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수업이 있는 수요일은 다른 요일보다 분주하게 아침 시간을 보냅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나오려면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죠. 전날 늦게 잠들었다면 아침에 벌떡 일어나기 싫죠. 긴 시간 동안 경험으로 되도록 몸 상태를 최적화하려 하지만 과제가 많은 날이거나 전날 약속이 있거나 기분이 우울하거나 등등 아침에 벌떡 일어나기 어려운 날이 가끔 있습니다. 이런 날은 시간에 쫓겨 화장실을 길게 쓰는 아이를 타박하며 겨우 규문 갈 준비를 하고 나오곤 합니다. 이런 결과가 빤히 보이지만, 어리석음이 그치질 않네요. 이번 주는 미리 끝내지 못한 과제에 조급하게 몰입하다 보니 아침부터 고2 딸에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네요. 한편으로는 이런 어리석은 모습이 저의 공부를 지속하게 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실상 탐구 방식
이번 학기 1교시 <물질 세계> 강독 시간에 ‘제2장 소지인 대상의 체계’를 읽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2장을 먼저 읽다 보니 이 책의 전체 구조, 분위기(뉘앙스), 난해한 용어들이 읽는 우리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1장 경론의 총설’로 돌아갔습니다. 이런 유연한 커리큘럼이 좋습니다. 이 책의 제목이 <물질 세계>이고 불교에서 물질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이 책을 실제로 읽으면서는 ‘물질’에 다가가기 전 불교의 설명 방식과 불교에서 물질을 다루고 있는 방대한 자료에서 허우적대는 느낌이 있습니다. 총설 챕터에서는 불교에서는 어떤 방식들로 실상을 탐구했는가를 주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공부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작업이라면, 공부하는 현재의 나(우리)와도 긴밀한 챕터입니다.
불교 경전에서 물질은 어떻게 탐구되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불자들에게 어떻게 실상을 탐구하라 하셨을까요? 우리의 종교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와는 달리 “어떤 주제에 대해 세밀하게 분석하여 확신이 생기면 그제야 믿는 것이 이치에 맞으며, 전혀 분석을 거치지 않고 단지 스승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유만으로 확신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기”(121쪽)에 주로 ‘올바른 논리에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오류가 없는 논리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 오류 없는 논리도 최후에는 자신의 올바른 경험에 의거”(121쪽)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불교에서는 다음과 같은 4依에 의해 실상을 탐구합니다. “진의에 의지해야지, 문자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에 의지해야지, 의식에 의지하지 말라./ 법에 의지해야지,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경에 의지해야지,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123쪽) 여기에서 ‘진의, 지혜, 법, 요의경’에 의지하란 말씀과 ‘문자, 의식, 사람,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 중 우리는 주로 후자에 의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권위를 가진 책에 쓰인 문자에 의지하고, 자신의 기억(지식)을 믿으며, 스승에 맹종하고, 조건에 따른 지식(방편)에 의지하여 전체를 파악하지요. ‘물질 탐구’ 역시 그렇지요. 우리는 적당한 책을 찾아 그 책에서 판단한 진리를 자신의 맥락에서 파악되는 만큼의 지식으로 판단하고, 훌륭하다고 소문난 스승의 말로 확인하며, 자신이 현재 알게 된 지식에 의지하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그런데 전자의 요소들과 후자의 요소들의 구분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받아들이는가는 현재의 자신의 상태와 무관하지 않고, 그것을 판단하는 것 자체에서 이미 전자와 후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진의와 문자, 지혜와 의식, 법과 사람, 요의경과 불요의경 양자는 완전히 다른 요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현재 공부하는 방식은 틀렸고, 불교의 탐구 방식은 올바르기에 나의 공부에 적용하면 공부력에 놀라운 도약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 착각입니다. 불교에서 왜 수행에 힘을 주는가 또한 되새겨 봅니다.
그러하기에 이 책 역시 다양한 분석 방식의 탐구를 소개하지, 이것만이 진리이다라고 확정하지 않습니다. ‘삼소량’은 현량, 사세비량, 신허비량으로 진리를 헤아리는 세 가지 종류를 안내하고 있고, ‘사종도리’는 법이, 작용, 관대, 증성의 우리가 사물의 실상을 헤아릴 수 있는 네 가지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과연기의 법칙이 불교에서 중요한데, 사종도리 중 관대도리와 작용도리의 원리가 인과연기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상을 헤아리는 방식에서 불교 경전은 인간의 조건과 논리 그리고 논리를 학습하는 방식을 놓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실상을 인식하는 인식주체가 어떻게 실상을 헤아리는지를 빼놓고 실상을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총설을 읽어가며 작년에 <구사론>을 배울 때, 스님의 질문과 대답 방식이 이제야 이해된다는 데 우리의 의견이 모아졌죠. 이러한 측면에서 2교시 교재인 과학자가 물질을 탐구한 <물질의 물리학>을 읽으며 우리는 ‘물질이 무엇인가’라는 정의를 끌어내려 하기보다 한정훈이라는 물리학자의 시선에서 물질을 헤아리는 과정을 함께 해 보는 기회를 가지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빛에 대한 탐구와 인공 물질의 기원
빛이 입자(물질)인지 파동인지 입자이자 파동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요?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는 2차원 인공 물질(반도체)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아는 것 역시 위와 같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만이 이해하는 용어와 수식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전문가적 지식을 쉽게 설명하는 책들이 넘쳐나는 이유는 아마 그들 외에도 수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를 포함한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필요성을 느끼지도 않는데 물리학적 지식을 알고 싶어 할까요? 정도가 다를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신체나 정신 작용에 대해 궁금한 것은 공통적입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공부하다 보니 시험을 보는 게 아닌데 물질 탐구 역사와 원리에 대해 점점 호기심이 생겨나서 여기까지 왔나 봅니다.
물리학에 관심이 없어도 ‘아인슈타인’은 들어 봤겠지요? 그의 지능(뇌)이 궁금해 따로 보존하고 연구하는 기사들이 보일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역시 빛의 정체를 밝히는 중간쯤 위치한 물리학자였습니다. 빛의 정체를 밝히는 탐구는 뉴턴의 운동 법칙과 분광학에서 출발해 빛, 전자기파, 양자 역학까지 입자들의 운동과 함께 밝혀집니다. 그런데 저는 여전히 빛을 입자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빛이 입자냐 파동이냐는 우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가 빛을 이용하려는 욕망의 정도와 조건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경우 빛 에너지를 이용해서 보는 것 말고는 다르게 사용해 본 기억이 돋보기로 빛을 모아 까만 종이를 태우는 실험에서 ‘아하 빛을 모을 수도 있고, 열로 바꿔 종이를 태울 수도 있다’는 학습에서 잠깐 얕은 관심을 가졌었지요.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저와는 욕망과 조건이 달랐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빛의 정체를 탐구한 과학자들은 자기가 의식했던 아니던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호기심으로 자신의 연구를 지속했고, 세간에서 높게 평가받았고, 결국 노벨상도 탔습니다. 이 중 이 책을 읽기 전 제가 알았던 지식은 이들이 특별해서 노벨상을 탔다는 정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가 노벨상이었다면 이 상을 타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노벨상이 어떤 연구 성과가 나오면 바로 주는 게 아니라 기존의 지식에 대한 높은 발상의 전환을 기념하려고 수여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과학자의 노벨상 여부에 초점을 맞추는 관심은 빛이 파동인지 입자인지에 관한 관심보다 협소한 관점에서 비롯된 듯 합니다. 이 책을 읽고도 ‘빛이 무엇’이라고 알았다고 한마디로 정의하지 못합니다. 단지 나보다는 깊은 호기심으로 빛의 정체를 탐구한 학자들이 다음과 같이 ‘빛이 무엇’이라고 알게 된 과정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숫자, 즉 전자기파의 진행 속력은 신기하게도 그 당시 알려진 빛의 속력과 매우 비슷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맥스웰은 별다른 고민 없이 담담한 어조로 논문에서 ‘자성과 빛은 본질저그로 같은 현상이고, 빛은 전자기장이 요동해서 생긴 파동이다’라고 결론 내린다.(<물질의 물리학> 149쪽)
입자의 대표 속성 중 하나를 꼽으라면 하나, 둘, 이렇게 셀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예견과 그 뒤에 일어난 실험적 검증에 따르면 빛도 하나, 둘 셀 수 있다, 빛도 입자다. 따라서 빛도 물질이다.(<물질의 물리학> 162쪽)
아인슈타인은 (운동량)*(파장)=(플랑크 상수)라는 공식을 파동으로부터 입자의 속성을 유추하는 경로로 이해했다면, 드브로이는 거꾸로 입자성 속에 내재한 파동성을 유추하는 도구로 이해했다.(<물질의 물리학> 165쪽)
빛의 정체를 밝히는 과학적 탐구는 가치 중립적인 접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앞선 연구에 의지해서 자신이 믿는 가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작업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해야 더 어울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토론 중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과학이 종교처럼 작용하기에, 즉 과학은 가치 중립적인 게 아닌데 과학이 진리를 확인하는 기준이 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의 과학에 대한 태도를 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부처님의 말씀도 의심하는 자이지만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하면 믿는 저의 태도가 불현듯 떠 올랐습니다. 현실이 이렇다고 한다면, 과학에 의한 발전으로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는 단순한 인과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과학의 이런 면도 알았다면, 지금은 발전된 과학 지식이 세계와 인간 자체에 과연 유용하기만 할 것인가를 함께 따져 물어야 할 적기이지 않을까요?
빛의 정체에 대한 탐구는 현재의 양자 역학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양자역학적 원리는 다음과 같이 인류에게 새로운 물질의 탄생을 가져옵니다. 신소재에 바탕을 둔 하드웨어의 발전은 지금 핫한 챗-GTP를 포함한 AI 성능의 놀라운 도약을 이끕니다.
절연체 물질 2개를 접합시켰으니 합성된 물질 또한 절연체일 것 같다. 하지만, 이 접합체 위에 얇은 금속 조각을 덧씌우고, 그 금속 조각에 (아주 작은)전지를 연결하면 실리콘과 산화물의 접합면에서 기묘한 전자 상태의 변화가 일어난다. 두 절연체 사이의 경계면에 실리콘 반도체 층에서 건너 온 전자들이 쌓인다. 게다가 이 아주 얇은 경계면의 세계에 사는 전자는 자유롭게 움직이기도 한다. 이렇게 인간의 공학적 재주를 발휘하면 2차원적으로 움직이는 전자계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다.
전자가 두 샌드위치 조각, 즉 실리콘과 산화물 사이에 양자역학적 효과로 갇혀 있다는 의미에서 ‘양자 우물’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물질의 물리학> 194쪽)
이렇게 시작된 인공 물질의 발명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공상 영화에나 나오는 인공지능 기계들의 능력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게 체감되는 요즘입니다. 따라가지 못하는 기술의 도약과 내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자연에 들어가 유유자적하게 살거나 절에서 명상하면서 사는 게 가능할까요? 오지에서 살아도 휴대폰과 전기를 쓰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과학의 발전과 함께 우리의 조건이 바뀌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시대에 뒤떨어질까 전전긍긍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분리되지 않은 환경에 관심을 둔다는 의미에서 과학을 공부하는 것은 자신을 탐구하는 일 중 하나가 될 것 같습니다. 적정한 과학 기술의 사용을 고심하는 작업이 그것을 향유 하는 우리의 임무가 아닐까요?
이번 물리학 텍스트는 생소하고 어렵긴 하지만 반면 새로운 분야 탐색이라 재밌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가 새로운 지식에 넘 탐닉한 나머지 지식 쌓기에 넘 급급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샘 후기 보며 과학자들이 왜 이런 지식을 탐구했는지, 나에게 어떤 이로움이 있을지 따져 물으며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당~
불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매력적인 것은 믿음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합리적 의심'을 강조한다는 점이고, 그래서 과학과 잘 통하는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