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공부하면서 ‘모든 것이 공하다’고 배우지만 일상에서는 ‘나’의 존재감을 너무나 독단적으로 생생하게 느낍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해소하려면 출발점을 다르게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모든 것이 공하다’라는 결론에서부터 출발하면 ‘나’와 ‘내 것’을 줄기차게 움켜쥐고 있는 자신과 상대방을 미워하고 부정하게 됩니다. 깨달아야 하는 결론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만 하지 말고, 지금 이렇게 꽉 움켜쥔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보자는 것입니다.
물질은 그것을 물질화해내는 일련의 배치 속에서 도출된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작동하는 오감으로 감지되는 이 몸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일까? 물질로서의 몸에 대해 알려면 과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법칙을 도출하는 것이 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관찰이나 실험의 관계항들입니다. 실험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관찰자는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간의 분위기에 영향 받습니다. 그의 실험 주제는 자신의 인종, 계급, 성, 나이, 건강, 취향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균질의 중립적인 실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험실이라는 장치 자체가 이미 앎을 형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합니다. 실험을 해서 어떤 대상에 대한 앎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험 자체가 이미 앎의 요소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험을 매개로 한 앎이 그렇지 않은 앎보다 더 실증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입증하고자 하는 가설, 실험의 설계에는 이미 관찰자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으며, 실험의 내용과 방법의 선택이 실험 결과까지 내포합니다. 관찰자와 관찰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구분되지 않는 방식으로 관찰의 행위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에서 ‘실험, 관찰’ 행위가 유의미한 것은 이런 매개를 통해 관찰자와 관찰 대상의 경계가 해체되면서 과학이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과학 자체가 이미 여러 맥락들의 교차 위에서 나온 결과인 것입니다.
무한을 품은 유한으로서의 존재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몸의 감각을 통해서입니다. 관념을 형성하기 위한 관문이 신체인 것이죠. 느낀다는 것은 뭔가가 나에게 침투한다는 것입니다. 타자성이 나에게 침투하고 동시에 나도 다른 존재에게 침투하는 이 과정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때 우리는 완성된 실체로 서로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침에 의해 어떤 존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계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모든 것에 의해 침투당하는 과정 중에 형성됩니다. 비결정성이라는 무한을 존재의 요건으로 갖고 있는 유한인 것입니다.
상호침투와 비결정성은 불교 용어로는 연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 기대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우리 삶의 출발점입니다. 언제나 다른 것들에 의해 규정되므로 이것을 존재의 취약성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취약하다는 것이 약점이거나 상처만은 아닙니다. 취약성은 존재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맘대로 버릴 수 없는 취약성, 즉 고(苦)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불교 개념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해석하기
물리학이나 과학에서 물질을 보는 방식과 불교에서 물질을 보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양자 모두 물질에 대한 규정 속에 이미 각자의 전제가 들어가 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기획한 「물질 세계」를 강독하고, 「물질의 물리학」 세미나를 할 때 지식의 획득도 중요하지만 그 지식 속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범주들, 규정들을 살펴보고 질문하고 해체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채운샘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공부는 물질이 무엇인지, 정신이 무엇인지, 그 둘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기계적으로 학습한 지식의 방대함을 통해 퀴즈왕 대회에 나가 1등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공부를 하면서 세상을 보는 우리의 감각이 바뀝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에 질문이 들어가면 잠시 멈칫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비좁은 케이지에서 사육당하는 닭들에 대해 알게 되면 그저 가성비 좋은 닭과 달걀을 찾던 소비행위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전장연 시위를 통해 거리에 출현한 장애인들을 보고 난 이후에는 장애인도 나와 똑같은 시민으로서 이 세상을 돌아다닐 권리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높은 건물에 올라갈 수 있는 것은 팔다리가 튼튼해서가 아닙니다. 그 건물까지 갈 수 있는 도로와 운송수단, 계단,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등의 도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누릴 수 있는 특권층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모두가 높은 건물에 올라갈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면 오늘날 전장연의 시위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의 요구가 이루어졌을 테니까요.
“삼계가 모두 괴로운데 그 누가 편안할 수 있겠소”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단독자가 아니라 삼계 안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죠. 이것을 온마음과 몸으로 느낀다면 바로 보살일 것입니다. 보살, 공, 자비심 등 불교의 개념을 맨날 그 타령이 그 타령인 동어반복 속에서 고루하게 만들지 말고 우리의 삶과 더 밀접하게 연관될 수 있도록 확장시키면 더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학기 물질 공부를 통해 새로운 앎을 형성해 보아요. 앎의 형성 과정을 체험하는 현장 학습으로서의 2학기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땅땅땅!!
올 ㅋ^^ 호정샘표 후기 잘 읽었습니다. 물질이 뭘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있을 수 있겠네요. 우리에게 익숙한 최소 단위로 쪼개가는 환원적 방식도 있지만, 물질이 물질로 드러나는 배치 즉 발생적 원인을 보는 방식이 불교적 사유방식과 맞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질 한번 같이 파봅시다요^^
민호
2023-05-08 09:19
땅땅땅! 물질 세계에 대한 공부를 어떤 자세로 해야할지 보여주는 2학기의 '출사표'? 같은 느낌이 드네요! 시험보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고, 우리 감각을 바꾸려고 공부한다는 목표 하나만 잘 붙들고 한 학기 머리 아프게 또 재밌게 공부해가면 되겠네요~~
김자영
2023-05-08 22:15
저에게는 아직 낯설고 어려운 영역이지만, 어렴풋이 이번 학기 공부의 방향이 엿보이는 후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올 ㅋ^^ 호정샘표 후기 잘 읽었습니다. 물질이 뭘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 있을 수 있겠네요. 우리에게 익숙한 최소 단위로 쪼개가는 환원적 방식도 있지만, 물질이 물질로 드러나는 배치 즉 발생적 원인을 보는 방식이 불교적 사유방식과 맞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질 한번 같이 파봅시다요^^
땅땅땅! 물질 세계에 대한 공부를 어떤 자세로 해야할지 보여주는 2학기의 '출사표'? 같은 느낌이 드네요! 시험보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고, 우리 감각을 바꾸려고 공부한다는 목표 하나만 잘 붙들고 한 학기 머리 아프게 또 재밌게 공부해가면 되겠네요~~
저에게는 아직 낯설고 어려운 영역이지만, 어렴풋이 이번 학기 공부의 방향이 엿보이는 후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