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팀에서는 3학기에 세 권의 책을 읽습니다. 달라이라마 존자님과 서양 학자들이 만나 잠과 꿈 그리고 죽음에 대해 토론한 이야기를 기록한 <달라이라마와의 대화>, 그리고 달라이라마께서 마음과 마음의 수행에 대해 가르치신 내용을 담은 <달라이라마, 명상을 말하다>, 요 두 권은 낭송하고 짧게 토론하며 읽습니다. 그리고 좀 더 심도깊게 세미나를 하며 공부할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이라는 책이 있지요. 이 세 권 모두 인간의 의식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간 불교 공부를 해오면서 불교에서는 의식을 어떻게 설명하고 식의 다양한 층위들을 어떻게 나누는지 살펴보았습니다만, 막상 설명하자면 여전히 난해하고 어렵습니다.
지난 2학기 저희가 “물질”을 중심으로 공부했다면, 채운샘께선 이번엔 정신과 마음의 분야, 이 중에서도 핵심이 되는 “의식”을 공부해보자는 계획을 세우셨어요. 의식은 인간의 마음, 소위 mind라고 하는 것과 가장 가깝고도 가장 폭넓게 쓰이는 개념입니다. 이것을 불교의 스승이신 달라이라마 존자님은 어떻게 설명하시는지를 보고, 불교와 서양 학자들과의 대화 속에서는 어떤 질문들이 제기되는지를 살펴보면서, 한편으로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동안 의식이 어떻게 규정해왔는가를 공부해봅니다. 근데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채운샘께서는 샘께서 직접 선별하신 5명의 서양 철학자들이 어떻게 의식을 탐구해왔는가를 강의를 통해 짚어주시기로 하셨어요. 이런 걸 공부하다니 매우 아카데믹한 커리큘럼이죠? ^^ 이 공부를 성실하게 따라가다 보면 3학기가 끝날 때 쯤, 의식-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저희 나름대로 뭔가 손안에 쥐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요~? 덥고 습하고 힘도 들고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는 조금만 뒤로 하고 또 한 번 열심히 해봅시다요. ㅎ
지난 1교시에는 분량이 많아서 2시간을 꼬박 낭송으로 채웠어요. 토론할 시간이 없어서 (일단 점심을 먹는 게 더 중요한 관계로 ㅎㅎ) 산책을 다녀온 후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짧은 토론을 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뭘 이리 열심히 토론하느냐며 잠시 의아해하셨지만, 실은 그게 토론이라기 보다는 저희끼리 궁금한 질문들을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단 말이죠. 책에서는 달라이라마와 서양학자들이 문제 제기를 하며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뾰족하게 결론이 나는 것은 없으니 저희도 궁금한 점들 투성이었습니다. 샘께서는 그렇게 책에서 던져진 질문들을 잘 “토스받아서” 저희 나름대로 공부할 거리를 만들어 가라고 하셨어요. 맞는 말씀이죠. 책을 보고 이게 답이라고 밑줄 그어가며 공부하는 게 아니라, 저희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가다보면 그게 저희의 공부를 더 확장시키는 것 같습니다. 물론 헤매기는 하지만요. ㅎ
의식을 탐구한 5명의 서양 철학자 중 채운샘께서 첫 강의로 소개해주신 철학자는 윌리엄 제임스 (1842-1910) 라는 분이었습니다. 이 분이 소설가 헨리 제임스 주니어의 형이라고 설명해 주셨는데 헨리 제임스를 모르는 저로서는 잠시 당혹...^^;; 암튼 근데 이분이 매우 드라마틱한 인생을 사신 분이더라고요. 윌리엄 제임스가 의식을 어떻게 설명했느냐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분의 삶을 잠시 소개하면요. 우선 아버지인 헨리 제임스 시니어라는 분이 어마어마한 백만장자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특이하게도 당시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평생 그쪽을 공부하셨다고 해요. 흥미로운 건 신비주의자 아버지 밑에서 물질적으로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두 아들이 방탕한 길로 빠진 것이 아니라 나름 각자의 길을 모색해서 훌륭한 철학자 그리고 문인으로 성장했다는 겁니다. 어떤 식이든 아버지의 정신세계 탐구가 자식들에게도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상을 심어준 것일까요? 암튼 샘께서는 요 지점에서 잠시 흥미로운 코멘트를 하나 하고 넘어가셨죠. 금수저 자식에겐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응석받이로 크는 것, 또 하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이 내포한 지독한 허무를 느끼고 거기에서 어떤 길을 가게 되는 것. 윌리엄 제임스는 어땠을까요? 당근 후자의 길을 갔으니 이렇게 저희도 알게 된 것이겠죠. 이분은 지독한 허무감에 자살 충동에도 많이 시달렸었다고 합니다. 대학에서는 화학을 전공했다가 의사가 되기도 했다가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고 아마존으로 여행도 갔다가... 암튼 남북 전쟁 중이던 당시 군인으로 전쟁터에만 나가지 않았었지, 젊은 시절 본인의 삶 자체가 전쟁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지독한 20대를 졸업한 후에 결혼도 하고 책도 씁니다. 장장 10년간의 저술 끝에 <심리학 원리>라는 대단한 책을 출간하는데 이 책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미국 프래그머티즘 (pragmatism)의 시조가 되었다고 해요. 철학자 비트겐 슈타인, 올리버 섹스도 존경하고 좋아했던 철학자라고 하니, 흠 뭔가 호감 뿜뿜, 관심이 가죠.
<심리학 원리>에는 윌리엄 제임스가 탐구한 마음과 정신–의식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여기에 저희도 들어본, 아주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의식의 흐름”이예요. 뭣도 모르고 그냥 가져다 쓰던 표현인데, ^^;; 이게 의식에 대한 윌리엄 제임스의 사유를 핵심적으로 설명한 것이더군요. 우선 중요한 건 “의식의 흐름”이라는 게 ‘하나의 의식이 흐른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는 사라지고 나타나는 지각의 정보들을 연속적 방식으로 생산해내는데 이것은 불연속적인 것들을 계속 결합하는 과정과 같습니다. 마치 스크린 위의 영화와도 같아요. 1초에 24컷의 사진을 빠르게 돌려서 보면 동작이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죠. 윌리엄 제임스 생전에는 아직 영화가 발명되지 않았지만 여러 그림을 빠르게 돌려서 움직임을 보여주는 “조이트로프(zoetroph)”라는 기구가 있었다고 해요. 윌리엄 제임스는 의식이 작동하는 방식이 조이트로프를 돌려보며 연속된 동작으로 착시 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의식의 흐름이란 외부의 정보를 수동적으로 거울처럼 비추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외부의 정보를 역동적으로 조합하는 것입니다. 의식이 흐른다는 건 생겨난 의식이 흘러가며 사라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불연속적인 정보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의식을 형성하고 이렇게 형성된 의식이 우리의 자아감을 형성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사실 의식이 무엇인가를 질문한다는 것은 ‘결국 자아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나를 ‘나’로 느끼는데, 나를 나로 여기는 이 의식이란 무엇이냔 말이죠. 여기에는 ‘연속성’이라는 시간의 문제가 개입됩니다. 보르헤스는 “시간은 나의 본질이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 나를 휩쓸어 간다. 내가 바로 그 시간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죠. 시간의 문제는 늘 알 듯 말 듯 어려운 주제인데요, 샘의 선견지명(!)으로 저희는 4학기에 “시간”을 주제로 공부를 할 예정입죠. 채운샘의 공부에 대한 혜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저희는 그저 더듬더듬 따라가는 것으로. ㅎ
다시 윌리엄 제임스로 돌아와서요, 이 분은 의식이 ‘능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것에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의식은 외부적인 것을 단순히 비추는 게 아니라 매번 역동적으로 세계를 구성해내는 것이라고 말이죠. 조이트로프의 원리에서 보듯이 불연속의 선들이 있는데 이 선들이 겹치는 지점이 있고 이 겹치는 선들에서 이행이 일어난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눈은 분절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 이것들을 의식 속에서 이행-접합시켜 주면 마치 동일한 것-연속된 것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니게 됩니다. 여기에 앞으로 오게 될 것도 예견하면서 볼 수 있게 되죠. 이것이 의식의 흐름입니다.
그러니까 의식은 수동적으로 비추거나 주어진 것이 아니고 역동적 과정으로써 존재하며 그렇게 세계를 지속적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윌리엄 제임스는 이런 의식의 작동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고 해요. 무엇인가에 대해 의식을 갖는다는 것에는 내가 어떤 의식을 구성한다는 선택의 문제가 들어가게 되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보는 게 아니라 어떤 것들만 선별적으로 봅니다. 하여 의식이 능동적으로 수용(receptivity)한다는 표현이 모순되지 않는 거죠. 하여 윌리엄 제임스가 강조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알아차리고 있는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알아차림! ㅎㅎ 불교의 단어와 똑같아서 반가웠는데 ^^ 샘께선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통용되는 지점도 있다고 하셨죠. (참고로 윌리엄 제임스는 불교를 알지 못했고 불교와 인연이 닿았던 것도 아니라고 해요)
‘나는 무엇을 알아차리고 있는가?’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이 세계의 정보를 시시각각 역동적으로 재구성하는데 이 재구성의 방식은 개인적 기질, 문화적 차이에 따라 다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알아차리고 있는가라는 지점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의식을 재구성하는 방식에서 빠르게 이행의 부분을 명료하게 알아차리지 못함으로써 그저 ‘덩어리’, ‘동일시’, ‘유사성’의 방식으로밖에 세계를 인식하지 못한다고 하죠. 이걸 그는 깜깜이 같은 ‘터널의 시야’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틈을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식의 흐름에 박히지 않는다는 것은 판에 박힌 사유를 부수고, 전제에 균열을 내고, 기존의 믿음을 붕괴시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 차리기란 정신 차리기의 동의어이기도 하고요. 윌리엄 제임스는 이 모든 깨어있음, 정신 차림은 지금 여기 발밑의 활동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지점이 그를 프래그머티즘의 시조가 되게 했다고 하고요. 그는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이것이 지금 여기의 삶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하죠. 샘께선 의식 차리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릴 때라고 하셨는데, 이건 어떤 종교-철학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별적 사고를 중단할 때, 집착하는 것을 놓아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을 관할 수 있고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