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에 대한 공부, 생각보다 재밌잖아!🤩’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과학과 임상과 불교가 얽혀서 이야기들이 연결되고 엉키며 뻗어나가는 과정이 상당히 재미납니다.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없어서일까요, 제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연결되어서일까요? 이번 주에 나왔던 흥미로운 구절들을 나누기 전에 먼저 다음 시간(8.2) 공지를 드립니다!
1)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4, 5, 6장(153~202쪽)을 읽어옵니다.
2)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그래도 <의식의 기원>을 읽어갑니다.
3) 간식은 김호정 선생님과 정혜윤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정혜윤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의식 탐구의 세 보고 : 신경과학과 정신분석 그리고 불교
3학기 오전 낭송 첫 번째 텍스트는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입니다. 이번 주에는 3장 ‘꿈과 무의식’을 읽었는데요. 달라이 라마를 둘러싼 석학들 진영에서 이번에 나선 주자는 심리분석(정신분석)계의 전문가 조이스 맥도걸 박사였습니다. 그녀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기반으로 꿈과 무의식을 설명하고 자신의 환자 마리-조세의 임상 사례를 길게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후의 논의는 정신적 성향이 어떻게 발달하고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루어집니다.
우선 프로이트에게 꿈은 인간 의식의 이면을 연구하는 데 핵심이었습니다. 그의 주저 <꿈의 해석>(1896)은 무의식 연구의 출발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은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는 억제되어 있고 가려져 있는 무의식의 풍경을 풀어 들어갈 수 있는 샛길입니다. 프로이트는 잠에 들어가 수면을 유지하는 것을 ‘나르시시즘적 퇴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자궁 속의 상태로 돌아고자 하는 죽음충동의 발현인데,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 우리를 끌어내는 힘이 있는데, 그것은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소원, 즉 본능충동입니다. 그런 가운데 인식작용은 낮에 겪었던 일들을 꿈의 재료로 사용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프로이트는 이렇게 체험되는 ‘현재적 꿈’보다도, 그 이미지들 속에 감춰진 욕망과 상처들인 ‘잠재적인 꿈’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정신분석은 꿈의 이미지를 상징으로 활용하여 상담과 치료를 진행하고 있고요. 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질문에서 밝혀지듯, “의식, 전의식, 무의식에 상응하는 신경과학적 상태”(103쪽)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부는 뇌간에서 무의식의 물리적 근거를 찾지만 이는 뇌과학적으로 부적합합니다.
“티벳 불교에도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상응하는 개념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124쪽)
달라이 라마는 ‘잠재적 의식 상태’, ‘훈습(薰習)’, ‘알라야식(일체종자식)’, 그리고 ‘집단적 업’을 이야기합니다. 잠재적 의식은 현재 의식으로 드러나지 않는 미세한 의식입니다. 의식의 범주 밖에 있는 “훈습은 한 개인의 과거 행위와 경험이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다는 의미”(124쪽)인데, 이 기억은 “전생으로부터 오는 것”(126쪽)입니다. 즉 “부모와의 접촉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개인의 의식흐름과 함께 전해진다는 것”(128쪽)이죠. 이것은 아이의 양육이나 유전이 아니라 장구한 흐름에서 옵니다. 알라야식은 “시작이 없는 시간으로부터 나온, 반복되는 삶을 통해 전해지는 의식의 흐름”(134쪽)입니다. 환생을 가능케 하며, 훈습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물론 불교도 분야가 많기에, 기억의 저장소로서의 알라야식을 인정하지 않는 학파도 있습니다. 중관학파가 대표적이죠. 마지막으로 집단적 업은 외부 환경을 생산합니다. 이것은 각각의 종이 가지고 있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기에 자연법칙과 생물학으로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서양의 학자들을 무척 흥분시킨 것은 훈습과 알라야식 문제였습니다. 성향의 지속에 관한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의식을 다루는 서구과학의 두 학문인 신경과학과 심리분석 사이에 긴장이 느껴집니다. 전자는 반복 가능한 실험과 물리현상에 국한된 실증과학 전통을 따르는 반면 후자는 정신병 환자들의 임상 사례와 여러 상징들에 의존해 의식되지 않는 이면을 분석해갑니다. 양자는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하고 상대의 주장에서 한계를 지적합니다. 신경학자들은 생물의 특질은 계통발생과 개체발생 외에는 없다고 말합니다. 즉 특정한 성질은 유전에 의한 선천성과 학습에 의한 후천성 뿐이라는 것이죠. 후천적인 것은 유전되지 않습니다. 만약 화를 잘 내는 성격 같은 성향이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에게 전해졌다면, 학습된 것이 전해진 게 아니라 태내에서의 영향이 신체 구성을 변형시켰으리라는 것이 생물학의 설명입니다. 신경과학은 어쨌든 물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만을 설명으로 가져옵니다. 하지만 정신분석은 실증성에 덜 얽매이면서 ‘몸과 마음의 연결체’를 가정합니다. 그것은 물론 태내 기억이라는 신경과학의 한계를 넘어갑니다. 하지만 알라야식처럼 세대나 개체 발생과 무관한 의식흐름까지는 아니죠. 하지만 융 심리학에서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선험지식 개념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질문이 쏟아집니다. 그럼 그 훈습되어 이어지고 있는 흐름, “과거의 사건과 지금의 나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의 정체는 무엇입니까?”(140쪽) 경전의 기술에 의거한 현교적 답변에서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유식학파라면 알라야식에 의한 훈습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저장소라는 실체적 근거를 가정하게 됩니다. 귀류논증(프라산기카) 중관학파에서는 알라야식도 의식적 연속체 개념도 비판합니다. 그것들은 어쨌든 성향의 저장소 역할을 전제하면서 “본질적인 것, 분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을 거라고 헛되이 찾고”(136쪽) 있는 결과라고 말합니다. 연속성은 “실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아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137쪽)이라면서요. 이것이 바로 ‘실아(實我, mere-I)’라고 말합니다. ‘그냥 나’, ‘단지 나인 것’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는 이어지는 의식이라는 건, 오온으로 결합되어 운동하는 이 개체 너머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훈습은 어디에 저장되겠습니까? 실아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그냥 거기에 사람이 있으니까요. 따라서 사람이 저장소입니다.”(137쪽)
이 아리송하고도 심오한 구절들 앞에서 학자들은 개별자와 보편자 개념을 이야기하고, 달라이라마는 밀교에서 말하는 미세 의식과 언어적 존재성 등을 쭉 이야기해주십니다. 여기서부터 헤롱헤롱해지는데요. 이 부분은 앞으로의 공부에서 차근히 풀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의식’은 사유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며, 머릿속에 있지도 않다!
오후 세미나의 텍스트는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입니다. 네, 딱딱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제목입니다. 게다가 고루해 보이는 표지이기까지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상담이라도 받는 듯한 문체와 풍성한 실험 사례가 더해져서, 의식을 둘러싼 우리의 상식들이 틀렸음을 하나하나 밝혀내는 과정은 흡입력이 굉장합니다. 게다가 의식의 기원 탐구에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정신을 가지고 살았던 인간들, 즉 신들의 ‘목소리’를 행위의 동기로 가지고 살았던 <일리아스>의 인간들을 소개하는 대목은 저희에게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고요. 이번 주에는 서문과 1~3장을 읽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숙제방에 올라온 발제문을 참고해주시고, 미영샘의 후기를 확인해주세요!
저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의식이 학습은 물론 사유나 이성에도 필수적이지 않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저자는 우리에게는 의식에 대한 나름의 관찰이나 표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는 의식을 의식하곤 한다는 거죠. 그러나 이런 의식에 대한 의식은 얼마나 사실일까요? 사실 우리가 의식한다고 여기는 의식은 생략되고 짜깁기 된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저자의 비유대로 우리의 의식은 깜깜한 밤에 켜진 손전등 같아서, 오로지 빛이 비추는 부분만이 의식으로 실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손전등은 굉장히 일부, 해변의 모래알 정도만을 비추고 있을지 모르고 그마저도 계속 단절이 일어나고 있을 텐데,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의식은 시공간적으로 연속적이고 자명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일상의 대부분 행위는 의식 없이 일어납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양치를 하거나 걷거나 노래를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축구를 할 때 우리는 그 행위의 매순간순간을 정밀하게 의식하고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분명 그 행위는 끊기고 삐걱이며 방해를 받고 말 것입니다. 의식은 시작할 때 혹은 중간에 혹은 마지막에 찾아올 뿐 과정에서는 별로 필요가 없지요. 이 메커니즘은 사유와 이성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무언가를 어렵게 어렵게 떠올리거나 연상하거나, 혹은 복잡하게 꼬인 문제를 풀어낼 때를 잘 되짚어보면, 의식은 뒷전에 물러나 있습니다. 문제를 설정하고 파악하는 데에는 의식하는 일이 개입될 수 있지만, 정작 지적인 수행을 하는 것은 자동입니다. 놀랍게도 수많은 물리학자나 수학자가 몇날며칠 고뇌하던 난제의 답을 만나는 장소는 3B, bus, bath, bed라고 합니다. 수수께끼는 무심코, 의식하지 않고 있을 때 풀립니다. 의식은 그저 발견할 뿐이죠. 과연 누가 푼 걸까요?
또 한가지 (소름돋게) 흥미로운 분석은, 의식이 우리 머릿속에 있지 않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제임스는 “이것이 통속적인 의식이론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고 생각”(76쪽)한다고 적습니다. 우리는 마치 눈 뒤 어딘가 의식이 활동하는 공간이 있다고 여기지만 이것은 굉장히 자의적 문제이다. 물론 의식은 ‘나’의 신체적 감각이나 의지와 관련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떠올리는 그 ‘나’는 사실 은유입니다. 그것은 상상과 관념으로 엮어진 유사 ‘나’(I)이거나 은유로서의 ‘나’(Me)입니다. 뉴스를 볼 때를 생각해봅시다. 늘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해주는 게 뉴스이기에 우리는 그 앞에서 충격받기도 하고 동정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상상의 ‘세계’에서 행동하고 있는 상상의 ‘자아’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상상의 ‘결과’에 근거하여”(101쪽) 이런저런 반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리인입니다. 이것은 가능적인 미래에 대해서만이 아닙니다. 만약 며칠 전에 갔다 온 물놀이를 떠올려본다고 해봅시다. 혹은 지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본다고 해봅시다. 놀랍게도 우리는 그 일련의 과정을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56쪽)의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마치 CCTV의 시선이라도 가진 듯 말이죠! 사실은 블랙박스나 액션캠의 시선이어야 마땅한데도 우리는 자신을 우리 밖에서 의식하는 것이죠. 실제로 물놀이에서의 더위나 물의 촉감, 온도나 피로감, 축구할 때의 복잡한 소란 등이 느껴져야 하지만 그것들은 온데간데 없고 전체적인 서사가 의식될 뿐입니다. 그런 사실 그런 시선이나 판단은 그 당시는 물론 “전에는 한 번도 관찰해본 적이 없는 것”(57쪽)입니다. 그렇다면 의식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전쟁에서 좌측 전두엽에 부상을 입은 환자는 천장 모서리에서 ‘잃었던’ 의식을 되찾았는데, 그곳에서 의식은 간이침대에 누워 붕대에 감싸여 있는 자신을 쾌활한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78쪽)고 진술합니다.
의식은 어휘적 은유작업이다
아직 저자는 그래서 의식은 사실 뭐야! 라고 명쾌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힌트를 흘려주기는 합니다. “의식은 어휘적 은유작업이라는 것이 추후에 입증될 가능성”(95쪽)을 말하죠. 겨우 언어라니, 너무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여기서 언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시작용에 국한된 단순한 문자나 기호가 아닙니다. 잠재성은 ‘은유적 작업’에 있습니다. 그 작업은 이렇게 펼쳐집니다.
“이것은 표현의 구체적 은유들에서, 즉 단지 기능적 의미에서만 존재하는 피석의체를 투사하는 전자의 석의체들에서 직조되어 나온다. 더구나 그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생성해나가는 과정에서, 각각의 새로운 피석의체는 자신에 입각하여 하나의 피은유체가 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석의체들을 지닌 새로운 은유체들을 계속해서 낳게 된다.”(95쪽)
전문용어가 난무하지만, 요는 간단합니다. 의식은 어휘 기호들이 가져오는 부수적이고 잉여적인 의미-효과들을 따라 무한히 자가증식한다는 것이죠. “산에 눈이 이불처럼 덮였다”고 하면, 눈은 은유의 대상(피은유체)이고 이불은 은유 기호(은유체)입니다. 은유 작업은 단지 단어를 매칭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가 뿜어내는 뉘앙스들(석의체)을 함께 가져옵니다. 이불의 특성들이 괜히 눈의 특성(피석의체)으로 전이되는 것이죠. 즉 푹신함, 포근함, 따뜻함 등의 정서들이 눈에도 부여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눈이 따뜻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즉 은유작업은 피은유체와는 전혀 상관 없던 특질들을 잉여적으로 덧붙입니다. 이것은 사실상 대상을 더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파악한다고 알려진 은유법의 일반적 기능을 벗어나는 일입니다. 사실 은유는 설명의 유용성을 기하는 역할 이전에 근본적으로 의미를 풍요롭게 하고 확장시키는 일을 합니다. 언어(문자 모양이나 발음)를 매개로 사유가 뭉게뭉게 증식하는 일을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합니다. 이런 예는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3장에서 정신분석자가 내담자의 꿈을 풀어내는 장면에도 많이 나옵니다.
“불어로 bitte는 배를 묶는 말뚝이지만, 발음이 같은 bite는 남자 성기를 의미하는 속어입니다. 파도로부터 배를 안전하게 묶어주는 bitte a amarrer는 역시 그녀의 아버지를 나타내는 것이고, 아버지의 성기로 상징화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아버지의 심볼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지요.”(<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111쪽)
저자는 인간 의식이 어휘들을 경유한 은유적 자가증식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걸까요? 그러면 우리는 왜 꿈속이나 분열증자와 같이 되지 않을까요? 비록 상상의 ‘나’지만 나름의 일관성을 갖게 되고 기억과 연상들이 마구 나아가지 않은 채 관념을 구성하게 되는 걸까요? 의식이 수행하는 이야기엮기가 붕괴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의문들이 마구마구 남는 세미나였습니다. 그거야, 차차 읽으면서 또 정리되겠죠? 물론 또 다른 질문이 남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