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학기 마지막 시간이네요! 9주차(4.19)일 공지입니다.
- <현우경(상)> 5권과 6권(273~416쪽)까지 읽고 질문과 이야깃거리를 댓글로 남겨주세요~
- 강의가 있는 주입니다.
- 간식은 김자영 선생님, 최윤순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후기는 이미영 선생님께서 맡아주시겠습니다~
보시의 실험, 보시의 윤리
<현우경>에는 유독 보시의 가치에 대한 전생담이 무척 많이 나옵니다. 보시를 강조하고 장려하며, 여건 어려운 이들의 진심 어린 보시가 큰 공덕으로 이어지는 ‘해피 엔딩’이 대부분이죠. 그런데 이번에 읽은 에피소드 ‘자기 살을 보시한 여인’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부처님께 따끈따끈한 설법을 듣고 충만해져서 귀가하던 마하 우파시나는 병든 비구를 만나 그를 위해 다음날 보약 겸 고깃국을 보내주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왕이 엄명으로 살생을 금한 날이어서 어디에서도 고기를 구할 수가 없었고, 결국 여인은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보내줍니다. 그녀는 고통이 너무 심해 까무라쳐 쓰러졌고 병에 들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노발대발하여 불교도들이 사람 고기를 먹는다며 승가를 모욕하고 다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태를 들으시고 비구가 고기를 받아서 먹을 때는 항상 물어봐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사태가 좀 꼬였죠. 우파시나의 보시는 병든 비구는 회복시켰으나 자기 자신의 건강을 해쳤고, 남편과 갈등을 일으켰으며, 승가에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저희로서는 타당한 질문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값지지만 과격한, 그로 인해 자기 몸이 아프게 되고 주변인들을 근심하게 만드는 보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보시를 둘러싼 여러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우선 보시란 뭘까요?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교환, 증여, 헌금, 투자, 자선, 상호부조 등. 보시는 이런 행위들과 외관상 닮을 수도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자기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그리고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위해’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점은, 구법을 위함이 모든 중생의 행복과 양립하는가, 여기서 ‘모든 중생’은 과연 누구이며 그들의 행복이 평행하게 맞물려 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살을 보시 받은 비구의 행복, 살을 잘라 낸 우파시나의 행복, 우파시나의 남편의 행복, 그리고 지나가는 행인의 행복은 굉장히 엇갈리는 듯 보입니다.
또한 보시는 신(몸), 구(말), 의(뜻)으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움켜쥔 걸 놓는 행위, 불법승께 귀의한다는 말, 그리고 조금 어렵지만 마음가짐. 이것들은 모두 표업이자 무표업이기에 다음 순간에 중요한 작용력이 됩니다. 보시를 규정함에 있어서 물질의 양이나 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가난한 여인이 어렵게 구한 기름으로 보시 올린 촛불이 그 어떤 부자의 화려한 보시물보다 더 귀중하게 빛난다는 이야기를 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거나 아무에게나 보시해서는 안 되는데, 보시물, 보시자, 보시대상이 청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청정함이란 무엇인지가 궁금해집니다. 우리들(재가자이거나 비불교도)이 서로 도우면서 시간과 웃음을 나누는 사건들은 보시일까요 아닐까요?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보시에는 분명 지혜가 필요해 보입니다. ‘모든 중생’에는 보시 대상 뿐 아니라 시주 자신과 가족, 주변 인물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이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끙끙대다가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다가 보시하고자 하는 마음의 열의를 저버리는 것도 이상해 보입니다.
정답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함께 나누면서 하게 된 한 가지 생각은, 이런 에피소드들을 속단하지 않고 하나의 질문거리로 계속 열어두는 일이 중요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뉴얼이 아니지만 비현실적인 상징이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대체 그런 마음과 그런 결단은 어떻게 발생하며, 그것이 고귀하다면 나의 조건에서는 어떤 실천이 구성될 수 있는지 되물어보는 노력을 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갸우뚱하며 의견들을 말하고 나눠보는 시도도 그 노력의 일환일 것입니다. ‘보시’라는 말에 덧붙은 우리의 순수하고 무결한 표상, 여전한 결과주의와 보상심리, 강력해지는 자의식 등도 함께 바라보며 질문해갈 일인 듯 합니다.
달라이 라마를 보는 우리의 시선을 질문하기
“이제 티베트 역사의 중추, 달라이 라마만큼 정확히 알려줄 사람이 없는 그의 삶 이야기 속에 우리는 함께 섰다.”(325쪽)
1학기를 함께 보낸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를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마지막 세 챕터는 이 책의 대화자이자 공동 저자인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쵸의 생을 중심으로 티베트 현대사가 소개됩니다. 세미나 때 오갔던 이야기는 자영샘께서 잘 전해주실 것입니다!
읽는 내내 깊은 적막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몇 년 전 티벳 불교 세미나에서 만났던 <달라이 라마 자서전>과 영화 <쿤둔>의 장면들이 오버랩되기도 했구요. 네 살 반의 나이에 즉위한 뒤부터 지금까지, 툴쿠(환생자)로서의 운명, 내부의 부패와 외부의 침략, 다른 국가들의 배신과 목숨을 건 망명을 통과한 이 삶을 어떻게 놀라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그러면서 장난기와 맑은 웃음으로 여전히 자비를 가르치는 이 살아 있는 영적 스승 앞에서 우리는 깊은 감화를 받습니다.
하지만 놀람과 감동으로 충분할까요? 저는 괜시리, 달라이 라마의 삶과 티베트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해함에 있어서 어떻게 영웅화하거나 드라마화하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삶으로 질문을 돌릴 수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티베트 불교가 전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상황에는 어느 정도 그 드라마를 소비하려는 심리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피스 티벳’이라 외치는 목소리에는 동정과 연민, 자기 만족감, 정치적 올바름과 반중 감정이 뒤섞여 있진 않을까요. 우리 마음의 동기들은 복잡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우여곡절’과 ‘트렌드’가 전부였다면 이렇게 오래 유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컨텐츠가 이토록 쉼없이 회전하는 시대에 수십 년 간 세계인들에게 울림을 주었다는 사실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게다가 티베트 불교 티칭을 듣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중국인이라는 사실도요. 물론 중국 국적을 갖지만 정부와 다른 생각을 갖는 사람들도 무척 많겠지만요.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역사를 강렬하게 읽기란 뭘까요? 그 일환으로서 저희 세미나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뭘까? 14대 달라이 라마가 맞닥뜨린 현실은, 우리가 아는 정치적 유능함으로 타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13대 달라이 라마의 강경한 군사적 개혁을 이어갔다 해도, 중국 앞에서는 너무나 미약했을 것이며 오히려 더 강력한 응징에 문화 자체가 말살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힘의 차이가 명백한 난관 속에서, 언변 좋고 잇속 잘 차리는 외교 전문가라고 해서 다른 수가 있었을까요? 어떤 부분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처신은 순진하고 미흡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십대 초반까지도 그가 받은 교육은 오직 불법뿐이었습니다. 세계정세는 물론 티베트의 역사도 ‘영적인 관점’에 치우친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치 지도자이기 이전에 승려였습니다. 하지만 승려가, 가장 영적인 승려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승려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승려는 온 힘을 다해 생명을 살려야 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세계정세보다는 보살심과 수행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섭정기를 제외하면 평생을 지도자로 남습니다. 이 제도는 4,5년 주기로 뒤집히는 우리의 정치 시스템과 비교하면 비전의 연속성과 깊이 면에서 얼마나 다를까요? 툴쿠로 환생한 스승 달라이 라마는 선대들의 인연과 전 티베트인들의 마음의 염원을 느끼며 살아가는 수행자-지도자입니다. 이런 달라이 라마를 ‘개인’으로 볼 수 있을지, 그렇다고 ‘티베트’로 동일시 할 수 있을지, 그를 ‘완전무결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볼 수 있을지, 이런저런 질문이 듭니다.
최근에 이슈가 된 사건, 달라이 라마가 인도 소년에게 추행을 했다는 기사에 대한 반응들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달라이 라마를 어떻게 보고 싶어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 안의 표상들이 드러나는 것이죠. ‘어떻게 시대의 구루가 그럴 수 있느냐’는 비난자들이 한편에 있고, ‘그것은 관례적 인사법일 뿐이다’라고 맞서는 옹호자들이 한편에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은 꽤 날이 선 채 부딪혀 화해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무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달라이 라마가 실수했다고 하면 안 될까요? 달라이 라마가 이 시대의 젠더 감수성 혹은 역사적 조건에 예민하지 못했다고 말하면, 그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는 것일까요? 마찬가지로, 달라이 라마의 정세 판단이 근본적으로 옳았다고 하는 입장과 달라이 라마가 틀렸다고 꼬집는 입장도 이러한 완전무결의 표상을 공유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 본인이 거듭 말했듯이, 그는 너무 어렸고, 몰랐고, 어쩌면 잘못된 선택이었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에는 잘잘못이 선명하게 나누어질 수도 없고요.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더라도 현대 과학의 실증성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검토하고 버리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인물에게 계속해서 ‘완전성’의 틀을 들이대고 있는 것 아닐까요? 비전의 위대함이 모든 구체적 사안에 대한 올바름이자 정답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은 존경이라기보다는 숭배에 가깝습니다. 이제 우리는 ‘인도로의 망명은 옳았나’라는 식의 질문 앞에서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갖는 전제들과 의지를 의심하고 다시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라도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선택합니다. 몸을 가진 달라이 라마도 그렇고요. 위에 말한 과격해보이는 보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러한 선택들이 가진 강렬함과 진정성을 우리 자신으로 돌이켜 품고 배우는 일이 값지고 필요하지 않을까요?
민호샘의 마지막 말씀, 누군가의 어떤 선택이 주는 울림을 내 자신으로 돌이켜 품고 배우는 일이 필요하다는. 울림이 있네요
저도 마지막 말씀이 찡~하고 울림을 주네요. 때론 제가 나 자신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타인들에게 날카롭게 들이댄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정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