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2학기 세 번째 시간(5.17) 공지드립니다.
1) <물질 세계> 제2장 ‘소지인 대상의 세계’(148~189쪽)를 읽고, 질문과 이야깃거리를 숙제방에 댓글로 남겨주세요
2)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그래도 <물질의 물리학> 3장과 4장을 찬찬히 읽어갑니다.
3) 간식은 정은이 선생님과 정혜윤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이미영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과학의 입지 : 과학이 진리의 시금석일 수 있을까?
“특정 상황과 관계없이 그저 인식되지 않는다고 하여 비존재 한다고 말한다면 타당하지 않다. (...) 마찬가지로 전·후생과 같은 것은 과학의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그것이 없음을 증명했다고 하는 것은 과학의 입지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104쪽)
이번 주에는 <물질 세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서문인 ‘편집위원의 설명’과 ‘툽땐진빠의 서문’을 함께 낭송했습니다. 앞선 ‘달라이 라마의 서문’과 내용이 겹치기도 해서 읽기에 좀 편했다는 말씀들이 있었는데요. 저는 무엇보다 툽땐진빠가 과학이라는 분야를 철학이나 종교(불교)와 비교해서 설명해주는 부분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의 방법, 전제, 영향 등 철학 및 종교와 비교하며 읽을수록 우리가 아무런 저항감 없이 팩트로 받아들이곤 하는 ‘과학의 입지’를 생각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학Science는 ‘지각’ 혹은 ‘지각한 것’을 뜻하는 라틴어 scientia에서 왔습니다. 그렇기에 과학의 탐구는 대상에 대한 지각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분석적인 해설을 하고 그것을 토대로 다른 요소들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현대과학은 여기에 엄격한 실험과 타당성 검증의 과정을 추가했습니다. 반복가능성을 선보여 보편성을 보장할 장치를 마련한 것이죠. 철학 역시 세계의 실상을 탐구해서 진리를 찾는데 주목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의 탐구 방법은 대체로 실제의 경험이 아니라 논리로써 타인의 주장을 부정하고, 자신의 주장을 세우고, 반론을 논파하는 등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주장에 모순이 없게 하는 것”(78쪽)이기에 그 철학과 관련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물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툽땐진빠는 중요한 두 질문을 던집니다. 1. 현대 과학의 방법론에 따라 과학적으로 입증된 이론이면 반드시 진리인 것인가? 2. 진리이면 반드시 현대 과학으로 입증할 수 있어야 하는가? 결론은 ‘NO’에 가깝습니다.
첫 질문의 답이 ‘아니오’인 이유는 과학 이론 자체가 역사적이기 때문이고, 과학이 진리를 정립하는 방법이 자체의 틀에만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과학적으로 입증된 결론들도 시대적 조건이 달라지고 관찰된 값들이 달라지면 오류로 판단되기도 합니다. 이론의 이러한 변화가능성과 역동성은 과학 자체가 이미 인정하고 있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학의 결론들은 잘 작동할 때조차도 임시적이고 잠정적입니다. 또한 그런 임시적 팩트조차 가설이나 실험 같이 ‘현실’이 아닌 환경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즉 과학 이론은 “자체의 분석 범위에서 진리를 밝히는 것일 뿐 언제,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진리인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82쪽)라는 것이죠. 과학 지식은 역사적일 뿐 아니라 내수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 ‘진리라면 과학에 의해 밝혀질 수 있어야만 하는가’가 ‘아니오’로 대답되는 이유는 과학이 제 영역으로 삼고 있는 자리가 ‘관찰되는 세계’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지각되고 경험되는 세계를 불교에서는 ‘세간’이라고 하고 거기서의 진실을 ‘세속제’라고 합니다. 세속제에서는 1+1=2이고, 어떤 사물은 동시에 두 자리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거나 환생하는 경우도 없죠. 과학의 울타리는 귀신도, 전생도, 명리나 풍수도, 선정이나 영적 도야도, 심지어는 우리 마음의 미세하고 모순적인 스펙트럼도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꽤나 비좁습니다. 따라서 “현대과학의 분석은 오직 세속제의 단계를 분석하고 설명한 것”(103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과학의 바운더리는 “말과 분별심이 대상을 표현하고 인식하는 것”(103쪽)에 국한됩니다. 우리 보통 인간의 인식체계 안에서 다룰 수 있는 것들, 달라이 라마가 ‘영적 관점’이 배제된 ‘일반적 관점’이라고 말했던 것만을 과학이라고 정한 것이죠. 이것이 과학의 입지입니다.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 발달했지만 과학은 여전히 마음의 풍경의 대부분을 없는 셈 취급합니다. 그 비좁은 손전등에 비춰지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부당한 말입니다.
소용돌이 원자의 안정성 : 어떻게 영원성에 운동성을 담을 것인가?
“네온 기체는 온도가 올라가면 붉은색으로 발광한다. 네온 기체는 네온 원자의 집단이니까, 네온 기체가 빛을 낸다는 것은 곧 네온 원자가 빛을 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데모크리토스식의 아주 딱딱한 당구공 같은 원자가 어떻게 빛을 내리 수 있을까? 톰슨은 원자가 당구공 대신 소용돌이 고리 같은 모양이라고 가정하면 이런 발광 현상도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물질의 물리학>, 66쪽)
<물질의 물리학> 세미나에서는 1장 ‘최초의 물질 이론’과 2장 ‘꼬인 원자’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내용에 대한 꼼꼼한 발제는 윤지샘과 자영샘께서 정리해주셨습니다. 공식을 쓰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이 된 과학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물질, 차원, 양자 등의 ‘전문용어’에 턱턱 막혔습니다. 과학에서 물질은 무엇인지, 그것을 3차원적 연장(높이, 너비, 길이)를 갖는 덩어리라고 해야 할지, 2차원이나 1차원도 물질일 수 있는지, 물질은 고체인지 액체인지, 단단한지 물렁한지, 물질이 아닌 공간은 어떤 것인지, 완벽한 배경인지 등 생각보다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사실 지금도 잘 풀리지가 않는데, 읽어가다 보면 조금 실마리가 잡힐까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독특했던 점은, 이 책이 소개하고자 하는 ‘위상 물리학’이 기존의 물질 이론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물질의 기본 요소를 설명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질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다양하게 변화하는 현상들 중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철학이 시작된 이후부터 제기되기 시작해서 현대 과학까지 이어져온 질문입니다. 엠페도클레스에 이르러 ‘네 원소들의 결합과 분해’라는 메커니즘이 등장했고, 데모크리토스는 여기서 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인(결합의 힘인 사랑, 해체의 힘인 미움, 기본 요소의 질적 속성)을 덜어내고 원자론을 주창했습니다. 만물은 동질적인 원자들의 기계적인 결합과 해체로 이뤄진다는 것이죠. 그러면 모양, 느낌, 색깔, 소리, 맛 등의 다양한 질적 특성은 어떻게 생겨나느냐구요? 데모크리토스는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원자들의 형태의 종류가 무한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무한성’은 훗날 에피쿠로스에 의해 교정되긴 하지만 고대원자론의 허점이 됩니다. 플라톤은 섬세한 기하학 지식을 동원해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와 데모크리토스의 동질적 원자를 융합하고 극복합니다. <티마이오스>에서 그는 4원소에 해당하는 네 개의 정다면체에 세계 자체에 해당하는 정다면체(정십이면체) 하나를 더해 물질세계를 설명하는데요. 다면체를 조립해내는 최종적 요소는 두 종류의 2차원 도형, 직각삼각형과 정삼각형입니다. 만물은 두 종류의 삼각형이 조립되어 만들어진 정다면체들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플라톤 역시 질적 다양성의 문제 앞에서 막히는데요, 그는 삼각형들의 크기, 정다면체의 크기가 원소들의 특질을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크기는 무한히 많아집니다. 즉 플라톤의 기본 요소는 종류는 두 개로 유한하나, 크기가 무한해질 수 있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그는 기본 도형의 이합집산을 주도하는 동력을 ‘신의 선한 의지’라고 설정했습니다.
요컨대 고대 철학 속 물질의 기본 요소들은, 굉장히 방식으로 자연을 기계적이거나 기하학적인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것들이 결합되어 질적인 다양성이 발현되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해내지 못했습니다. 데모크리토스는 모양의 무한성을 허용했고, 플라톤은 크기의 무한성을 허용한 동시에 외부의 결합력을 상정했죠. 이런 논리적 ‘구멍’들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그건 아마 기본 요소의 불변성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그 요소들을 아무런 운동성이 없는 비활성적 고체로 가정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부동 불변의 원소들은 안정성만은 확실하겠지만, 그것들이 우발적 운동을 일으키고, 다양한 결합과 해체의 양상을 만드는 일은 어려워집니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초월성(무한한 종류, 무한한 크기, 외부적 힘)을 요청하게 되지요.
하지만 만약 원자가 그 안정성 아래에 끊임없는 운동을 품고 있다면 어떨까요? 마치 소용돌이처럼 계속해서 순환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 기본 요소라면 어떨까요? 원자가 깨지기 전, 즉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기 전, 아주 기발한 원자 모형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이 천년도 넘게 이어져온 ‘원자=고체=부동불변’이라는 공식을 깨버립니다. 제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자기 운동성을 내재하고 있는 원자, 불변하지만 부동은 아닌 원자, 소용돌이 원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마치 담배 연기의 도넛 링처럼, 아니면 돌고래가 뿜어내는 공기 링처럼, 원자가 파괴되지 않는 소용돌이 고리라고 본 것이죠. 이는 소용돌이의 안정성(순환수:소용돌이의 어느 지점에서도 거리와 속력의 곱은 동일함)을 연구한 헬름홀츠의 아이디어로부터 윌리엄 톰슨과 그의 친구 테이트가 정리한 원자 모형입니다. 하나의 고리가 몇 번의 매듭을 통과하느냐에 따라 몇 가지 종류의 원자들이 설정됩니다. 이런 매듭형 원자 모형은 왜 원자들이 각기 다른 빛 스펙트럼으로 빛을 내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마치 현악기가 종류에 따라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것처럼 원자들도 그 매듭에 따라 서로 다른 빛을 냅니다. 이 원자 모형은 형태의 무한성도 크기의 무한성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원자들의 진동과 발광(우발성과 다양성까지?)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소용돌이 원자모형은 핵자(양성자와 중성자)와 전자의 발견으로 비록 폐기되었지만, 기본 입자가 어떻게 그 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에서는 전자나 쿼크 같은 기본 입자의 안정성을 처음부터 주어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자면 입자의 안정성 문제는 완전히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봉인된 셈이다.”(75쪽)
저는 이 ‘소용돌이 원자’라는 발상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그것은 ‘운동성을 포함한 영원성’이기에 어쩌면 루크레티우스를 통해 배웠던 ‘클리나멘을 내재한 원자’보다 훨씬 세련되고 흥미로운 개념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세한 것은 뒤에서 설명될 위상 물리학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알겠지만, 재미난 생각들이 일어났던 세미나였습니다.
아이고 민호샘. 토론 시간에도 믿고 기댈 언덕인데 이케 매번 내용 정리까지 해주니 얼마나 고맙게요. 재미난 생각들이 일어났다니 괜히 뿌듯하네요. 과학책 읽고 떠들기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궁금하네요.
소용돌이에 벌써 막혔는데 결석까지 했으니 앞날이 뿌옇지만 민호샘 정리 밑줄 그으며 따라 가야할듯요 ^^
토론할 때 자꾸 민호샘 쪽으로 방향을 틀게 되는 건 저만의 문제는 아니죠?ㅎ
여전히 아리송하지만 한번 더 우리의 질문들을 나열해주시고 나름의 답을 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자극이 되네요.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