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이번 학기 ‘물질(matter)’에 대해 고대 불교와 최신 과학의 이야기를 번갈아 읽고 토론하며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도통 뭔 소린지 몰라 포기하려는 마음이 올라오다가도 수요일 아침 연구실에 와서 도반들이 준비해 준 맛난 간식을 먹고 (넘 많이 먹는다고 쿠사리를 듣기도 하면서요.. ㅋㅋ) 그 간식으로 힘을 내서 낭송을 하고 함께 토론을 하다보면 뭔가 잡히는 듯 하기도 합니다. 물론 알쏭달쏭한 부분이 훨씬 더 많죠.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런 공부들이 계속 뭔가 생각 거리를 준단 말입니다. 타고나길 게으르며 둔하고, 초딩때부터 성당을 다녔고, 중딩 이후 물포자(물리포기자)였던 제가 중년이 되어 불교와 물질 세계를 탐구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죠.
과학과 불교를 공부한 도반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여전히 저희들끼리 텍스트 안의 개념과 의미에 갇혀 끙끙대고 있으면, 채운샘께서 격주로 짜잔 등장하셔서 저희가 전혀 생각 못하는 지점들을 다른 철학 언어들을 가져와 강의해 주십니다. 이번 시간에는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re-worlding (세계를 다시 구성하기) 이라는 다소 낯선 용어를 제시하는 해러웨이의 글을 공유해 주셨습니다. 불교와 물리학 사이를 헤매다가 채운샘께서 풀어내주시는 새로운 이야기엔 귀를 쫑긋 세우게 되죠. ^^ 2500년 전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대의 문제적 상황에서 어떤 언어들로 다르게 외쳐지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re-wording (언어를 다시 구성하기) 할 수 있을지, 사유가 둔근한 저도 쪼금은 생각해 보게 됩니다요.
민호 반장님께서 토론과 수업에서 다룬 내용은 앞서 성실하게 공지로 올려주셨으니, 저는 토론과 수업을 통해 배우고 생각하게 된 점을 몇 자 적어 보겠습니다.
인과, 물질 세계의 대원칙
이것이 존재하면 저것이 생기고 / 이것이 변하면 저것도 변하니 / 이것을 저것의 원인이라고 한다. (물질세계 238쪽, <양평석> 재인용)
원인과 결과는 너무 당연한 거여서 큰 어려움이 없이 이해했다고 여깁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아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를 불교에선 꽤 자세하게 다룹니다. 원인의 종류를 세밀하게 나누고 인(因)과 緣(연)도 분명하게 구분 짓습니다. 결과를 생성하는 주된 원인이자 결과의 ‘본질’에 영향을 주는 것을 ‘근취인’이라고 하고, 결과의 발생을 돕고 결과의 특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구유연’이라고 합니다. 볍씨는 벼를, 보리씨는 보리라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볍씨와 보리씨는 벼와 보리 각각의 근취인입니다. 근취인은 공통적일 수가 없죠. 반면 흙이나 공기, 물은 벼와 보리를 싹틔우고 자라게 하는 구유연이 됩니다. 구유연은 벼나 보리에 공통으로 작용하지만, 흙, 물, 공기의 각 특성에 따라 다른 종류의 작물이 나오기 때문에 구유연은 결과의 ‘특성’에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근취인과 구유연인 결과를 생성하는 방식의 측면에서 원인을 나눈 것이라면 결과를 직접적으로 생성하는 경우 직접인, 간접적으로 생성하는 경우 간접인이렇게 나누기도 합니다. 쉽죠! 그러나 마음(識)이 생기는 방식에 따라 인연, 소연연, 증상연, 등무간연 등으로 나누는 단계에 가면 인식의 체계와 맞물려 조금 난이도가 생깁니다. 이 부분은 이번에 공부했던 부분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작년 구사론에서 배웠던 걸 떠올려보면 인과에 관해 불교는 상당히 정교한 분석을 가지고 있어요.
암튼 ‘원인과 결과의 체계’가 불교-물질 세계의 텍스트에서도 꽤 앞 부분에 등장한단 말입니다. 그건 왜일까요? 우리가 물질을 무엇으로 정의하든,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과 존재, 모든 ‘물질’은 바로 원인-결과의 법칙 아래 움직이기 때문이죠. 세상 모든 것은 이 인과의 법칙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존재하면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변화하면 저것도 변합니다. 볍씨를 심으면 벼가 자라나고 보리씨를 심으면 보리싹이 틉니다. 기름진 토양과 신선한 물이 있으면 튼실한 싹이 나고, 그렇지 않으면 시들한 싹이 자라고요. 똑같은 두 개의 컵에 똑같은 물을 담고 한쪽 컵에는 좋은 말을 들려주고 다른 한 컵에는 거친 욕을 들려주면 얼마 후 물의 입자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하죠. 주위의 모든 것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인과의 관계 속에 있습니다.
이게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대충 흘려듣곤 하는데, 사실 불교 가르침의 근간이 여기에 있단 말입니다! 인과의 논리를 주의깊게 생각해보면 그건 매우 냉정한 법칙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시간 차가 있을 수는 있지만 (경전에 따르면 때로는 억겁의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요.) 뿌려진 원인에 대한 결과가 언젠가는 나타난다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보리씨를 뿌려놓고 벼를 수확하기를 바란다든가, 좋은 흙과 물을 제공하지 않고 튼실한 열매를 원한다는 데 있죠. 우리는 끊임없이 어떤 원인들에 가담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매순간 어떤 결과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영향을 주고 받기가 계속됩니다.
내가 하루종일 하는 행위들과 마음 속에 일으키는 생각들과 내뱉는 말들을 잘 째려보면 그것이 어떤 인과를 일으킬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까? 이런 맥락 속에서 불교가 인과의 원리를 탐구하는 이유에는 ‘붓다-되기’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붓다란 인간이 갖출 수 있는 최상의 지혜와 보리심으로 조건에 흔들리지 않는 행복과 평화를 누리는 존재죠. 근본적으로 저희는 모두 매 순간 행복을 누리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누구나 똑같고, 이것은 ‘붓다-되기’에 닿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 상태에 가까이 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 찌질한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 그건 우리가 어떤 원인을 만들어가고 있느냐에 달려있으니 말입니다.
여담인데, 작년에 제가 눈이 나빠져 고생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날 제가 책을 옆에 두고 뭘 쓴다고 몇 시간 째 컴퓨터 화면을 눈이 빠져라 쳐다보고 있었거든요. 지나가던 스님께서 저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눈이 아프다고 호소하면서, 눈이 나빠지는 원인만 쌓고 계시는군요!” 그때 그 말씀이 좀 신선하게 들렸어요. 저는 눈을 혹사시키며 저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도 눈은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란 거 아닙니까. 너무 당연한 얘긴데, 왜 원인-결과의 단순한 논리를 그런 식으로 간과하며 사는데 익숙한 걸까요?
유위(有爲)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원인-결과의 체계를 살아있는 존재들에게 적용할 때 ‘업(業)’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짓는 행위와 마음 씀씀이, 그리고 한 마디의 말 조차도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는 거죠. 내 행동과 말과 생각이 매 순간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지 이것만 눈치채고 있어도 이토록 습관적이고 무감각하게 어리석음을 저지르며 살지는 않을텐데 말입니다.
인류 탐진치의 거대한 흔적 -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 망설임세
이 흔적이 공통적으로 거대한 힘의 결과를 발생시킬 때 그걸 도나 해러웨이는 '-세(世, epoch)'라고 명명하는 것 같습니다. 헤러웨이는 인류의 어마무시한 생태 파괴를 ‘규모와 속도, 동시성과 복잡성의 면에서... 인류라는 종이 지구에 일으킨 거만한 소동’이라고 표현하더군요. 지구 행성에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들 중 하나일 뿐인 일개 인간 종이 저지른 일이니 오만방자한 ‘소동’이라고 칭할만 하죠. 문제는 그것이 100년도 안되는 시간안에 일어나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야기해 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여 이 시대를 수만~수십만년의 기간 동안 변화를 이뤄왔던 과거의 ‘-세’들과 동일하게 언급함으로써 당장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죠. 인류세의 문제들을 공감한다면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이라는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가 오직 인간 중심의 편의를 위해 욕심을 부리며 쌓고 쌓아온 업의 결과가 도래하고 있다는 게 여기저기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요?
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죠. 지금까지 서양 철학은 인식 주체로부터 이 세상을 판단해 왔다고요. 하여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건 주체인 인간이며 인간은 이 세계에서 왕과도 같은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말입니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한다 건 이 세계를 인간을 위한 종속적 위치에 두는 게 아닐까요? 지구에 사는 생명들과 공생을 하는 게 아니라, 인간 이외의 것 모두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인간을 위해 이용 가능한 대상으로 본다면, 꼭대기는 계속 비대해지면서 그 구조 자체가 붕괴 되어버리는 때가 오겠죠.
불교는 모든 생명의 평등함을 얘기합니다. 어떤 생명이든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행복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생명의 행복도 존중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다른 생명도 똑같다고 말이죠. 원인-결과처럼 이것도 참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저는 이게 너무나도 중요한, 공감의 근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불교가 말하는 모든 존재의 평등함은 헤러웨이의 표현으로 우리는 모두 ‘친족’이라는 것과도 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샘께선 철학자 데리다가 자신을 바라보던 고양이의 시선으로부터 고양이에 대한 공감을 면밀하게 사유해 나간 얘기를 해주셨어요. 데리다는 이 경험으로부터, 철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성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저는 데리다가 이른 성찰을 수희찬탄합니다! ^^ 샘께선 우리가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면서 윤리를 얘기할 수 없다고 하셨죠. 인간이 자기 자신 만이 아닌 다른 생명들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사실 -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게 기쁨과 슬픔을 느낀다는 것-에 깊이 공감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다른 지평에 서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우리는 뒤늦게야(epi) 알고 후회하는 에피메테우스 같은 존재인가 봅니다.
데리다가 고양이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까지 갔다면, 헤러웨이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건 고양이에게 공감해버린 우리를, 고양이가 자신들의 세계로 초대한다는 거예요. 비슷한 이야기를 다이앤 포시라는 인류학자의 이야기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동물들의 세계에 초대받았을 때, 할 수만 있다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싶을 정도로 기쁨에 겨웠다고 합니다. 공감을 주고 받으면 문이 활짝 열리나 봅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지구종이 함께 세계를 다시 구성 (re-worlding) 해낼 수 있는 문이 말이예요. 세계의 모든 존재들과 가슴 깊이 공감하는 존재를 불교에서 보살 (보디사트바) 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디사트바로 살기 위해 우리 가슴 속 공감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훈련으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뭔가 생각은 하지만 계속 망설이며 하던 대로 살고 있는 이 시대를 헤러웨이는 ‘망설임의 세’라고도 말했습니다. 망설이며 계속 쌓던 업과 원인을 쌓아가는 건, 공멸의 임계점이 저만치 멀리있고 이 정도쯤이야 상관 없다는 무관심, 무감각을 견고히 해나가가는 거겠죠. 그러나 우리는 모두 부식해가는 존재들입니다. 육신은 점점 소멸해 갈 것이 자명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존재들과 함께 공감하고 공생하는 가운데 기쁘게 퇴비가 되어갈 수 있을까요?
공감을 넘어 샘의 감성의 무대에 초대 받은 느낌이네요. 이게 바로 만난다는 거겠죠. 만남의 장만 있는 거죠~
전 요즘 다양한 영역의 텍스트들을 접하면서 정신이 좀 혼미합니다. 물질세계나 물리학이나 헤러웨이의 언어는 따라가기 쉽지 않더라구요.
다행히 같이 하는 강독이 큰 힘이 됩니다. 올 한 해 제일 맘에 드는 커리ㅋㅋ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