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법을 위한 ‘때(時)’에 대하여
<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불소행찬)>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고 재미납니다. 이렇게 페이지가 잘 넘어가면서도 이야깃거리가 많은 책이라니! 지난주에는 부처님이 마부 차익과 모두가 잠든 궁궐을 뒤로하고 출가의 길로 뛰쳐나온 데까지 읽었죠.
이번 주에는 차익이 돌아가고 궁궐사람들이 울부짖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부처님은 고행의 숲에서 고행자들의 방편 역시 내세의 즐거움을 향하고 있음을 간파하시고 새 스승 아라람을 찾아 떠나죠. 그리고 궁궐에서 신하들이 찾아와 부처님께 돌아가자고, 법은 좋지만 “다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닙니다”(9-38)하며 사정사정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결단은 단단합니다. “저 해와 달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수미산과 설산이 변하더라도 나는 이 몸을 마칠 때까지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9-55) 그렇게 두 신하를 보내고 영취산으로 나아가는 부처님. 그 후광에 반한 빈비사라왕(병사왕)이 찾아와 나라의 반을 줄 테니 함께 정치를 하자고, 출가는 이룰 걸 이룬 노년에 하라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뜻은 수미산처럼 단단하여 빈비사라의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여 설복시킵니다. 사실 이 설득과 의혹과 반박과 결단의 과정은, 생노병사를 마주한 순간부터 계속 변주되며 반복되어왔습니다. 부처님 자신 안에서 여러 번의 갈등이 있었고, 마부 차익
그러면서 계속 반복되는 주제가 바로 출가의 ‘때’에 과한 의견들입니다. 강독 후 토론에서 저희는 이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
과연 구법에도 적절한 ‘때’가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연령과 관련될까요? 그 연령은 개체의 신체적 나이이기만 할까요, 아니면 축적된 전생의 업과 인연의 스펙트럼을 포함하는 걸까요? 우리에게 생각을 강요하는 문제의 문장은 이렇습니다.
“‘왕께서는 젊어서 경솔하고 조급하므로 늙어서 집 떠나라’고 하지만 내 보기에는 나이 늙은 사람은 힘이 모자라 감당할 수 없으니 한창 젊고 뜻이 굳셀 때 마음을 결정하는 것만 못합니다. 죽음의 적은 칼 잡고 따르면서 항상 그 틈을 엿보며 찾나니 어찌 노년까지 기다리다 뜻을 따라서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11-37, 11-38)
이 문장은 자칫, 젊음 혹은 청년이라는 특정 연령이 깨달음의 길에 나서는 적기라는 말처럼 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고미숙 선생님의 표현은 헷갈림을 더합니다. “붓다의 고뇌와 깨달음은 청년기의 산물이라는 것. 이 사실은 몹시 중요하다. (...) 붓다의 가르침은 청년의 파토스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청년 붓다>, 17쪽) 그렇다면 구법의 결단은 ‘청년’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 젊고 튼튼한 ‘청년’에게만 열려 있는 것일까요?
제 생각에 이런 규정은 스스로를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청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의구심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젊고 힘 있을 때 지금과 같은 배움을 시작했더라면...’라는 일종의 후회나 아쉬움입니다. 우리는 쉬이 이렇게 자신의 ‘한 때’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호정샘의 말대로, ‘젊었을 때 기회가 있다면 정말 잘했을까’를 생각해보면 큰 자신이 없습니다. 젊은 사람이면 젊은 사람대로 또 그 나름의 부담과 욕망에 휘둘리는 것 같습니다. 뭐라도 이뤄보고 싶고 즐겨보고 싶은 마음 혹은 불쑥불쑥 치솟는 욕구들(부왕과 빈비사라왕이 그렇게 강조했던 5욕락)에 더 지배되기 나름이니까요. 플라톤은 <국가>에서 케팔로스 노인의 말을 빌려, 노년이 되니 젊은 시절의 욕구들이 사라져서 아주 편하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나네요. 실제로도 공부든 수행이든 구법의 길을 가는 사람들 중 ‘청년’의 비율은 아주 적은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한창 젊고 뜻이 굳셀 때’라고 말씀하셨지만, 왠지 제 입장에서는 ‘한창 젊음’과 ‘뜻이 굳셈’은 별로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는 두 상태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저희는 부처님의 단호한 결단에 숨은 뜻은, 구법의 길에서 중요한 것은 젊으냐 늙으냐 하는 나이의 문제보다도 ‘바로 지금 해야 할 것’으로 여길 수 있느냐 하는 현행적 결단력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처님께 ‘아직 이르다’라고 조언하는 부왕, 신하들, 빈비사라 왕 등은 그렇게 말하면서 뭘 원하는 걸까요? 무엇을 정당화하는 걸까요? 젊음을 사회적 생산(정치, 노동)에 바쳐야 하는 사회적 관습이 아닐까요. 그럴 때 그들에게 법(의무를 다하고 별로 포기할 것이 없는 노년에서야 추구되어 마땅한)은 굉장히 안온하고 조촐한 방식으로 상상되지 않을까요. 부처님은 자신을 만류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히려 절실함이 차오른 지금 안 하는데 그때라고 할까라고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희는 이 ‘젊음=뜻이 굳셈=적기’라는 규정을 나이보다는 현재의 절실함 혹은 질문이 무르익은 시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고도 이야기했습니다.
그 시점이 관습과 충돌한다면, 거기서 부처님만큼이나 ‘이기적’으로 될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늙은 부왕의 외아들이자 크샤트리아였던 부처님은 정치적 의무와 가족의 정을 다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것은 모든 중생을 위함이라는 대자대비심의 실천이었지만, 어느 측면에서는 대단히 무자비해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결단력의 문제는 언제나 우리에게 숙제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의 ‘굳셈’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며, 결코 연령에만 국한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티베트를 빛낸 이름들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를 읽고 첫 세미나를 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비록 역사가는 아니지만, 그가 경험하고 통찰한 티베트의 역사는 아주 신기하고 풍성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닌 만큼, 흔히 역사가들이 빠지곤 하는 민족주의적 자만이나 외세에 대한 비난의 시각이 없었습니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객관성’으로 호쾌하게 역사적 사건들을 말하죠. 또한 이 역사 이야기의 가장 큰 특징은 역사를 보고 들음에 있어서 두 가지 관점을 유지하고 계시다는 있다는 점인데요. 하나는 일반적인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수련을 통해서 정화된 통찰력을 갖게 된 사람들이 보는 관점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이 두 관점을 오가며, 화신과 환생 등의 이야기를 함께 전해줍니다. 이에 헷갈려하는 저자 토머스 레어드에게 깊이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 범위에서는, 최초의 티베트 신화부터, 티베트 황제 송첸 캄포의 등장, 불교의 전파(1차 불법 전파기), 랑 다마의 반란과 불교의 쇠퇴, 불법의 귀환과 승단들의 탄생(2차 불법 전파기)까지 배웠습니다. 아무래도 역사다 보니 몇 가지 이름들은 반드시 외워야 했는데요. 첫 번째는 첸리시 보살(관세음보살)입니다. 티베트인들은 자신이 원숭이와 바위 정령의 결합에서 나왔다는 신화를 믿습니다. 그 중매자가 첸리시 보살이지요.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첸리시 보살에게 저 히말라야 너머 티베트 땅을 보살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달라이 라마 역시 첸리시 보살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티베트 사원의 그림에는 첸리시 보살에게서 나온 무지개가 원숭이의 가슴에 닿아 있지요. 이는 단순히 허황된 신화가 아닌데, 티베트인들은 그 신화를 삶 속에 녹여서, 매일의 기도 속에서 첸리시 보살의 가호를 느끼고 일상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죠.
두 번째는 송첸 깜뽀입니다. 그는 618년에 왕위에 올라 티베트 땅을 통일하고, 불법을 들여오고, 티벳 문자를 만들고, 당나라의 문성공주를 데려온 어마어마한 황제입니다. 광개토대왕+세종대왕 급의 인물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죠. 세 번째는 티송 데첸입니다. 그는 법왕으로 불리는데, 티베트에 불법을 널리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도로부터 두 불교학자들을 데려옵니다. 대학자 산타라크시타는 당시 티베트의 로컬 종교인 뵌교에 맞서 스님들에게 계를 내렸고(즉 인간들을 교화했고), 구루 린포체 파드마삼바바는 끊임없이 출몰하는 티베트 땅의 정령들을 제압했습니다. 물론 파드마삼바바는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지 문헌상으론느 정확히 고증되지는 않습니다. 그는 연화생(연꽃에서 난 자)으로서 아미타불의 화신입니다. 죽지 않고 햇빛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지요. 두 번째 관점을 오가며, 달라이 라마는 파드마삼바바의 이야기는 견해 문제일 뿐 그의 실존은 확실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네 번째는 랑 다마입니다. 그는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불교를 탄압하고 뵌교 전통 편에 섰으며, 티베트의 몰락과 혼란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최근에는 그가 불교에 지나치게 치중된 티베트의 정치적 재정적 상태를 염려해 그런 일을 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내용이 좀 많은데요. 저희는 환생 혹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는 문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만약 동일한 영혼이 환생한다면, 교육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도 던져봤습니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환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질적으로만 생각해보면, 흩어진 것이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밝은 기운을 가진 것들이 모이는 양상을 생각해 언뜻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는 이렇게 과학적이고 상시적인 언어로 얘기될 수 없는 차원인지도 모릅니다. 그 차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로 바꾸는 것보다, 그런 두 번째 관점에 열려 있느냐 닫혀 있느냐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티베트의 정령이나 환영 같은 이야기가 어쩌면 그 정도 고도(기본 3000~4000)에서는 일어날 법한 일들이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다음 시간 공지입니다.
1) <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 16장(~298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2) 강의 주간이지만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는 차차 읽어갑니다.
3) 간식은 최윤순 선생님, 정혜윤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이기웅 선생님께서 써주시겠습니다.
'불소행찬'을 낭낭하게 같이 읽으니 좋죠! 집에서 혼자 낭송하는 것과는 다른 기운이 느끼지고 좀 더 집중이 잘 되는 거 같네요. '티베트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져 좋습니다. 매번 자세한 후기 올려줘서 감사합니다.
다음주 범위
불소행찬:12장~16장(p204~298)
티베트이야기:6장~8장(p140~235)
민호샘이 들려주는 이야기 재밌어요.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언어로 이야기될 수 없는 차원에 대한 열린 자세란 그런 차원이나 존재가 있을지도 몰라. 그럴 수도 있어.라는 태도인가요? 있다는 강한 확신은 없지만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어정쩡한 스탠스. 같은 태도에 대한 다른 뉘앙스의 표현. 이런 어중간함 속에서 헤메면서 길을 찾는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