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7./ 불교철학 2학기 3회차 수업 후기
-〈물질세계〉
과학적 사고가 나타나는 불교의 분야는 아비달마입니다. 작년 한 해 『아비달마구사론』을 끙끙되며 읽고, 아무말대잔치를 벌이기도 하고, 매 시간의 질의응답을 통해 하나의 개념이라도 몸에 붙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인지 『물질세계』에 나오는 낱말들이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처음 접하는 도반의 물음에 떠듬떠듬, 중언부언하며 헤맸습니다. 그래도 어찌하여 기억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각자 이해한 바를 전달해 주는 과정에서 부족한 바를 인식하고 다시 배우고 익히겠다는 마음을 낼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색(色. 물질일반. 대상)과 심(心, 意, 識)이 연결되어 있어 보는 마음과 대상이 다르지 않지만 불교는 심(心)을 더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세계는 우리의 마음에 의해 규정되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아비달마불교는 오히려 의식이 대상에 의해 규정된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색은 각각 그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과 작용을 갖고 있으며, 그 힘이 감관(오근)을 통해 나에게 비추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색법의 논의가 가장 먼저 펼쳐집니다. 색(色)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물질세계』에서는 ‘색으로 적합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손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손상이란 ‘완전히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곧 색이란 서로간의 접촉에 의해 변이 괴멸하는 성질을 가졌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물질의 최소단위인 극미(極微)는 색이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됩니다. 극미는 물질의 양적 구극으로써 점유성, 곧 부피를 가져야 하는데 부피가 있다면 그것은 다시 쪼갤 수 있으므로 더 이상 극미라고 할 수 없으며, 부피를 갖지 않는다고 하면 색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아비달마불교는 가설적 극미와 실제적 극미라는 이중구조를 취합니다. 지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적 극미를 통해 더 이상 부피를 갖지 않으며, 자상(自相)을 갖지 않는 가설적 극미를 설정한 것입니다. 지각의 대상이든 사유의 대상이든 실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의 고육지책이었지요. 관념적으로 추리된 가설적 극미는 손상이 안 되지만 이것의 집적인 실제적 극미는 손상됩니다. 유형적인 물질세계는 극미의 집적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극미는 기본입자(4대종, 지수화풍)와 이것의 복합물인 소조색(5근, 5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물질은 4대종과 소조색의 복합체로 존재합니다.
색의 종류에는 5근(안이비설신)과 5경(색성향미촉), 무표색이 있습니다. 무표색이 무엇이냐는 질의가 있었지요. 우선 표색이란 외부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능동적이고 주체적 의도를 가진 행위(業)를 통해 나타납니다. 행위는 5근과 5경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신체적 행위는 형태롤, 언어적 행위는 말소리를 본질로 합니다. 이러한 표색의 과보로 무표색을 낳는다고 하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주장입니다. 즉 행위로 드러난 순간 눈이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색이 생성되어 항상 잠재 상속하면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색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물질적 존재인 신체적 형태와 말소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비유하면 나무가 흔들릴 때 그 그림자도 흔들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무표색은 계(戒)를 받는 행위의 지속여부를 설명하기 위해 제기된 개념으로 주로 발심과 계율을 수지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법처색(法處色)에 대한 의문도 가졌지요. 법처란 세계존재를 분류할 때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심적작용 영역까지 포함하여 설명하는 12처 중 의근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의근은 물질적 대상이 아닌 내적인 어떤 것을 취하는 것으로 언어적 개념이나 과거, 미래의 대상, 무위법 등 마음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이 다 법처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법처색은 ‘오직 의식만의 대상이 되는 색’으로 유대(有對)와 무대(無對)로 나눠집니다. 여기서 대(對)란 장애라는 의미입니다. 유대란 어떤 부딪힘이 있어 걸림이 있다는 것으로 5근이 여기에 해당하고, 무대는 걸림이 없는 것, 즉 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처색은 무대에 해당합니다.
색법, 심법이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과 작용을 갖고서 유위의 세계를 만드는데 이것만으로는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는 초월적 존재인 자재신이나 자아와 같은 실체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전통에 기인합니다. 불상응행법은 마음에 분노가 일어났을 때 그 힘을 마음속에 획득되게 하는 힘, 번뇌에 휘둘리며 계속 범부중생으로 불리게 하는 힘 등 존재양태의 변화와 작용에 관계하는 에너지 차원을 말합니다.
-강의-
이번 학기에는 물질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요?’ 별 의심 없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물질에 대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이론이 있을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과학자가 설명하는 물질과 불경에서 말하는 물질을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 까요? 모든 질문에는 전제하는 것이 있습니다. 위의 질문은 본질, 실체, 정의, 자성을 가진 어떤 것이 있다고 상정하고 던진 것입니다. 즉 소여(所與),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있다는 겁니다. 세계를 실체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지요. 이런 관점은 주어진 것에 대해 아는 사람을 추종하게 만들고, 주어진 것을 받기만 해도 되니 능동적인 사고를 할 필요가 없게 되지요. 무엇이 주어져 있는가? 누가 그것을 주었을까? 이런 식으로 그 틀 자체를 의심하면서 출발해야 합니다.
현대 과학과 철학의 관점은 모든 것은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물질을 파악하고 있는가?’로 질문하게 합니다. 물질이란 개념을 누가 쓰는가? 과학자인가 철학자인가? 그 시대가 18세기인가, 20세기인가? 영국에서 벌어진 일인가, 미국에서의 일인가? 등을 통해 물질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게 되지요.
들뢰즈는 모든 개념은 ‘드라마화’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대본에서 말하려는 것은 플레이 하는 것에 따라 구현되는 것이지 대본 자체에 있지 않듯이 개념을 이해하는데 정해진 진리란 없으며, 진리는 우리가 사는 방식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개념이 구현되느냐는 그 개념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물질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구의 물질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누가 그 개념을 원하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현하는가? 즉 연기(緣起)의 장속에서 물질에 대한 개념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라고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에 대한 사례로 쌤은 주디스 버틀러와 브뤼노 라투르의 질문방식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는 클라이펜터 증후군, 호모, 트랜스젠더 등 기존의 성 개념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성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알려지자 질문을 새롭게 던집니다. ‘생식기를 통해 여성, 남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정말 본래적인 것일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자연스럽지 않다고 한다면 자연스러운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것을 무엇일까?’,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구성되었을까?’ 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결국 본래적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것은 이미 사회적이라는 것이며, 주어진 것 이전에 사회적배치가 먼저 존재한다는 것. 남성,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문화적 틀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물질이라고 규정하는 것조차 정치적인 함의를 갖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또한 물질의 기원을 찾다 아리스토탈레스 시대로 거슬러 나아가 matter(물질)란 단어가 ‘hyle’라는 단어와 연결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hyle는 보통 질료하고 번역됩니다. 아리스토탈레스는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몸을 만들어내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직 체를 갖지 못한 날것 자체’로 물질의 재료가 되는 것이라고 봤습니다. 만들어진 것을 통해 hyle를 유추한 것입니다. 질료인 hyle가 섞여서 물체가 만들어진다고 보았습니다. hyle가 체(體)를 만들려면 스키마(schema. 틀, 도식)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인식의 틀 속에서만 물질, 몸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료와 도식을 분리시킬 수 없지요. 몸과 그 몸을 규정하는 것 또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물질은 객관성을 띄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틀을 통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틀과의 작용을 통해 출현하는 것이죠. 여성, 남성 또한 어떤 문화적 틀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을 만드는 과정의 효과에 불과합니다.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는 물질이든 사물이든 불변적이고 몰역사적인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물 그 자체가 어떻게 인간과 더불어서 작동 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이상기후와 글로벌화로 야기된 이주의 일상화는 우리를 살던 땅을 박탈당하고 내몰리게 만들었습니다. 라투르는 이 때 우리와 대지와의 관계를 바꿔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연을 극복해야 한다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인간을 사회를 조직하는 주체로 비인간과 사물을 자연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지요. 라투르는 사회는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들과 사물도 함께 공진화하며 구성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사물들과 함께 어떻게 관계 맺으며 역사를 구성해 왔으며, 재난을 겪을 때 인간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함께 관계 맺어온 동물과 식물, 사물 등도 어떻게 겪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대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상호의존하며 대지 자체를 생산하고, 그 대지는 각자 경험하는 물질적 삶의 토대가 됩니다. 우리가 대지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 갈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 할 때 그 곳은 다르게 구성됩니다. 그 첫 방안이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가는 것이 되겠지요.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소에 대한 개념이 바뀌었습니다. 가축화된 소와 야생의 소 이외의 피폭소라는 것이 출현했지요. 피폭소는 먹을 수도, 같이 살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내몰렸습니다. 소의 입장에선 예전 같으면 이미 도축 되었을 텐데 피폭 후에 더 오래 살게 되었죠. 이런 사태를 겪으며 사람들은 소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사육사들은 방치된 소를 보면서 자신의 삶 또한 피폐해졌음을 느꼈습니다. 소와의 관계가 깨지자 자신의 삶 또한 파열되었다는 것을, ‘소’라 불리던 타자는 언제나 자신과의 관계맺음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와 샘. 지난 시간에 우리가 중구난방 떠들며 헤맸던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줘서 무쟈게 고마워요. 마지막 피폭된 소 이야기는 음. 마음에 남네요. 🙏
엇 분명 지난주 얘기할 땐 후기를 간결하게 대충? 올리신다 했는데 이리 촘촘하게 정리해 주시다니~~~물론 당근 감사하죠^^
물질세계 공부하면서 작년 기억을 소환할 기회가 생겨 내심 반갑더라구요.
물질을 어찌 정의해야 하는지 물질 말고 이 세계에는 다른 무엇이 있는지 여전히 아리송합니다~
우왕~ 샘, 완벽한 정리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또 읽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