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시간(5.31) 공지입니다.
1) <물질세계> 2장 ‘원인과 결과의 체계’에서 ‘소량의 기초 체계’의 5절(238~274쪽)까지 읽어옵니다.
2)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그래도 <물질의 물리학> 5장, 6장을 찬찬히 읽어갑니다.
3) 후기는 이윤지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최윤순 선생님, 김자영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세미나가 점점 알차지고 있습니다! 혹시 작년에 들어봤던 내용들이 등장해서 그런 걸까요? 배움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래서 알게 된 게 뭐냐고 물으면 어버버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우리 상식 속에 있는 ‘연장적 물질’에 가장 가까운 색법은 외색인 색성향미촉의 경(혹은 처)였습니다. 하지만 물질세계는 더 폭넓고 연장적 물체보다 더 미세한데요. 마치 물질(경)과 정신(식)의 중간단계처럼 보이는 내색인 근부터 시작해서, 지난 시간에 함께 고민했던 극미, 법처색, 무표색, 불상응행법 등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근(根), 능력이지만 취합물이고 물질이지만 비연장적인
근을 뭐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작년 <구사론> 공부를 할 때는 근을 일종의 신경(시신경, 청신경, 후각신경, 미각신경, 피부)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신경은 구체적인 경계를 갖고 있는 신경세포들로 되어 있죠. 그런데 근은 “빛처럼 투명하기 때문에 여러 조각으로 자르거나, 저울로 달 수 없는 투명한 내색을 본질로 성립”(<물질세계>, 190쪽)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경세포들이 주고받는 화학작용 같은 것이 근일까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 대응개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근이라는 개념의 독창성을 충분히 인정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정신(능동적인 주체)과 물질(수동적인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가게 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근은 사대(大種)를 원인으로 하지만, 즉 물질요소들로 합성으로 이뤄지지만, 투명합니다. 투명하다는 건 대상세계(경)가 비춰 들어온다는 것이죠. 거울이나 유리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식을 발생시킵니다. 기관자체는 외관상 멀쩡해도 근이 손상되면 식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근의 뛰어난 능력이지요. 이는 마치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이야기했던 뇌신경의 ‘운동기제’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기억이라는 정신활동은 멀쩡하더라도 운동기제에 문제가 생기면 인식과 표현에서의 문제들이 생겨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근은 분명 유대법입니다. 즉 일정정도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고 걸림이 있죠. 하지만 대상을 투명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비연장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연장성이 마치 안개처럼 희박한 밀도로 이뤄진 걸까요? 근의 본성은 생각할수록 재밌습니다.
저희가 길게 이야기했던 대목은 근의 두 상태(?)인 구의(具倚)와 상동(相同)입니다. “색을 보고 있을 때의 안근은 구의이며, 잠을 자거나 눈을 감았을 때의 안근은 상동이다. (...) 원하는 마음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사물을 볼 경우, 그때는 모두 구의이다. 어떤 때에는 상동이다. 잠을 자거나, 눈을 감았을 때의 경우이다. 어떤 때에는 일부 구의이다. 원하는 마음 없이 그냥 볼 경우 그때는 일부 구의이고, 일부 상동이다.”(191쪽) 확실히 ‘본다’라는 행위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영어에서의 see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는 의미이고 watch는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안근에서도 여러 방식의 보기가 이뤄지는데요. 여기서 질문은 잠을 자거나 눈을 감을 때, 즉 상동의 상태에서 안근은 안경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알고 있기로는 근과 경과 식이 ‘촉’ 해야만 시각이 이뤄지는데, 상동의 상태에는 경과 근이 촉을 하고 있는 걸까요? 최면이나 꿈처럼, 생생하게 시각적 영상이 보이는 경우는 저장된 의근의 혼합 및 재생인 것 같은데, 이때 안근은 기능은 잃은 것은 아니되 그냥 쉬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의 시각은 안근이 없다고 하는 백내장 환자의 시각과 어떻게 다를까요? 이런저런 궁금증이 듭니다.
법처색法處色, 느껴지지 않지만 그래도 색(물질)이야!
법처색은 참 신기한 개념입니다. 오로지 식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물질이라는 역설적인 색법인데요. 왜 색법으로 분류했는지가 의아합니다만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논서마다 인정 여부가 다 다른데,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는 다섯 가지나 나와 있습니다.
1) 극략색極略色은 가장 미세한 색으로, 의식으로만 파악가능한 극미, 가설적 극미입니다. 고대 원자 개념과도 같죠. 이것은 색법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개념이기에 색법입니다. 2) 극형색極迥色 또한 의식에만 현현하는데, 이는 투명한 영상입니다. 이 투명한 색이 있어야만 먼 곳의 물체를 보는 일, 즉 근경식이 접촉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매질 같기도 하고 허공 같기도 하지만 명백한 색이자 유위입니다. 3) 수소인색受所引色은 무표색인데, 율의와 불율의처럼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내적 의도’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계율에의 의도를 실체적 색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떤 목적에서였을까요? 무표색은 유부만의 전통이었고 이후의 학파는 받아들이지 않지만 중관의 귀류논증학파는 다시 무표색의 존재성을 인정합니다. 어떤 근거로 그런 걸까요? 4) 변개소기색遍計所起色은 삼매 시에 접하는 영상이지만 유색법을 대상으로 하기에 색입니다. 부정관수행 시 구체적인 형상을 분별심이 동반됩니다. 5)정자소생색定自在所生色 또한 삼매 시에 접하지만 대상적 분별심은 아니고 불이나 물로 세계를 꽉 채우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사대종, 원소이지만 성질을 포함한다
중국의 5행, 그리스의 4원소, 그리고 불교의 4대종. 어떤 문명에서나 세계를 이루는 근본 요소들을 떠올리는 방식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들을 단지 물질적 요소만이 아니라 특수한 기운 혹은 속성을 포함한 것도 마찬가지이고요. 하지만 이 근본요소들은 지금 우리가 아는 화학 원소들과 다르게 그 명칭이 일상용어들과 겹쳤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단일한 베릴륨이나 플루오르 등을 만지지 않습니다만, 그때는 일상 속에 흙이 있고 불이 있었죠. 그래서 세간의 표현으로서의 ‘지(땅)’과 요소로서의 ‘지’를 구분하기 위해 뒤에는 ‘계’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지와 지계를 구분했죠. 지(땅)에는 언제나 지계, 수계, 화계, 풍계가 다 들어 있고 그 중 지계의 힘이 두드러지죠.
불상응행, 색도 아니고 식도 아닌 법
심과 상응하지 않는 행온이기 때문에 불상응행이라고 합니다. 나름 이름은 단순하죠. 대체 그런 물질(법)이 어디에 있나, 이게 유위법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나름 있습니다. “그 예는 항아리의 생·주·멸 세 가지와 식, 년, 월, 일, 뿌드갈라, 습기, 사물, 무상, 항아리가 물을 담는 작용, 동서남북의 방향 등이다.”(224쪽) 논서마다 차이는 있지만, 물질의 범주에 생겨남, 유지됨, 소멸함 같은 변화상과 시간, 작용, 여운 혹은 기억(습기), 방향 등을 실체적 색으로 정립해 놓은 것은 무척 신기합니다.
극저온에서 나타난 초전도체
오후 세미나에서는 <물질의 물리학> 3장 ‘파울리 호텔’과 4장 ‘차가워야 양자답다’를 읽고 재미난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비정상제이만 효과와 전자의 스핀 개념, 마이스너 효과와 난부-골드스톤 입자, 그리고 물리학자들의 최첨단 성과를 해석할 다른 용어체계 등등. 하지만 공지가 너무 길어져 버려서 은이샘의 정성스런 후기로 토스하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 질문이 남는데요. 오너스의 냉장고처럼 절대영도(섭씨 -273도)에 가깝게 냉각시킬 때 물질들은 고체가 됩니다. 그럴 때 엔트로피도 영에 가까워지는 걸까요? 또 초전도체 혹은 초액체라는 물질은 광자(전자기장)과 상호작용 하지 않는(즉 저항이 없는) 상태입니다. 즉 건전지로 보내는 전류가 무한정 흐를 수 있게 되죠. 이런 상태를 수행이나 명상의 특수한 상태로 설명해볼 수 있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