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차(4.12) 수업 공지드립니다(이번엔 정확하게!)
- <현우경(상)> 제3권, 제4권(159~270쪽)을 읽고 질문과 이야깃거리를 숙제방에 댓글로 남겨주세요!
-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 11, 12, 13장을 읽고 옵니다. 발제는 이기웅 선생님과 저(민호)가 맡았습니다.
- 간식은 정혜윤 선생님과 김경아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 후기는 김자영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인욕은 타인을 위한 자비인가 나를 위한 수행인가?
<현우경>은 이번에도 재미난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물론 스토리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질문하고 머리를 맞대보는 세미나 덕에 더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세미나에서는 제2권에서 주로 등장하는 인연과 우연, 인욕의 능동성, 가난과 보시 등의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인욕 수행에서 타자의 위상의 문제였습니다.
흥미롭게도 부처님은 깨달음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도 않고 오히려 해를 끼쳤던 작자들(현생이든 전생이든)을 먼저 제도하십니다. 별다른 접촉도 없이 홀랑 깨달아버리는 이들이 의아해 아난다는 대체 어찌된 일이냐고 따져 묻죠. 다름이 아니라, 그들은 부처님을 해치면서 부처님의 인욕 수행을 도왔던 것이죠. “나는 그때에 인욕을 수행하면서 저들을 먼저 제도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호정샘께서는 이를 두고 ‘우연히’ 얻어걸린 것 아니냐고, 행위와 과보의 인연이 이렇다면 결국 결정론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셨다가, 인연은 우연이 아니라 엄청난 능동성의 산물이라는 깨달음을 적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묵묵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발 한발 걸을 수 있을 뿐이다.”라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결석하신 경아샘께서 남겨주신 질문은 호정샘의 이야기를 이어서 인욕 수행에서 힘의 방향이 논리적으로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인욕 수행은 보살의 필수 조건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해하려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물론 그 해악은 전생의 업과 인연의 산물이겠지만요. 그러니 해치는 자는 악업을 쌓으면서까지 나의 인욕수행을 돕는 자이며 보살의 길로 인도해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깨닫고자 하는 자는 훗날 그들을 먼저 돕겠다는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메커니즘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나의 깨달음입니다. ‘당신을 위해 자비의 마음으로 참아준다’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고, ‘미안하지만 나의 깨달음을 위해 당신의 악업을 재료로 쓰겠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는 것’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인욕수행이라는 이야기죠.
인욕수행에서 나와 타자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토론해볼만한 주제지만, 질문자 당사자가 안 계셔서 어려웠습니다. 윤지샘께서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시면서 인욕수행의 3단계를 설명해주셨어요. 1)분노_이 분노가 무상하구나. 2)자비_저 사람이 저럴 수밖에 없는 미망과 고통이 안타깝다. 3)공성_이 전체 상황 자체의 공함을 이해하기. 어떤 분리도 없는 세 번째 관점을 고려한다면 ‘나의 수행’이나 ‘너의 희생’ 등의 구분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분리이고서 인욕수행은 쉽지 않을 것도 같구요. 아직도 헷갈립니다. 인욕 수행에서 타자는 내 수행의 방편일까요, 이해와 자비의 대상일까요?
피로써 응답해야만 하는 ‘야차’는 누구인가?
‘피를 먹이고 십선을 권하다’라는 이야기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부처님의 법의 문이 열리자마자 깨달아버린 다섯 명에 대해 아난다는 의문을 제기하고, 부처님은 기이한 전생담을 들려줍니다. 부처님이 ‘자력’왕이던 시절 자비와 평등과 선행으로 나라가 안락하고 “굶주림과 병과 가난과 쇠약도 힘을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의 피와 기운을 먹고 살아가는 ‘돌림병 귀신들’, 즉 야차들은 먹을 것이 없어져 신명을 보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자 자력왕은 자신의 피를 주고 야차들은 배부르게 먹습니다. 그리고 왕의 은혜를 입어 한량없이 기뻐하지요. 대체 이 야차들은 뭘까요?
어쩌면 야차들은 법에 가장 목마른 자들, 깨닫고자 하는 열망이 큰 자들이 아닐까하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 그러면 왜 보통 사람들처럼 평범한 설법으로는 불충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부처님은 왜 이들에게 말이 아닌 피를 주어야만 했을까요? 이들은 일상 언어, 보편적 도덕, 공리적 규범, 인간적 행복의 틀 바깥에 있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귀신들, 비인간 존재들, 흔히 말하는 악인이나 병자들일 수 있지요. 사람의 피와 기운을 먹어야만 하는 존재. 어쩌면 이는 다른 종을 먹어야만 사는 육식종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사이코패스나 범죄자, 조현병 환자 등이 여기 떠오르기도 하구요. 확실한 것은 다수의 정의나 정상성이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는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라는 영화가 떠올랐는데요. 버스 테러 사건에서 얻은 트라우마 때문에 소년 나오키는 연쇄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이죠. 그 테러를 함께 겪은 버스 기사 마코토는 나오키의 범행 순간을 발각하고 자신을 찌르라고 말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다가갈 수 없는 심연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마코토의 안에서는 그 순간 무언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조금 결이 다르지만, 여기서 오직 피로써만 말을 건넬 수 있는 존재와 그 교화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코토가 마주한 충격은 야차들이 자력왕의 피를 마신 후 보여준 기쁨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전에는 기쁠 리가 없었던 폭력과 피였지만 이번에는 존재의 변형을 불러와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발심을 일으키는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야차들이 있는지,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응답하는지, 혹은 나 자신은 어떤 면에서 야차로 존재하고 있는지... 질문이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몽골, 위대한 불법의 대지
1학기의 네 번째 강의, 드디어 몽골입니다. 역사에 까막눈이어도 중국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몽골에 대해서는 잔혹하고 강렬한 그러나 어딘지 허술한 그런 이미지가 박혀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은 이들을 ‘우매하고 오래된’ 오랑캐 의미로 ‘몽고(蒙古)’로 부르지만, ‘용감하다’는 뜻의 ‘몽골’이 맞는 표현입니다. 실제로 몽골은 문자 그대로 ‘세계사’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하는 초거대 제국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정복하지만 근대적 의미의 식민이 아닌 순환과 융화로서의 병합의 이미지(이른바 느슨한 종주권)를 생각하게 하기도 했구요.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에서 슬쩍슬쩍 보았듯, 몽골은 티벳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영성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국가였습니다. 두 나라가 걸어온 길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죠. 자세한 내용은 은이샘께서 후기에 써주시겠지만(^^) 제게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두 나라 사이를 종교적 유대냐 정치적 견제냐로 환원되지 않는 관점을 사유하는 문제였습니다. 티베트의 사캬 판디타는 준강제로 몽골의 고단에게 초청됩니다. 그와 몽골인들에게 영적인 가르침을 주지요. 고단은 사캬 판디타를 당시 분열되어 있던 티베트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사캬 판디타는 편지를 보내 몽골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말하죠. 그렇게 몽골은 손쉽게 티베트의 지배권을 얻고 사캬 판디타와 그의 종파는 티벳 불교계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후 사캬와 함께 몽골에 갔던 팍파가 쿠빌라의 칸의 영적 스승이 되지요. 이런 관계 덕분에 티베트는 중국이나 다른 민족들과 달리 몽골에게 거의 파괴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몽골인들의 사이의 불심을 더 탄탄히 만듭니다. 몽골은 지금도 전체 인구의 반이 불교도이자 다람살라 유학생 1위를 차지하는 불교국가입니다. 이런 장대한 역사를 단지, 정치적 이해관계만으로 파악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일 것입니다. 팍파가 쿠빌라이에게 예를 표하고, 쿠빌라이가 팍파에게 배웠던 것처럼 몽골은 티베트를 지키고, 티베트는 몽골을 감화하며 둘은 얽혀 있습니다.
몽골 제국이 결국 명나라에게 밀려났고, 이후에는 공산화되었을 뿐 아니라 영토의 상당부분을 중국에 빼앗겼다는 ‘결과’가 불법의 실패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마치 티베트가 중국에 합병되고 달라이 라마가 피난을 온 것이 불법의 위축을 의미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국경과 군사력으로 요약되는 경제적이고 권력적인 관점을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영성’으로 모든 것을 환원하면, 달라이 라마가 말했듯 어리석은 운명을 맞을 수 있지만, 역사를 이해하는 보다 더 큰 관점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생명의 약동과 분기라는 관점, 첸리시 보살의 계획이라는 관점, 자연과 운명이라는 관점 등. 전체 속에서 개체적 문제들을 겪어나간다는 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민호샘 후기 읽으면 주의가 환기 된다고 할까
제가 미처 생각치 못한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네요
매주 후기공지 글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