는 강의가 있습니다. 그래도 <의식의 기원>(줄리언 제인스)를 찬찬히 읽어갑니다.
3) 간식은 이윤지 선생님과 제가 준비합니다
4) 후기는 이윤지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시간 자체를 사유할 수 있을까?
‘불교+물질’이라는 모토로 시작한 2학기, 저희는 불교의 물질관이 집대성된 <물질세계>의 제4장 ‘시時의 체계’를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물질 이야기를 하는데 왜 시간을 생각해야 하는가... 그것은 경아샘이 후기에 남겨 주신대로, 물질을 생각하는데 시간을 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치 순환논증처럼, 물질을 사유할 때 이미 시간을 고려하고 있고, 시간에 대해 말할 땐 물질의 달라짐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물질세계>에는 불교의 학파별로 시간을 사유하는 방식[시의 본질, 의존과 가유, 삼세, 최단시간, 미세한 무상]이 어떻게 나뉘는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상식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고도의 사유 앞에 머리가 헤롱헤롱해졌습니다. 시간은 4학기 주제니까 그때 알아보자는 괜한 여유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세미나에서 제게 남은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바로 ‘우리가 시간 자체를 사유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불교 정립 이전, 외도 바이쎄쒸까 학파는 시간을 모든 사물을 초월한 절대적 요소이자 항상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라는 것은 시가 적용되는 사물들과 본질이 별개이며, 모든 작용의 행위자이자, 항상한 실체이고, 찰나, 초, 분, 밤낮 등에 의해 드러나거나 구현된다고 주장”(346쪽)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뉴턴 과학에서 주장하는 시간과 비슷합니다. 시간은 그 안에 담기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캔버스처럼 독자적인 축이자 연속적이고 편재하는 배경입니다. 불교로 넘어오면 어떨까요? 아비달마 이론에서 시간은 여전히 사물들과는 별개의 질이지만, 항상한 법은 아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로 파악되며, 그것들은 생-주-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시간은 유위법이지만, 색이나 식이 아니며 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 유위법이므로 ‘불상응행법’이라고 합니다.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말합니다. “시는 무엇인가? 인과가 끊임없이 일어남에 시라고 지칭한다.”(351쪽) 즉, 일반적으로 ‘시’라는 것은 색과 식의 어떤 부분에 시설된 존재입니다. 시간은 색과 심의 변화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그래서 “모든 유위법에 충족된 변화의 본성을 가진 불상응행법”(351쪽)이지요. 모든 유위법은 세 가지 상태를 거칩니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항아리 미래), 생겨나서 멸하지 않은 상태(항아리 현재), 생겨나서 멸한 상태(항아리 과거). 시간은 이 인과들에 시설해서만 건립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시간은 언제나 색과 식의 특정한 상태들(공간적 배치의 변화)에 따르는 부수적인 것일까요? 인과적 배열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적어도 유부에서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색온은 무상함은 생-주-멸의 삼상을 가지며, 그 상 하나하나도 또다시 그것을 생주멸하게 하는 원인을 갖습니다. 그래서 유위법은 첫 찰나에 생겨나고, 중간 찰나에 머물고, 그 다음은 소멸하지요. 여기에는 사실상 흐름으로서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필름 이미지처럼 서로 단절된 매 찰나들이 염주알처럼 이어져서 형성된 효과에 다름 아닙니다. 하지만 경량부에서는 다릅니다. 경량부는 유위법이 첫 찰나에 생기는 순간부터 한 찰나도 머물지 않는 본성을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즉 단절없는 흐름을 사유하기 시작한 것이죠. 끊어진 필름은 없습니다. 찰나가 있다 해도 그것은 이미 앞의 것이 스며들고 있고, 뒤의 것으로 넘겨지고 있는, 겹쳐져지고 얽혀있는 것입니다. “첫 찰나 자체가 자신의 시점에 머물지 않는 본성을 가지는 것”(376쪽)이죠. 이것이 ‘상속’으로서의 시간입니다. 가장 짧은 시간 단위인 ‘시변제찰나’에 조차도 사물의 생주멸 삼상이 함께 흐르고 있는 것이죠. 점멸하며 시간, 생주멸을 포함한 찰나. 이것이야말로 무상으로서의 시간이며, 이러한 단절 없는 시간에 대한 사유는 더 디테일하게 ‘상속무상’(거친무상)과 ‘찰나무상’(미세한 무상)으로 나뉘어 사유됩니다. 이는 한 행위 시작과 종결을 다루는 시간 단위인 성사찰나와 최소 시간을 말하는 단위인 시변제찰의 구분과도 유사합니다.
이렇게 시간에 대한 맛보기를 하고 나니, 4학기가 더욱 기대됩니다. 그때 다시 <물질세계>의 ‘시의 체계’로 돌아올 수 있겠네요!!
오후 강의 시간에는 제인 베넷의 <생동하는 물질>을 경유하여, 사물-권력이라는 개념과 그것으로부터 물질/인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정치학에 대한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경아샘의 후기에 잘 나와있으니 참고해주세요~!! 비록 사물을 지나치게 의인화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런 정치-사물 생태학이 던져주는 힘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 있는 듯합니다. 그런 시도 자체가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경계들을 해체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라고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의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을 받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구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사물/생명의 경계를 묻는 베넷의 시도는 ‘골치 아프게 만들기’이며 우리는 그 답을 머리 빠지게 고민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거기에 사유의 의미가 있는 것이죠!
그럼, 남은 방학 즐겁게 건강하게 보내시고요! 불교+‘의식’으로 돌아오는 3학기 첫 시간인 7월 19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