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꿈과 무의식에 대하여 (10시~12시 30분)
『달라이 라마와의 대화』 제3장 ‘꿈과 무의식’편을 읽고 30분 정도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구 문화의 두 흐름인 심리분석과 신경과학은 유전에 대해 계통발생적인 면과 개체발생적인 차원으로 나눠 얘기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관점으로는 유전은 ‘유기체의 생리적 및 형태적인 면에서만 가능한 것’(p129)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체형이나 체질은 계통발생적으로, 성격이나 학습은 개체발생적 차원으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프로이트 또한 무의식을 우리가 여러 세기에 걸쳐 물려받은 ‘인간성의 총화’라고 하면서 계통발생적 유산으로 보고 한 개인이 출생 후 경험하게 되는 것으로 구성되는 개체발생적 유산과 구별하였습니다. 서양학자들은 환생조차 계통발생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이것은 유전적 요소가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라고 하셨죠. 이 말을 듣고 서구 학자들은 현재 과학 개념 속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의식흐름이란 계통이나 개체 발생이 아닌 다른 차원의 범주를 나타내는 것 같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은 마음의 정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무의식과 꿈이 수행하는 역할을 일상적인 지식의 범주로 불러들입니다. 심리분석은 신경학과 정신병리학으로부터 탄생했다고 하지요. 인지과학의 출현과 함께 학문이론과 심리분석의 실용성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프로이트는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고리를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둘은 서로 다른 법칙이 적용되지만 서로 지속적으로 관계하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지요. 또한 언어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서 인간이 말에 의해 규정되고 말에 사로잡히는 모습 속에 감추어진 것을 찾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기억과 꿈을 출발점으로 합니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생명본능(life force)을 ‘리비도(libido)'라고 명명하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타인과의 접촉을 모색하며 사랑, 성욕, 종교적 느낌 그리고 모든 형태의 창조성 속에 있는 표현을 발견하고자 하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리비도에는 이것과 상반되는 힘도 있습니다. 자신의 파괴와 타인의 파괴를 포함하는 죽음본능(death force)이지요. 프로이트는 인간의 심리 속에는 이 두 본능간의 영원한 갈등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무의식에는 생명본능, 죽음본능과 함께 유년기의 기억과 자궁 속에서의 기억까지 모두 저장되어 있으며, 우리의 심리 세계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면서 외부세계의 요구와 충돌하고 그 해결책을 찾도록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잠을 잘 때 몸의 기능이 정지되므로 꿈이 행동을 대신한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의 과정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마음에 침입하는 꿈속의 모든 생각과 이미지는 몸으로부터의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고 봤습니다. 또한 몸은 무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꿈은 소원과 항상 연결되어 있으며, 소원을 충족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소원이란 잠의 상태에 머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의식으로부터 나오는 생각과 소원이 갈등을 일으킬 때 잠을 잘 수 없으므로 이런 세계를 분리시키고 잠의 상태를 지속시키기 위해 꿈을 꾼다고 생각했습니다. 꿈이 ‘잠의 수호신’이며 무의식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티벳 불교에서는 현재적 의식상태와 잠재적 의식 상태가 있으며, 이런 의식 너머의 훈습이 있다고 합니다. 훈습이란 한 개인의 과거 행위와 경험이 마음속에 저장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계통 발생적 유전이 불교의 훈습과 비슷하냐는 질의가 있었습니다. 달라이라마의 답변은 잠재적 성향, 즉 훈습에 대한 불교 이론은 계통 발생이 아니라 정신 활동이란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떤 점에서 생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충동이나 본능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시죠.
서양의 무의식 개념과 유식학파가 제기한 알라야식에 대한 비교가 있습니다. 일체종자식이라고도 하는 알라야식은 모든 훈습, 즉 현생과 전생에서 축적된 모든 습관과 잠재적 성향의 저장소입니다. 이는 시작이 없는 시간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반복되는 삶을 통해 전해지는 의식의 흐름으로 아기와 부모에게 따로 전달되는 훈습의 기반입니다. 알라야식과 무의식의 주된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알라야식은 개인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으로서 의식 표면에 드러납니다. 반면 무의식은 일상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확인할 수 없으며 꿈이나 최면 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은 은폐되어 있고, 드러난다고 해도 무의식 그 자체가 아니라 무의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잠재적 기억이나 성향을 드러낼 따름입니다. 반면에 알라야식은 항상 드러나 있으며 전체의식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의식 자체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후: 『의식의 기원』 서론과 제1권 1장~3장에 대한 발제와 토론 (1시30분~3시30분)
우리는 의식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시대마다 의식의 주제와 관심에 따라 의식을 다양하게 기술해 왔습니다. 본래 의식의 탐구는 심신 관계의 문제로 여겨졌으나 진화론이 등장한 이래 과학적인 문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진화상의 어디에서 의식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는지가 20세기 내내 사유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를 전제로 한 생각에서 의식은 물질의 속성, 원형질의 속성, 학습으로서의 의식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다 우리의 생활과 행동을 지배하는 의식이란 것이 과연 물질에서 올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됩니다. 다른 생명체에 비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인간이 어떤 형이상학적인 힘에 따라 비약적인 진화를 수행하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는 자연과학적 규칙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는 이론입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더욱 엄격한 자연도태설을 기반으로 한 이론이 등장합니다. 의식이란 두뇌의 신경회로도에서 발생되는 열로 단순한 부수현상에 지나기 않기에 사실상 아무 작용도 할 수 없으며 단순한 구경꾼 노릇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의식이 단지 행동의 무력한 그림자일 뿐이라면, 왜 행동을 망설일 때 의식이 더 집중되는지,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동할 때는 왜 거의 의식하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어서 창발적 진화론이 등장합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물의 속성이 수소나 산소의 속성만으로 도출될 수 없듯이, 의식 역시 진화상의 결정적인 단계에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출현했고, 일단 출현하자 의식은 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관여하고 신체적 행동에 인과적 영향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행동 통제자로서 의식의 지위는 회복시켰으나 의식이 언제 그렇게 출현했는지? 어떤 종에게 일어난 것이며, 그러기 위해 어떤 종류의 신경체계가 필요했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또다시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학설이 대두됩니다. 행동주의 이론으로 초기에는 단순한 구경꾼 이론과 매우 흡사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객관적이며 실용적인 사실을 갈망하게 됨으로써 행동주의는 활기차고 자극적인 모형과 수단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러나 행동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일 뿐이었습니다. 다만 의식을 밀쳐두었던 것이지요. 가장 최근의 이론으로는 망상활성화 체계가 있습니다. 이는 의식을 책임지고 있는 두뇌 부위들을 찾아내고, 그 부위들의 해부학적 진화를 추적해내기만 하면 의식의 기원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뇌 지식만으로는 그 뇌가 우리와 같은 의식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저자는 의식이 무엇인지의 개념부터 다시 정립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의식을 의식할 때 우리는 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자명한 것이라고 느낍니다. 의식은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 기분과 감정, 기억과 사고, 주의와 의지력 등을 규정하는 속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식이 개념의 기초요, 학습과 추리, 사유와 판단의 기초라고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경험할 때 그것을 기록하고 저장하며, 우리 마음대로 그 경험을 내성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는 것이 의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의식의 놀라운 심리작용과 내용이 우리 뇌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하나하나 엄밀하게 따져보고 이 모든 것이 다 거짓이고 오히려 의식의 기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 기회를 막아온 주범들이라고 말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의식은 도대체 존재하는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의식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말하고 판단하고 추리하는 등 우리의 일상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인종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단지 의식은 어휘적 은유작업이라는 것이 추후에 입증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려는 것뿐이다. 이것은 표현의 구체적 은유체들에서, 즉 단지 기능적 의미에서만 존재하는 피석의체를 투사하는 전자의 석의체들에서 직조되어 나온다. 더구나 그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생성해나가는 과정에서, 각각의 새로운 피석의(체)는 자신에 입각하여 하나의 피은유체가 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석의체들을 지닌 새로운 은유체들을 계속해서 낳게 된다. (p95)
제인스에 따르면 의식은 언어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언어의 가장 놀라운 속성은 은유를 만드는 것이지요. 은유는 ‘한 대상 표현을 다른 대상을 기술하는 데 사용하는 것’으로 이들 간에 모종의 유사성이 있거나 이들이 제3의 대상에 대한 관계에서 유사성이 있는 경우에 적용됩니다. 은유의 일반적 기능은 사물의 특정 면모를 지시하거나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어떤 것을 기술하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좀 더 친숙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은유의 중요한 기능은 문화가 복잡해짐에 따라, 필요할 때마나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낸다는 것입니다. 위의 인용문은 언어가 어떻게 계속 창발되는지의 과정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언어에 기반을 둔 의식 역시 조직된 방식으로 생성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는 물리적-행위적 세계와 의식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의식은 과거의 경험을 가득 지니고 있는 은유체로서, 미래의 행위나 결정 같은 알 수 없는 것에 끊임없이 선택적으로 작용하고, 또한 부분적으로 기억된 과거가 있는 은유체로서 현재의 자신과 미래의 자신에게 끊임없이 선택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의식에 따라 생성된 구조로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앞서 말한 의식 없이 살던 시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문헌적으로 고증하기 위해 제인스는 『일리아스』를 분석합니다. 그리하여 일리아스에서 드러나는 전사들의 행동과 판단에서 의식에 상당하는 단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그들은 내성할 대상으로서의 내적 정신 및 공간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체로서의 신체 또한 지칭되지 않습니다. 대신 손이나 위팔, 아래팔, 발, 장딴지, 허벅지 등이 휙휙 날아다니는 생생한 장면이 곳곳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신의 목소리였다고 제인스는 주장합니다. 여기서 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거나, 영웅들에게 공포와 경외심을 심어주지 않습니다. 단지 그들을 안내하고 충고하며 지시할 뿐이지요. 또한 신들은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실 인간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신과 영웅과의 관계는 프로이트가 자아나 초자아의 관계로 나타내려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영웅들에게 신은 경탄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갑자기 머릿속에 그 해결책이 솟아날 때가 있는 것처럼 그 순간 신이 지나갔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제인스는 이 신들이 우리가 지금 환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환각은 대개 이들이 말 걸고 있는 특정의 영웅들에게만 보이거나 들리게 되지요. 영웅들은 자신들이 행할 바를 알지 못했기에 이 환각적 목소리에 복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인스는 일리아스에서 나타나는 정신구조를 우리의 주관적, 의식적 정신과 구별하여 양원적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양원적(bicameral)’이라는 말은 국회의 양원제를 연상하게 합니다. 이는 의식이 이중구조로 되어있다는 것일까요? 일라아스의 영웅들은 말하는 부분과 듣는 부분이 나눠져 있다고 생각되니 말입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나눠져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 전제하며 동시에 작용하는 흐름을 만들어낸다는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왠지 불교에서 말하는 상호의존성과 관계될 것이라는 섣부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일이아스 영웅들이 이러한 원리를 갖춘 이유는 그들의 시대적 조건이 신정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에 기인합니다. 양원적 정신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은 명령하는 권위적 망자들이었습니다.
우왓... 촘촘한 후기에 빠져들어, 지난 주에 배운 것들을 쭈욱 스캔하게 되었네요!
아마도 다시 텍스트를 뒤적이며 일주일을 보내셨을 후기에서 많은 도움을 얻고갑니다~
저도 다시 읽으며 잘 풀리지 않던 부분을 풀 실마리를 얻어 갑니다. 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