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인연으로 맺어진 우리의 보시와 출가
현우경은 붓다의 상수제자, 인연을 맺은 왕들, 제자들, 보시를 한 사람들, 가르침을 받은 모든 이들은 전생의 인연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붓다 자신도 오랜 전생에서의 수행과 깨달음의 인연이 더해져 스스로 꺠달은 자가 되었던 것임은 물론이다. 이번에 읽은 장에서는 붓다가 가르침을 받거나 도움을 받았던 인연이 소개되어서, 불교의 연기가 일직선상의, 일회성의 인과관계를 말하는 게 아님이 더 분명하게 느껴진다. .
우파사냐 이야기는 그런 전생의 인연중 하나다. 이 수많은 인연조건 가운데 현 생에서 어떻게 보시할까 모두 고민하며 토의했다. 그런데, 우리도 역시 수많은 전생과 수많은 인연조건에 연결되어 있다면, 그래서 ‘나’라고 할 수 있는 게 없고, 우리는 거미줄보다도 더 미시적 세계 속에서 끝없이 연결된 파동이라면, 우리는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업과 보시를 이미 주고받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과나 목적을 생각하지 말고, 마음가는대로 나의 일부를 조금씩 내놓는 업을 쌓는 것을 자연스럽게 하는 습관을 들이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현우경은 어떤 선업보다 출가를 더 권장한다고 이야기한다. 출가는 어쩌면 자신을 완전히 넘어서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붓다가 그랬듯이,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들, 모든 소유ᅟᅮᆯ들, 모든 관계를 내놓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미 나의 것, 나만의 인연, 나만의 소유물이란 없음이 분명하다면, 출가는 나의 일부인 인연조건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것 아닌가. 온 우주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일 아닌가.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작은 것을 내놓는 보시도 선뜻 못하고 있고, 출가는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본성을 거스르며 살고 있으니 스스로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이번주 현우경은 그런 나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것 같다.
두가지 관점에서 살펴본 14대 달라이라마의 삶
<달라이라마가 들려준 티베트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 부분은 티베트 현대사를 배경으로 했다, 우리는 티베트와 달라이라마의 비극을, ‘일반적인 관점’을 넘어선 ‘영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애쓰며 이야기 나눴다.
14대 달라이라마는 유아기에 툴쿠로서의 자신의 삶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모님 대신 승려들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당시 티베트는 13대 달라이라마의 예언대로, 강대국이 기승을 부리고, 내부 정치는 부패하여 나라를 뺏기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엄혹한 정치경제적 상황을 어린 달라이라마가 감당했다는 점이 가슴 아팠다. 그러나 영적인 관점으로 생각해 보자. 어떤 상황에서도 영적지도자로서의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궁에서 만난 청소부들을 통해 가족 삼각형 테두리를 넘어선 신뢰 관계를 쌓았고 티베트 현실을 생생하게 배우기도 했다. 어떤 엄중한 상황에서도 그의 가장 중요한 스케줄 영적 수행이었을 것이다. 티베트가 정치나 외교에 관심 없다고 하지만, 영적 무장은 정치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결핍된 역량일 수 있다. 자신의 전생인 13대 달라이라마의 유서를 따라쓰며 글씨를 배웠다. 자신의 전생을 떠올리며 명백한 진실을 배운 것이다. 내가 받았던 (도통 쓸모가 없었던) 학교교육, 소유욕과 애증 가득한 가족관계에 비해 그리 부족한 성장과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또한 국가 지도자의 성장과정에서, 영적 정신적 역량을 놓친 것은 근대 이후 국가 체제의 중대한 결핍 아닐까.
15세 때부터 중국의 침략이 가시화되고, 24세에는 마오주석과 만나 교활한 술수에 휘말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외교적 노력도 다 무산되었고, 티베트 민중들이 학살되는 가운데 망명길에 오른다. 나이 어린 약소국 지도자, 누가 봐도 명백한 패전국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어떤 위급한 순간에도 그는 명상시간을 유지했고, 신탁을 따라 망명의 순간에도 중심을 잡았다. 중국 공산당에 대해 어떤 분노나 비난도 하지 않으며, 문제의 원인으로 티베트 내부 문제를 우선 꼽는다. 그리고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그 장점을 인정하기도 한다. 순전히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다른 정치지도자와 다른 면이 보인다. 자국의 이익만을 우선시하는 서구사회에 어필할만하지 않은가. 망명 후 30년이 지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수상 연설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지금은 세계인의 영적 스승이 되었다.
윤지샘의 ‘좋은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좋은 정치인을 만나본 적이 없다. 우리에게 좋은 정치인의 표상이란 기껏해야 말 잘 하고 능수능란해 보이는 정도 아닌가. 마오를 상대하던 시기는 명백한 힘의 열세에서 패배는 불가피했다. 다른 정치지도자들에 비해 어리고 서툴러보이는 약속국 지도자이지만,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수십년 후 서구사회에서 티베트와 티베트 지도자의 이미지는 달라졌다. 티베트는 영토 싸움에선 패했지만, 영적관점에서는 아닐 수도 있다. 이번 학기에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경제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웠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우리는 티베트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생각했지 않나. 그런데 영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온갖 사회적 갈등속에 분열되어, 모든 연령별 자살율이 세계 1위인 우리가, 영적인 비전에서는 달라이라마를 중심으로 하나인 티베트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할지는 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 지 분명해 보인다는 말씀이 깊이 공감됩니다.
정치경제학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우위가 놓치고 있는 자기 배려의 삶의 양식...
지금 이 순간에도 왜 그토록 부가 넘치고 성공한 나라의 사람들이 티베트 불교를 찾는 걸까, 그것은 '영성'의 문제가 진정한 풍요를 이루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네요.
곰곰 생각거리가 많아지는 두 관점인 것 같습니다!
네. 그동안 제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정치경제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는게 느껴졌습니다. 기존의 생각을 흔들어놓는것. 좋은 책이란 그런거 아닐까 싶어요. 두 관점에 대해 같이 고민해 봐요
불교의 개념들을 통해 상식을 더 뚱뚱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고,상식을 깨는 방식이 어떤 것일지 이번 토론에서도 쟁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보시, 출가가 그저 좋다가 아니라 그 개념들을 통해 뭐 하나라도 다르게 볼 수 있을까를 더 고민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구난방 사방으로 펼쳐진 이야기를 자영샘의 고민 지점으로 연결해서 정리해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분명하진 않네요. ㅎㅎ. 이번에 읽고 토론한 부분에서는 달라이라마의 인간적인 고뇌에 많이 공감이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달라이라마의 환생자로 인정받고 티벳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길을 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담담히 술회하는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약소국의 지도자로서 감당해야 했던 비애 같은 것에 마음이 동하더라구요. 혜윤샘 말대로 달라이라마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달라이라마가 되어가는 과정으로 느껴졌어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그 모습이 인간적이면서도 숭고하다고 할까.
저도 구체적으로 뭘 배웠냐고 묻는다면 잘 이야기 못할것 같아요. 그런데 라이라이님이 말씀하신 '되어가는 과정'을 진솔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정치인, 자신의 역할을 과시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감당하는 숭고힘--이게 바로 이 책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일반적인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중시하는 정치인의 자질 같아요.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바를 잘 말씀해주신것 같아요. 덕분에 잘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