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시간(6.7) 공지입니다.
1) <물질세계> 1장 ‘경론의 총설’(116~145쪽)을 읽어옵니다.
2) <물질의 물리학> 5장, 6장을 읽습니다. 발제는 정혜운 선생님과 최윤순 선생님이 맡아주셨습니다.
3) 후기는 최윤순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이미영 선생님, 이기웅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원인과 결과’, ‘하나와 여럿’, ‘개체와 보편’
분명 우리는 물질세계에 대해 배우고 있고, 소지(所知 : 앎의 대상)에 대해 공부하려고 하는데, 이번 시간에는 뜻밖의 개념들을 만났습니다. 원인과 결과, 하나와 여럿, 개체와 보편 등의 개념들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일종의 인식체계로서 느껴지고 인식되는 대상들 자체는 아니지만 그 대상 세계를 보다 명료하게 헤아리고 이해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가 됩니다.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나고 만져지는 대상들은 ‘처’處라고 불리며 모두 색色법입니다. 처를 비춰내는 수승한 작용 구조인 ‘근’根도 색법입니다. 처와 근의 만남에서 생겨나는 ‘식’識은 심心법입니다. 색도 심도 아닌 법을 불상응행법이라고 하죠(대표적으로는 생주멸, 시년월, 습기 작용, 방향 등). 색, 식, 불상응행은 모두 유위법有爲法입니다. 유위법은 “원인과 조건이 모이고 접촉해서 만들어”진 것(무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대상들인 유위법을 알기 위해 원인과 결과의 체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불교에서는 원인을 인因과 연緣으로 이야기합니다. 인은 어떤 법을 생성하는 주된 원인이고(근취인) 연은 그 법의 발생을 돕는 요인(구유연)입니다. 싹이라는 결과에 대해 씨앗은 인이고 흙이나 물이나 바람은 연이라고 할 수 있죠. <구사론>을 공부할 때에는 여섯 가지 인과 네 가지 연을 배웠지만, 지금 대상의 체계를 공부할 때는 불필요합니다. 저희가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팔천송반야경>에서 비파 소리의 형성이 인과 연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비파의 공명통에 의지하고, 가죽에 의지하고, 현에 의지하고, 경에 의지하고, 술대에 의지하고, 줄걸이에 의지하고, 연주자의 노력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비파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선남자여, 이처럼 불세존의 몸을 성취하는 것도 인에 달려 있고 연에 달려 있으며 수많은 가행으로 성취된 것이다. 하나의 인으로는 아니고, 하나의 연으로는 아니다.”(<물질세계>, 243쪽에서 재인용)
이 구절에서는 두 가지가 재미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비파소리라는 결과가 수많은 인과 연의 합이라는 점입니다. 당연해보일 수 있지만, 하나의 사건에서 ‘연주자’라는 주체가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일상 속의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얼마나 자주 거기서 나 혹은 남의 책임, 탓, 공을 찾으려고 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연의 사고는 주체주의와 그것이 낳는 공허한 자책, 자기애, 비난, 칭찬 등을 달리 볼 수 있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비파 소리의 여러 인연 중에 연주자가 있다는 사실도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비파의 성능과 같은 외부 조건들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체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적 업 개념과도 비슷한 것이죠. 연주자라는 원인이 여러 인연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도 우리가 무언가를 해볼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음을 상기하게 합니다.
두 번째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인연 조건이 ‘불세존의 몸을 성취’하는 사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작년 효암스님께서 우리가 인과법을 공부하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인 욕구 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인연이 결과를 빚어낸다면, 그 수많은 인과 중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결과를 얻게 됨을 말합니다. 즉 나의 안팎을 오가는 인과 연에서 어느 하나를 빼면 지금까지의 윤회를 바꿀 수 있는지, 무얼 더하면 부처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면밀히 헤아리기 위해 인과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연을 구족하는 시도이자 가까운 곳부터 하나하나 바꿔가는 구체적 시도로서의 인과법 공부. 구미가 당깁니다.
<물질세계>는 ‘소량所量의 기타 체계’에 까지 나아갑니다. 소량이란 헤아림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소지所知와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식의 활동과 관련이 됩니다. 즉 대상을 헤아리고 분별하는 우리의 인식 작용을 말합니다. 이는 나중에 인식론과 논리학 파트에서 더 자세히 다뤄지지만, 대상 세계를 파악하는 방식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 정리를 해준다고 합니다.
우선 저희는 ‘하나와 여럿’이라는 분류와 ‘개체와 보편’이라는 분류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요. 가장 큰 차이는 개체와 보편은 언제나 특정한 관계성(종류, 취합, 의미)을 설정하고 있는 반면, 하나와 여럿은 그러한 관계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하나와 여럿은 포함관계나 연상관계를 형성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별식에 떠오르는 방식에 있어서 각각이 있는지’ 혹은 ‘말로 표현할 때 별개가 있는지’의 여부만이 기준입니다. ‘기둥’을 떠올리고 말할 때 갑자기 항아리나 축구공이 떠오르지 않기에 기둥은 하나입니다. ‘기둥과 축구공’을 떠올리고 말하면 각각이 떠오르므로 그건 여럿이지요. 이렇게 이야기는 했지만 여전히 찜찜한 구석이 많습니다. 책은 “소지에는 ‘하나’와 ‘여럿’의 두 분류가 있다. 모든 소지는 이 둘에 포섭된다”(256쪽)고 말합니다. 어떻게 모든 소지가 이 분류에 포함될까요? 왜 하나와 여럿을 굳이 분류하는 걸까요? 저희는, 혹시 하나라는 개념은 식에 떠오르는 어떤 대상의 고유함(그것이 일시적이라 할지라도)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가 묻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건 말이죠. 책은 ‘하나와 여럿’이 “반체反體가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를 말하는 것”(256쪽)이라고 합니다. 반체란 “소리와 분별식으로 해당 법이 아닌 것(시역)을 배제함으로 정립된 특성”(265쪽)으로 오롯이 그 법만을 남긴 법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무엇이 아닌 그것’을 규정하는 것이 논리학에서는 어떤 중요성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와 여럿은 본질에 있어서, 질에 있어서, 반체에 있어서 세분된다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 1장을 읽고 나면 좀 더 명료해질까요?
툴루세(Chthulucene) : 인류세라는 긴급함에 응답할 새로운 이름
“수천 개의 모든 이름은 너무 크고 너무 작다. 모든 이야기가 너무 크고 너무 작다. 짐 클리퍼드가 가르쳐주었듯이, 우리는 복잡한 것들을 그러모을 만큼, 새롭고 낡은 것의 놀라운 연결에 대해 경계를 열어둘 만큼 충분히 큰 이야기들이 (그리고 이론들이) 필요하다.”(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문화과학> 97호, 167쪽)
강의에서는 ‘물질로의 전회’(material turn)를 말하는 ‘신유물론’에 대해 배웠습니다. ‘유물론’인 이유는 물질주의라기보다는 관념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관념은 분별체계를 만들고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과 신체를 놓치죠. ‘신’인 이유는 기존까지의 유물론이 놓친 것들에 포커스를 맞추겠다는 의미입니다. 역사유물론은 인간, 남성, 시스템 중심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죠. 신유물론은 새로운 철학 체계를 세우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들뢰즈나 하이데거의 철학이 나아갔던 담론들을 가지고 더 절실한 문제의식으로 물질세계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연구와 윤리를 닦는 분야입니다.
도나 해러웨이는 인류세라는 사태 속에서 우리 자신의 존재론을 완전히 바꾸고 우리의 세계관을 재정립하고자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포스트휴먼(인간 이후)이 아니라 컴포스트(퇴비)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존재를 '관계항 없는 관계'(relation without relate)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까요? 해러웨이는 생물학과 과학을 동원해 우리가 ‘내부-작용’(intra-action)중이라고 말합니다. 기존의 상호작용(inter-action)이란 말은 계속해서 분리가 선행되어 있는 뉘앙스를 주지만 내부-작용은 끊임없는 공생만이 먼저 있고, 주체나 객체 같은 항은 임시적으로 출현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양자역학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사유는 불교의 중관학파와 결이 맞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러웨이는 인류세라고 불리는 지금 시대의 특징이 “사람과 다른 생물들을 위한 피난처의 장소와 시간을 파괴하는 것에 있다”고 합니다. 더 이상 피난처를 만들 수 없는 상황은 다른 시대와의 불연속성을 남깁니다. 지금 현재, 피난처가 파괴된 지구에는 인간과 비인간 난민이 가득합니다. “나는 우리의 임무가 인류세를 가능한 한 짧고 얇게 만드는 것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피난처를 다시 채울 수 있는 다음의 세(世)를 서로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해러웨이의 방법 중 하나는 다른 이름을 고안해내는 것입니다. 파괴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으로 지속되는 공-지하적 힘에 대한 이름도 필요한 것이죠. 해러웨이는 그것을 ‘툴루세’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그 힘과 일부를 이루고 거기서 계속 사는 일에 실패해왔습니다. 피난처를 다시 만드는 작업은 “인간 이상의 것, 인간 아닌 것, 비인간적인 것, 부식토로서의 인간을 포함하는 무수한 내부작용적인 집합적 존재들과 무수한 시간성과 공간성을 얽어”(167쪽) 매는 일을 포함합니다. 필멸의 동물로서 잘 살고 잘 죽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재구성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애도도 포함된다. (...) 이미 많이 상실되었으며, 더 많이 상실될 것이다.” 저는 해러웨이의 이런 감각이 깊이 와 닿았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상실을 지나왔고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무시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좌절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현실입니다. 해러웨이는 이 지점에서 아직 남아 있는 것들과 무엇을 해나갈 것인가를 묻자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잘 죽는 것도 물론 포합됩니다.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비장한 인간 후손인 포스트휴먼이 아니라, 폐허에서, 퇴비더미에서 꿈틀거리는 퇴비주의자가 되기. 모두를 데려갈 수 있는 관념에 빠져 또 다시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이런 태도는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희망’의 감각과 공명하는 것 같습니다.
민호샘이 정리한 내용을 보다보니 새삼 우리가 물질이라는 개념 하나로 수천년이라는 시공을 크로스오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교의 연기, 해러웨이 intra-action 등등 개념을 모르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마구마구 가져다 쓰지 못하는 게 문제인 것 같네요. 부지런히 가져다 써봐야 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