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학기를 마쳤습니다. 9주차까지 이어지는 낭송, 질의, 발제, 토론, 강의, 차담 등 매주 수요일 귀한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전 시간에는 『불소행찬』에 이어 『현우경』상권을 낭송했습니다. 오후에는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에게는 낯선 티베트의 역사와 약탈과 폭력을 일삼던 유목민들이 어떻게 불교를 받아들이고, 지금까지 이어지며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현우경』의 원제목은 ‘현우인연경’입니다. 각종 비유를 통해서 여러 인연들에 얽힌 인과응보의 내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선, 악의 과보는 아무리 오래 되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전생에 행했던 말과 뜻, 행위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는 점에서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도 엄청난 과보가 깃들어있으니까요.
현명함과 어리석은 업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이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지금 처한 상황은 나와 뭇 삶과의 인연 속에서 욕망하고 익힌 습기(習氣)에 의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재의 조건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야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수동이 아닌 능동으로 느껴지고 긍정적인 행위와 연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행위는 또한 다음 생으로 이어지고 변화하며 흐르겠지요. 이를 통해 불교가 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전생-현생-후생이 계속 구른다는 의미에서 전생(轉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초월자가 무(無)에서 만물을 창조했다는 것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맞고 기독교는 틀리다, 혹은 그 역으로 생각해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란 선의의 행동을 지향하며, 모든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같으며 각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각자 선택의 문제입니다. 불교철학을 배우고 있는 우리들은 보살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하는 것이지요.(맞지요?)
보살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요? 중생의 몸은 무수한 인연들의 연쇄작용으로 나타나는 실존적 조건입니다. 이 작용은 여러 의미들이 투쟁을 벌이는 항상적인 폭력의 장이기도 하고, 분열과 공생의 장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관계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나를 헤칠 수도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한계 속에 있으니 슬프기도 하고 미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대개 우리들은 이런 마음에 휩쓸려 버리지만 보살은 그런 한계 속에서도 자신을 어떻게 다르게 펼쳐내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자들입니다. 존재의 취약성을 알고, 다른 것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삶이지요. 그러려면 기꺼이 익숙한 자기 자기를 떠나 다른 것들을 향해 무한한 공감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 길을 알려주고 따르게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달라이라마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하필 슬픈 나라에 태어났습니까?’ 달라이라마는 악업을 지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묶여 비애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벌어진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며 결국 다 내 탓이라는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핍과 불편, 부당함을 계속 만들어내는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악업을 지어서 태어났다는 그 다음 말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이런 나라에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지혜를 발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것도 비관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지요. 어떤 안 좋은 상황이 악업을 지어서라든지 신의 벌이라고 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좋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살아가야지 하는 마음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고(苦, 無常)는 진리(苦聖諦)입니다. 인간 삶의 조건을 고(苦)라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티베트인들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나라를 ‘불법의 나라’라고 칭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선민의식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티베트인들에게 불법의 나라라고 믿는 것이 그들을 살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며 삶에 긍정적인 면을 부여한다면 좋은 것입니다. 어떤 개념도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 없으며 어떻게 작동하느냐의 문제이고, 삶의 조건을 나를 부정하는 방식이 아닌 길로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1학기 마지막 후기가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짧은 방학 잘 보내시고 5월 3일 시작하는 2학기 공부는 더욱 재미있게 해보아요.^^
슬픈 나라에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그 다음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주 깊이깊이 와닿았어요.
지금의 괴로움을 '전생에 악업을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순해 보여도 사실이니까요. 효암 스님께서 악업은 다음에 불편함으로 결과하는 것이라고 정의해주셨으니까요.
하지만 전생에 악업을 지었음은 지금 어찌해볼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할 수 있는 것, 우리 소관인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슬픈 땅에 살기에 '어떻게 지혜를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도 배울 수 있다는 점. 이 가르침을 고이 품어두고 언제고 펼쳐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꼼꼼하고 알찬 후기 감사합니다!
'지금 처한 상황은 나와 뭇 삶과의 인연 속에서 욕망하고 익힌 습기(習氣)에 의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행위는 또한 다음 생으로 이어지고 변화하며 흐르겠지요. 전생-현생-후생이 계속 구른다는 의미에서 전생(轉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생, 후생이 함께 하는 현생이 구른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아이구 아침부터 구르기 한판 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네요. 한 학기동안 수고하셨고요. 벌써 낼모레 수업 시작이라니. 시간이 쏜살같이 굴러가네요
"받아들인다"....사실 말로만 받아들인다고 했지 진짜 받아들였을까 스스로 자문해봅니다.
진짜 내 운명을, 인연조건을, 윤회를 받아들였다면, 그럼 그다음에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라는 능동적 자세가 자연스럽게 나올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후기 정리해서 올려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