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첫 학기가 끝났습니다(내적 환호)!! 첫 학기는 부처임의 생애 및 불교의 역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죠. 저희는 오전에는 ‘불문학’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시와 이야기인 <불소행찬>과 <현우경>을 낭송했고, 오후에는 티베트의 불교-역사 인터뷰집인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를 읽고 세미나를 하거나 채운샘의 불교-세계사 강의를 들었습니다. 역사는 암기과목이라고 했더랬죠... 배운지 얼마나 됐다고 그저 몇 개의 이름과 지명이 뒤섞인 채 둥둥 떠다닐 뿐이지만, 그래도 인도, 몽골, 티베트, 중국의 불교 전통에 좀 친숙해졌다는 점, 다음 어디선가 만나면 거부감 없이 몰입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을 성과 아닌 성과로 남겨둬 볼 수 있겠네요.^^
보살심 : “삼계가 모두 괴로운데 그 누가 편안할 수 있겠소.”
<현우경(상)>을 낭송하는 마지막 시간, 호정샘께서 뽑아주신 구절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겠다는 소식을 듣고 샤리푸트라(사리불)은 먼저 몸을 버리고 열반에 들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만류하자 그는 저런 말을 했죠. 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중생이 모두 고통 속에 있는데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 문장은 여러 측면의 울림과 질문을 주는 것 같습니다.
첫째, 삼계 중생들의 고통을 어떻게 알고 이해할 수 있는가? 보통 우리는 주어진 경험 속에서 조잡한 비교를 통해 나의 행복과 불행만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보면(이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기도 하고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도 한데) 너무나 다른 처지에서 각자의 지옥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보입니다. 빈한 자리에도 부한 자리에도, 축생들에게도 천신들에게도 괴로움에 휘청이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것이 자업자득으로 보이듯 구조적 폭력으로 보이든 나름의 고통을 겪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샤리푸트라는, 그리고 부처님은 만물의 ‘고’라는 문제를 꿰뚫어 보고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는 무척 지성적인 통찰이지만 그 기반에는 자기 체험을 끝까지 밀고 가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노력과 통찰이 감수성의 틀 자체를 바꿔버린 것이죠. 반복되어서 나오는 멘트, “나는 이미 전생에 수도 없이 목숨을 버렸다”는 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자비심은 깊은 수준의 공감과 연결감이라는 심리적 체험이지만 언제나 단단한 지성적 분석을 동력으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두 번째, 세미나 중에 ‘삼계가 괴로운 이상 나도 편안할 수 없다’ 마음이야말로 보시의 고귀한 동기일 수 있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생의 보시가 내생의 복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노라면, 보시나 선업이 다음 순간의 보상을 누리게 해주는 일종의 보험이나 마일리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선업도 탐욕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샤리푸트라의 저 강렬한 보살심에는 자기 몫의 보상심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자꾸만 눈에 걸리고 있는데, 심지어 그들의 괴로움, 괴로움을 겪는 이들이 나에게도 괴로움으로 전해지는데 어떻게 혼자만 열반에 들어 떠나겠습니까. 저 괴로움들로부터 생겨난 내 괴로움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돕고 싶습니다. 그 도움이 이생에 받은 몸이든 깨우쳐 배운 법이든 간에,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동시에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기도 한) 가진 것을 내놓아 쓰이게 하고 싶다는 열의. 이것이 단단한 보시의 동기일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저희가 읽은 이야기마다 보시는 있는 자일수록 내놓기 쉬운 객관적 재물이 아니라, 자기 몸처럼 가장 주기 어려운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 보살의 존재란 어떤 것인가? 비록 부처님 시대에 보살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과거에 깨달음을 성취한 자(붓다)이지만 다시 태어나 중생을 구제하는 이들은 가히 보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삼계의 괴로움’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응답을 하는 존재가 아닐까요? 채운샘이 강의에서 얘기하셨듯, 보살은 신이 아닙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몸을 가진 존재이고 바로 그런 점에서 취약성의 한복판에 있는 존재입니다. 생노병사 뿐 아니라 민족적, 계급적, 젠더적, 생태적 인연 관계를 벗어날 수 없죠. 바로 그 자리에서 비폭력과 자비를 최선을 다해, 불가능할 것 방식으로 고민하고 실현해내려 하는 존재입니다. 달라이 라마라고 해서 정말로 누군가 ‘밉다’라는 느낌이 단 한 번도 안 들었을까, 하는 채운샘의 질문이 인상 깊었습니다. 몸(을 포함한 인연장)을 가지고 조건 속에 사는 존재인 한, 자신과 자기 민족을 지독하게 해하려는 사람을 원망하고 경계하는 마음이 올라오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자 하고,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지혜롭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함께 살고자 하는 뼈를 깎는 고민”, 이것이 보살의 유일한 특성입니다. 거기에는, 세상에서의 온갖 고를 자신의 문제로 느끼는 감수성, ‘거대한 공감’이 동반되고 있고요. 그 공감의 힘으로 가족도, 인종도, 국적도, 심지어는 종(인간, 축생, 아귀, 천신)도 넘쳐흘러 만물 중생과 공명하는 감수성을 펼칠 수 있게 됩니다.
신앙과 종교의 세 힘
어쩌면 보살에 대한 설명은 모순 형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을 가진 한 취약성(노병사와 탐진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데, 그 인연장 안에서 중생들 모두와 함께 깨닫기를, 함께 고통받으며 나아가기를 계속하는 존재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없애고 벗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고통을 이해하고 끌어안아 가면서 ‘함께’ 뭔가를 시작해보고자 하는 놀라운 방향성이 보살에게는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살이 이렇게 정의된다면, 여기서 기독교와의 연결지점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이반 일리치나 시몬 베이유 같은 크리스천들에게도, ‘무량한 존재의 고통’과 공명하는 ‘거대한 공감’ 같은 것이 보입니다. 일리치는 왜 말년에 목에 생긴 혹을 제거하지 않았을까, 간단한 수술로 없앨 수 있는 그 병에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떠올리며 감내하는 모습은 여러 생각을 일으킵니다.
채운샘께서는 ‘신앙’에 대한 근사한 정의를 소개해주셨는데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장자>의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말인데, 연나라의 한 청년이 한단에 가서 그들의 걸음걸이를 배워왔다는 이야기로, 흔히 남들 따라하다가 자신을 상실한다는 교훈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뒤집어 ‘타자의 걸음걸이를 배우기 위해 자기 걸음걸이를 버린다’는 적극성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요. 바로 여기에 신앙의 핵심적 실천성이 있습니다. 다른 존재들과 공존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자리를 떠나고자 함. 그러한 떠남의 체험은 죽음으로 상징됩니다. 물론 그 죽음은 이전의 인연장에서 주어진 틀을 떠나 보다 넓은 연결에 이르기, 되어본 적 없는 자신으로 태어나기, 즉 거듭남을 말합니다. 거듭남이야 말로 신앙의 모티프이지요.
그렇다면 이런 신앙으로 영위되는 종교란 어떤 힘을 가질까요? 채운샘은 정진홍의 <열림과닫힘>에 소개된 종교의 세 특징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첫째, 종교는 국가 안에 있을 때조차 언제나 국가의 외부에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의 폭력적 기원을 알고 있습니다. 국가는 언제나 지배와 피지배를 승인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으로서 등장합니다. 그 폭력은 대개 공권력의 이름으로 정의의 가면을 쓰면서 국가에 반하는 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합니다. 국가는 군대라는 합법적 폭력조직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국가는 어떻게 스러지는지 티베트의 역사에서 보았죠. 그런 점에서 “제대로 된 불자라면 국가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과연 종교는 국가의 도움 없이도 존속할 수 있을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는 불교는 과연 호국과 ‘양립’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모든 종교도의 고민일 것입니다. 샤카족의 분쟁에서 부처님은 그저 가운데 앉아 계셨을 뿐입니다. 여기서 종교의 한 가지 중요한 기능이 있다면, 국가와는 전혀 다른 판단기준과 언어를 가지고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국가도 자비나 용서, 비폭력의 비전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국가의 논리가 아니지요. 성장, 경쟁, 우위, 협상, 손익 등이 국가의 논리입니다. 그것을 규범과 도덕으로 만들어 체계적으로 교육하죠. 종교는 그렇게 주입되는 가치들에서 빗겨날 힘을 줍니다.
둘째, 종교는 죽음의 문제를 말합니다. 철학도 과학도 죽음을 언급할 수는 있지만 피상적인 수준 이상으로는 다루지 못합니다. 죽음은 실증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는 죽음 체험 자체를 담론으로 가져옵니다. 죽음이 사건 이후와 이전에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하고 윤리를 끌어내지요. 세 번째는 의례입니다. 개별적 깨달음이나 영적인 성취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신내림이나 한소식을 들은 영매적 신체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요. 하지만 그것이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영적 생활에 일정한 몸짓이 부여되어야 합니다. 즉 남다른 체험을 개인의 차원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그것을 나누고 전달할 코드가 마련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일정한 교리, 예배, 기도문, 노래, 생활양식, 섭생 등의 구체적 실천이 가다듬어집니다. 종교는 발흥과 동시에 제도화됩니다. 물론 의례 자체가 종교인 것은 아닙니다. 또한 제도권 종교를 고민하지 않는 우리(학인)들은 그것들을 그저 참고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생활, 종교적 인간성은 의례에 대한 존중 없이는 유지되지도 전승되지도 못합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볼 때, 우리는 종교에 대한 편견들에 걸리지 않고 배움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 학기가 마무리되었네요! 달콤한 방학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학기의 주제는, 불교 + ‘물질’입니다. 달라이 라마가 말한 역사를 보는 ‘두 번째 관점’(영적 관점)에서 헤맸던 기억은 잠시 내려놓고, 불교가 말하는 물질 세계는 과연 어떠한지 세세하게 탐구해 들어가 볼 수 있겠네요! 과연 작년 한해를 함께한 <구사론>의 효과는 얼마나 남아 있을지...?
2학기 첫 시간(5.3) 공지입니다.
1) 강독 텍스트인 <물질세계> ‘달라이 라마 성하의 서문’(8쪽~53쪽)을 읽고 질문이나 이야깃거리를 숙제방에 댓글로 남겨주세요!
2) 첫 시간은 강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주 세미나 범위는 <물질의 물리학> 1장과 2장이니 찬찬히 읽어가보세요!
3) 간식과 청소는 저(성민호)와 이미영 선생님이 맡아주셨네요. 후기도 성민호입니다.
그럼 다음 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보시나 선업이 다음 순간의 보상을 누리게 해주는 일종의 보험이나 마일리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선업도 탐욕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마음이 들면 아무래도 주춤거리게 되죠. 100% 순도의 어떤 마음을 자신에게 바라는건 무리가 아닐까 싶어요. 한 순간에 여러 마음들이 움직이는데 그중 강렬한 한두개가 행동으로 발현되는 거겠지요. 그리고 그런 행동을 통해 기쁨을 느낀다면 다시 그 마음이 강화되는 것이고. 선업이 탐욕이 아니라, 선업을 행하는 나의 마음이 선으로만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이 탐욕인 것 같기도. 아, 여기서도 '같기도'가 다시 나오는 건가요? 그립다 개그콘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