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의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철학’의 테마는 ‘물질’입니다. 역사로 워밍업을 했다면, 본격적으로 불교적 사유가 기대고 있는 존재론적 토대가 꼴인지 살펴보는 일을 시작해야겠죠?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 열반적정 등의 통찰은 사물의 실상에 대한 어떤 이해 위에서 가다듬어졌을까요? 이번 학기는 ‘물질’이라는 키워드로 불교를 여행합니다. 물론, 그 여정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이자 탐사도구인 과학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오전에는 <물질 세계>를 강독하고 오후에는 <물질의 물리학> 세미나를 하고 또 강의를 들으며 한 학기를 보냅니다!
불교와 과학을 잇는 수승한 동기
“존귀하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자세하게 설하신 사물의 실상과 이를 토대로 한 철학 체계는 불자이든 아니든, 종교에 대한 믿음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모든 인류에게 일시적 또는 궁극적인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현대 학문의 접근 방식과 동일하게 편집해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수승한 동기를 가지고 나는 수년 전 인연 있는 몇 분과 의논하여 경론의 주제를 세 분야로 나누었고, 이 중 첫째와 둘째 주제인 사물의 체계 즉 과학, 그리고 철학에 대한 내용을 많은 노력을 기울여 광대하고 부수가 많은 경론에서 발췌하여 편집했다.”(<물질 세계>, 달라이 라마 성하의 서문, 53쪽)
첫 시간에는 <물질 세계>의 달라이 라마 성하의 서문 부분을 낭송하고 어떤 느낌들을 느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간중간 ‘현량’, ‘비량’, ‘정인’ 등 전문적인 불교 인식론 및 논리학 용어가 등장할 때는 멍했지만, 앞뒤로 달라이 라마가 왜 이 책을 기획하고 있는지를 말씀하실 때에는 감동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불교의 물질관을 현대 과학의 틀로 재구성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팔만사천경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논서와 연구서들을 번역하고 비교하고 요약하고 해석하고 다듬는 데에만 엄청나게 많은 인력과 시간이 들었을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그 고된 작업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계셨는데요. 그건 분명 부처님의 가르침이 현대 과학의 언어와 접목될 때 더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작업물을 접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과학의 영역 자체에도 도움이 되고 동시에 불교 역시 기존의 자리에서 더 나아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기획의 의도를 ‘수승한 동기’라고 표현하셨는데, 윤지샘께서는 달라이 라마 본인께서는 이런 표현을 잘 안 쓰신다고 말씀해주신 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대단한 정성이 들어가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불교와 과학을 연결 짓는 이유는 여럿일 수 있겠지만, 그런 시도가 가능한 것은 기본적으로 둘 사이에는 깊이 공명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구와 현자들아 금을 달구고, 자르고, 갈 듯이 나의 말을 잘 분석해야지”라는 부처님의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불교의 위대함은, 불교 자체의 지혜조차 권위나 명성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질문과 경험과 분석으로 사물의 실상을 따져보고 체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신중한 태도는 과학이 세계에 접근할 때 보이는 철저함의 미덕과 유사합니다. 이런 유사점에서 출발하지만, 불교와 과학은 나름의 한계를 마주하고 있고 서로에게 배울 점이 많습니다. 과학 연구는 인류에게 풍요와 편의 같은 선물을 주어왔지만, 그것은 “연구자 본인의 본성과 기억이 생기는 방식, 고통과 행복의 느낌 등”(12쪽) 우리의 심리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곳에서조차 수많은 폭력과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때로는 과학 기술 자체가 그런 불행에 이용되기도 합니다. 과학은 육체적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애써온 만큼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고 해결할 지혜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 경론에서 설하는 심리학 및 마음의 분석은 그런 작업에 분명한 도움이 될 수 있으며, 현대의 학문을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교의 물질관 역시 더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를 갖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어디에 살건 어떤 종교를 가졌건 불교 철학이 이뤄온 사물의 실상에 대한 분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서문에는 7페이지에 달하는 ‘티베트 역경사’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역사에서 인도로 유학을 다녀온 유명한 스승들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역경사들과 번역자들 수십 수백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합니다. 7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손길 덕분에 소중한 법이 그 빛을 잃지 않고 전해져 왔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은혜는 비단 티베트인만이 아니라 인도고전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보답하기 어려울 것이다”(51쪽)라고 말씀하시면서요.
신유물론과 변용으로서의 고(苦)
첫 강의에서는 채운샘께서 최근에 흥미롭게 공부하고 계신 물질 대한 새로운 철학 담론들과 이런저런 생각들을 전해주셨습니다. 그 중에 제게 다가왔던 몇 가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최근 과학에는 신유물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양자역학이 전해준 한 가지는, 이제 물질의 탐구에 있어서 정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대상세계에서 분리된 예외적 존재로 가정된 관찰자 자신, 관찰 도구, 관찰 행위 자체가 대상과 긴밀히 얽혀는 와중에 대체 어떤 객관적 진리가 건재할 수 있을까요? 사물의 미시적 실상은 한 가지 입장에서 기술될 수 없기에 반드시 해석일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해석을 기존의 과학 영역의 담론들만으로는 하는 한 빈곤하고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류학이나 페미니즘의 렌즈를 가져와, 관찰, 실험, 측정, 입증 등의 과학의 기존 표상들을 넘어가는 작업들이 시도됩니다. 이렇게 과학/철학/예술/종교 같은 어떤 학문이 자기 자신의 질서를 묻고 기존의 관념들과 대결하며 ‘이것이 과학/철학/예술/종교인가?’를 물을 때, 그것은 자신의 영역을 바꾸며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 사성제의 첫 번째 ‘고제’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해 볼 수는 없을까요? 채운샘은 우리의 신체가 세계를 만나는 그 접속의 사건으로부터 고를 생각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신체의 느낌이란, 스피노자에 따르면 변용(affect 정동, 감응)입니다. 사실 우리는 정서적으로 변용되는 방식으로만 세상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념들조차 이 변용에서 생겨나지요. 변용은 타자성이 침투하는 과정이자 내가 타자로 침투하는 상호침투의 과정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한 이 여정을 계속하며 다른 존재로 되어갑니다. 여기에는 선악도 호오도 없지만 ‘취약성’이 항존합니다. 이는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버틀러와 해러웨이 같은 이들이 말하듯 상호관여하며 변해가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세상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지요. 그런 한에서 존재는 감염, 개입, 의존, 상처를 전제하며 존재합니다. 바로 이점을 ‘고’로 이해하며 어떨까요.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의미를 연상하기보다는, 우리가 침투당하고 상처받는 것을 존재의 본질로 가지고 있음을, 이러지 않고 살아갈 길이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고제’라면 어떨까요. 이러한 본성으로서의 ‘고’라면 그것을 가진 존재들끼리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윤리가 따라 나오게 될 것 같습니다. 이런 고가 없어진 세계를 꿈꾸지 않고, 그런 존재를 기대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건강하고 유쾌한 의존관계를 구성할 것인가. 이런 물음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늦은 공지(5.10)입니다!
1) <물질세계> 54~106쪽을 읽고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이나 이야깃거리를 숙제방에 댓글로 남겨주세요!
2) <물질의 물리학> 1장과 2장(~76쪽)까지 읽어 옵니다. 발제는 이윤지 선생님과 김자영 선생님께서 해주시겠습니다.
3) 후기는 김자영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4) 간식은 이기웅 선생님과 김호정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