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둥! 불교+철학의 세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주제는 바로 ‘의식’입니다. 사실 불교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의 본성을 심오하고도 체계적으로 탐구한 종교-철학이기에 ‘의식’이라는 주제는 불교의 메인 테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근대의 뇌과학을 기반에 둔 서양철학의 내면 탐구들과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 “자아의 그림자 영역”응으로까지 내려가는 이번 학기는 기대가 만땅입니다!
그 전에 먼저 두 번째 시간 공지를 나눠야겠죠.
1) 오전 낭송 텍스트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3장 ‘꿈과 무의식’을 읽고 옵니다.
2) 오후 세미나 텍스트 <의식의 기원> 1권 1~3장을 읽어옵니다. 발제는 저와 정은이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3) 후기는 이미영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정혜윤 선생님과 이미영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자기’self의 역사
저희는 프란시스코 발렐라가 풀어 쓴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를 읽고 있습니다. 제목대로 대화집인 이 책은 달라이 라마와 세계적인 석학들이 2년에 한 번씩 만나 일주일간 특정 주제를 두고 발표하고 토론하는 ‘마음과 삶’ 모임의 네 번째 모임(1992년)을 풀어 쓴 책입니다.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일상적인 마음이 분해되어 전혀 다른 영역으로 통하게 되는 두 가지 삶의 통로”이자 “자아의 그림자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잠과 꿈입니다.
1장에서는 서구 역사에서 ‘자기’ 혹은 ‘자아’(self)란 무엇인가에 대한 찰스 테일러의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이는 <자아의 원천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어 있는 책에 실린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리의 역사에서 ‘나는 자기이다 I am a self’라고 말하는 것은 지난 2세기 동안에 생긴 아주 새로운 현상”(<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29쪽)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지칭하기 위해 자기라는 말 대신 ‘영혼’이나 ‘지적 존재’ 같은 말을 써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기라는 말을 쓰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존재 인식적 변화가 발견 됩니다.
첫째는 ‘자기 통제’ 개념의 등장입니다. 17세기, 기계론적 우주관이 자리 잡으면서 객관세계와 주관세계가 명확히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고나 감각이 일어나는 “우리 자신의 신체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기계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는 통제자이자 통제하는 힘으로 사유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는 도구로써 이성을 사용하는 능력을 자기 안에 가지게 되었습니다.”(32쪽) 둘째는 자기 탐구의 문제인데요. 비슷한 시기, 기독교에서 이어져 왔던 영혼과 삶에 대한 ‘자기 반성’이라는 능력은 기독교적 형식을 넘어서 인간만의 독특한 능력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존재 방식을 지니므로 따라서 그 본성을 자기 탐구를 통해 찾아내어야 한다”는 실존적 의무 및 가능성이 중심적 가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를 질문하며 나아가는 정체성 담론과도 연결됩니다. 스스로의 존재를 통제하거나 탐구하는 주체 혹은 그런 능력이 바로 자기라는 말이 갖는 독특함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제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동안 이러한 ‘자기’를 끊임없이 전제하고 있음이 보입니다. 그렇게 보고 있다고 간주하는 저 자신 역시도 ‘자기’이겠지요.
숙면은 어디에...? REM수면과 잠 속의 의식
서구적 자기에 대한 개론 이후에 이어진 주제는 잠이었습니다. 저자인 프란시스코 발렐라는 뇌전도를 이용한 신경과학의 수면 패턴 분석을 소개합니다. “수면은 한 가지 상태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 수면은 시간대에 따라 매우 규칙적인 패턴을 지니며, 인간 의식의 도 다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53쪽) 즉 잠은 REM수면과 비REM수면으로 나뉩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REM수면의 특징은 우리가 아는 잠과는 매우 다릅니다. 근육 운동이 늘어지고 심박이나 혈압이 감소하는 비REM수면과 달리 REM수면에서는 호흡이 증가하고 대뇌 활동이 증가하고 안구 운동이 급속해지죠. 이때 깨우면,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꿈을 꾸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REM수면과 더불어 꿈을 꾸면서 뇌가 활성화되는 경험, 즉 인지활동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양질의 수면을 갈망하게 된 저로서는, REM수면이 과연 숙면을 보장하는가 방해하는가를 생각하며 따라 읽었는데요. 결과적으로 REM수면은 회복과 보충이기보다는 더 많은 산소와 혈액을 가동시키는 의식 내의 운동임을 알고 좀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와 과학자들은 바로 이 수면상의 인지활동으로부터 불교의 미세의식을 언어화할 계기를 찾으려 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잠든 시기도 이어지는 미세한 의식에 대한 설명들이 나옵니다.
색신(色身, gross body)가 있고 미세신(微細身, subtle body)(67쪽)가 있습니다. 이 둘이 어떤 핵심적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몸’에 해당하는 영역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와 대응하는 듯 일반의식(gross consciousness)와 미세의식(subtle consciousness)가 있습니다. 생체 에너지(vital energy, 프라나)의 변화에 따라 전자는 후자로 이행할 수 있습니다. 생체 에너지의 변화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지수화풍 네 원소가 분해됨으로써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변화, 집중과 상상력의 힘을 이용하는 명상의 결과, 특수한 수행을 통해 이뤄지는 성교의 방식. 문제는, 이렇게 이야기된 미세의식이 우리의 일상적 꿈(REM은 거의 모든 포유동물이 경험합니다)에서 나타나는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고도의 수행을 통해 얻어낸 ‘잠의 청정(clear light of sleep)’이라고 할 수 있는지 헷갈린다는 점입니다. 대화집이기 때문인지 이 책에서는 자세한 층위를 설명해주지 않는데요. 설상가상으로 “공(空)을 느끼게 되는 단계들”(82쪽)로서 “‘나’의 의식이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없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 “생각이 없는 생각thoughtless thought”까지 등장하여 혼란은 가중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상태를 구사론에서 얼핏 들었던 마음이 공간적 제약 없이 쭉 넒어져버린 무색계의 ‘공무변처(空無邊處) 같은 단계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숙면을 기대하고 왔다가 너무 멀리 나아가버린 것 같군요...
의식과 ‘종교적인 것’
사실 3학기에 탐구하려는 ‘의식’이라는 용어는 폭이 정말 광대합니다. 사고, 자각, 인식의 차이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질문에 과학자들이 답하듯, 인식이나 인지는 아무래도 대상과 주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식이라고 하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의식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이라는 용어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의식에 접근해 들어가는 길은 수천가지나 될 수 있습니다. 신경과학처럼 물질적 분석을 이용할 수도 있겠고, 정신분석이나 심심리학의 방법, 언어학이나 형이상학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복잡다단한 의식의 문제를, 채운샘께서는 다섯 명의 철학자의 사유를 경유해 더듬더듬 알아가 보자고 하셨습니다.
윌리엄 제임스(1842~1910), 앙리 베르그손(1859~1941), 에드문트 후설(1859~1938),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6), 칼 융(1875~1961). 이들이 그 다섯 주자입니다. 어디선가 한번씩 들어본 듯하죠? 그렇다면 굉장한 거인이라고 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대지성이었던 이 철학자들은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당대의 과학적 성과들을 활용해 인간의 의식을 탐구했는데요. 놀라운 점은 이들 모두가 말년에 가서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저술을 시도했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 내면에 가닿고자 한 이들에게서 과학과 철학과 종교가 한 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샛길로 들어가, ‘종교적인 것’에 대해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공부를 하실수록 ‘종교적인 것’ ‘영적인 것’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음을 알아차리신다고 하셨습니다. 협소한 의미의 종교가 아니라, 미학적이고 실존적인 어떤 숭고함 같은 인간 삶의 아우라 혹은 경건성 말이죠. 미셸 세르는 말년 저작 <religion>에서 어원적으로 종교를 분석한다고 합니다. religion은 ‘다시 읽다’와 ‘결속’이라는 두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내려진 계시, 새겨진 기호, 벌어진 사건들을 거듭해서 읽고 해석해내는 실천을 하지 않은 성인은 없습니다. 예수, 부처, 공자는 모두 세상을 다른 독법으로 다르게 다시 읽어낸 자들입니다. 깨달았다는 것, 알았다는 것은 바로 의식의 이런 비약을 말합니다. 이는 곧 특정한 결속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과 혹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파편적인 존재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을 발휘합니다. 또한 이해의 다른 차원, 삶의 다른 결을 살아내는 자들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의례나 제의로 형식화되어 우리가 아는 종교집단을 만들기도 합니다. 다시 읽어내는 것과 연결성을 만들어내는 것. 이 두 가지가 종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의 근원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주자는 윌리엄 제임스였습니다. 다른 네 명에 비해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우리가 정말 정말 많이 사용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의 창시자이자 그 유명한 실용주의라고 잘못 알려진 ‘프로그머티즘’을 발전시킨 사람이기도 합니다. 모든 게 갖춰진 환경 속에서 지독한 허무에 직면해야하는 우여곡절을 경험한 윌리엄 제임스의 의식 탐구가 어떠했는가는 윤지샘의 후기에서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