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3주차에 함께 읽은 범위가 『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의 중심 내용이 모두 집약된듯하다. 그래서인지 도반들끼리 궁금한 것도 많았고 얘깃거리도 많았다. 토론과정에서 등장하는 중심 개념들을 정리하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 완전한 해탈, 자비, 연민, 동정심, 공감, 대상화, 평등, 취약성, 관찰, 질문 등이다. 이 개념들은 12장 「아라람울두람품」, 13장 「파마품」과 14장 「아유삼보제품」을 토론하다 등장한 개념들이다. 모든 이야기는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중심 개념에서 새로운 개념으로 확장된다. 그렇게 토론하다 보면 모든 궁금증을 다 해소하지는 못할지라도 상당 부분 머리를 맑게 해준다. 더욱이 사유를 더 풍부하고 깊게 해주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3주차 후기는 토론에 등장한 중심개념들에 대한 질문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2장 아라람울두람품 – 아라람과 울두람을 만나시다.
‘완전한 해탈’이란 무엇일까? 붓다가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출가한 이유도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통에서 벗어난 ‘완전한 해탈’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 완전한 해탈을 위해 붓다께서 찾아간 두 스승이 아라람(알라라 깔라마)과 울두람(웃다까 라마뿟따)이다. 아라람은 선정 수행 단계인 9차제정(九次第定) 중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이른 자이고, 울두람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의 단계에 이른 자이다. 그리고 그 두 스승은 각자가 도달한 단계가 완전한 해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붓다께서 그 두 스승이 성취한 단계는 완전한 해탈이 아니라고 여기고 그들을 떠나서 6년의 긴 고행의 길로 들어선다. 아라람이 붓다께 설명하는 완전한 해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언뜻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들린다. 도반들 대부분도 다르지 않은 듯했다. 불교 공부가 깊은 윤지샘도 그렇게 읽혔다고 한다.
완전한 해탈에 대한 두 스승과 붓다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대목에서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9차제정이라는 수행 단계에 관한 불교 상식 정도만 떠올려도 무소유처정과 비상비비상처정이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나도 그렇고 도반 모두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하여 경전을 토대로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해내기란 쉽지 않았다. 붓다께서 아라람이 성취한 선정은 단계별로 ‘원인’을 아는 것을 버리지 않아서,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겨서, ‘구함’이 있어서, ‘앎’이 있어서, 모두가 구경의 해탈이 아니라고 하셨고, 울두람도 ‘나’가 있다고 헤아려 완전한 해탈이 아니라고 강변하신다.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인지 알듯 말듯 명료하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저런 땅벌에 쏘인 경험 등 다양한 기억을 떠올려 엉터리 추론을 해 볼 뿐이었다. 요즘 ‘참나’를 찾는 다양한 명상이 많은데 ‘참나’를 찾는 명상이나 두 스승이 도달한 단계나 같은 것 아닌가? 모두 한계를 드러낼 뿐이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예를 드는 도반도 계셨다. 그러나 그러한 추론을 통한 토론이 무용한 것만은 아니었다. 추론이 비록 정확한 답을 도출하지 못할지라도 다시 한번 관련 내용을 찾아보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다음번 공부에 대한 바른길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집에 와서 자료를 찾아보니 9차제정 중 색계 초선부터 4선정과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에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기까지 무색계의 4선정은 사마타로도 도달할 수 있는 단계이지만, 비상비비상처정을 넘어선 단계인 멸진정(상수멸정)은 위빠사나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따라서 멸진정(滅盡定)은 아나함이상 아라한이나 부처님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렇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마타는 선정 및 삼매 등을 포괄하는 수행법으로 표상(nimitta)을 대상으로 감정의 평온이나 고요함을 집중적으로 계발하는 것을 말하며, 참선도 사마타의 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위빠사나는 무상·고·공·무아와 같이 존재의 실상인 법(사성제)을 통찰해서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이다. 따라서 아라람 등 두 스승이 사마타수행을 통하여 도달한 무소유처정이나 비상비비상처정은 선정에서 깨어나면 본래의 욕망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완전한 해탈이 아니다. 그래서 붓다는 그들을 떠난 것으로 경전에서 말하고 있었다.
14장, 「아유삼보제품」(구경열반 깨달음을 얻으시다)
14-2 “초저녁에 삼매에 들어가서 과거의 생을 기억하고 생각했다.”
14-3“‘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을 따라 지금 여기에 왔는가.’ 이와 같은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의 죽고 태어남을 모두 다 분명히 알았다. 헤아릴 수 없는 태어나고 죽음을 받아온 일체중생의 무리들은 일찍이 모두 나의 친족이었음을 알았으니 큰 자비심이 일어났다.”(243쪽)
이번 장에서는 ‘큰 자비심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에 대한 민호샘의 질문으로부터 동정심, 연민, 공감, 평등, 대상화, 관찰, 질문, 취약성, 등등 유의미한 개념들이 호출되고 토론이 활발해지면서 사유가 확장된다. 개인적으로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나 자신의 내면에서 부닥뜨리는 문제들과 깊은 연관이 있어서 특히 유의미하게 들렸다. 처음 나는 민호샘의 질문에 아주 단편적으로 대답했다. 부처님께서는 수억 겁 동안 공덕을 쌓고 수행을 닦아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기 때문에 숙명통으로 당신과 중생의 전생을 보니 자연스럽게 큰 자비심이 일어난 것이다. 야사도 오랫동안 심어 온 선근의 힘으로 단숨에 나한과를 얻었다고 싯구에도 있다. 야사가 나한과를 얻은 것은 단순히 총명해서가 아니다. 오랜 기간 공덕을 쌓고 수행을 닦은 토대 위에서 부처님의 설법이란 인연이 딱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귀를 더욱 집중시킨 것은 민호샘의 다음 이어진 질문이었다. “우리는 전생을 통해 쌓아온 업과 선근이 있지만 그것을 통찰하지 못한다. 여기서 통찰하는 것이 뭐냐라는 것이 고민이 되는 이유는 지금 장애학과 장애정치학이란 내용이 나오는 『짐승을 끄는 짐승들』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나 비장애인을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체가 다르거나 종이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으로밖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동정심이랑 자비심이랑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이 부분이 부처님의 통찰이랑 매우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자비심이랑 게 따로 있어서 불쌍한 사람을 보면 당연한 반응처럼 자비심이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에 앞서서 존재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함께 있어야 할 것 같다”
여기서부터 다양한 의견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은이 샘 – 논리와 윤리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논리에서 윤리가 도출된다고 하신 채운샘의 말씀은 윤리란 그냥 이렇게 해야 해! 하는 당위성에 의해서 나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윤지샘 – 같은 맥락으로서 티벳불교에서 모든 중생이 수많은 윤회 속에서 한때 나의 어머니였다고 얘기한다. 어머니가 내게 가장 자애롭고 내가 자비를 베풀기 좋은 대상이라고 가정할 때 자비심이 일어날 수 있다. 자영샘 – 카렌 암스트롱의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의 깨달음 편에서 붓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붓다는 사람들이 들판에서 쟁기질하는 것을 보다가 어린 풀이 뽑혀 나가고, 거기에 달라붙어 있던 벌레들이 죽는 것을 보고 깊은 연민을 느꼈다. 이때 자신과 개인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생물에게 느낀 연민 같은 동정심은 어디서 나온 걸까? 이런 놀라울 정도의 공감력은 우주적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통찰력을 기반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통찰력이랄까 직관을 통해서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뉘앙스를 느꼈다. 호정샘 – 나는 관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동정이랑 자비 그 둘이 다른 것은 동정은 대상화하는 것이고, 자비는 나도 그들과 같다는 공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가 그들과 같게 되려면 나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그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나와 너 그 둘을 모두 알면 차별이나 혐오의 감정과 같은 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가깝다고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민호샘 – 지금 고민하는 것이 평등이라는 문제이다. 부처님이 보여주시는 평등이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젠더 갈등이나 장애인 등에 매우 중요할 것 같다. 부처님은 왕족이면서 남성이다. 당시에 특권층에 해당하는 주류적 존재였다. 그런 붓다가 어떻게 벌레하고 공명하고, 계급적으로 자기와 전혀 다른 존재들하고 공명하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우리가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시선이 잘 안 가고 마음이 안 일어나는 것이 현실인데, 이런 문제를 부처님의 관찰하는 장면에서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혜윤샘 – 우리도 몇 억겁의 세월을 지내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하고 다른 점은 관찰 속에서 질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을 따라 지금 여기에 태어났는가?” 이런 질문 속에서 관찰하면 그 한 생의 생애가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호정샘 – 팟캐스트에서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와 같이 분쟁지역에 많이 가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여성 감독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사회자가 그 감독에게 “우리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뭘까요?” 물었다. 보통은 통속적으로 후원을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독의 대답은 달랐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면 그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낯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리감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그녀는 말했다. 윤순샘 – 이런 질문은 ‘저 사람 장애가 있으니까 도와줘야 해’가 아니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삶에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다. ‘불쌍하니까 도와줘!’ 이것은 나의 주관적인 인식으로 그 사람을 불쌍 하다고 평가하는 것이고, 질문했을 때는 그 사람과 평등한 관계가 되는 것 같다. 경아샘 – 내 삶 속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장애는 늙음이란 장애다. 그래서 늙음을 사유할 때 장애가 나의 문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일이 아닐 수 있는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민하지 않을 거지만 사람이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늙음을 사유하면 장애의 문제를 내 삶의 문제로 끌어올 수가 있다. 장애가 내 삶의 문제가 되어야 비로소 장애인과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작년에 세미나를 했던 쥬디스 버틀러 책에서도 나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취약성이 곧 공감하는 거라고 표현한다. 공감하기 위해서는 장애, 취약성 이런 것들이 어떻게 하면 대상화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정은이샘 – 거꾸로 질문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왜 우리는 이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지? 점점 개개인 자체가 내 안전을 확보하기에도 급급한 경쟁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회피하고 다행히 나는 아직 무사한 것을 확인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 같다. 정은이샘이 소개한 서양에서 구걸하고 있던 맹인(盲人) 앞을 지나던 행인이 맹인 앞에 있는 팻말의 문구를 바꾸자 사람들이 더 많은 도움을 주더라는 얘기가 인상 깊었다. 푯말에 적힌 말은 “오늘 정말 아름다운 날입니다. 그런데 저는 볼 수가 없어요”였다. 공감을 일으켜서 적극적인 행위를 유발시킨 것이었다. 이외에도 윤지샘의 다섯 가지 욕망의 자재한 왕 마왕 파순과 욕염(欲染)과 능열인(能悅人), 그리고 가애락(可愛樂)이라는 마왕의 세 딸의 이름에 공감이 갔다는 말이 흥미 있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 생계를 위하여 피할 수 없는 사회활동 속에서 끈적끈적한 다양한 욕망들을 마주하면서 외면할 수도 없고, 때론 문득문득 휩쓸리기도 하는 나 자신의 내면을 반추해 보면서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평소에 자주 접했던 부처님의 생애를 『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를 만나 도반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읽으니 재미있기도 하고 다양한 측면에서 세상과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흐뭇하다. 그나마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여러분께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배웁니다. --끝--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지난 세미나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있는 이때, 바로 이때, 딱 적절한 타이밍이네요. 대상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이 중요하지만(사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하는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대상화도 상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일 수 있다는 혜윤샘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던 제가 보이네요. 일단은 알아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꽈?
여러분들의 의견 잘 정리해주셔서 다시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고요 수고하셨습니다~ 글구 공부에 대한 열정은 최고!!
지난시간의 토론내용을 복기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잘 정리된 글을 읽으니 계속 관찰하고 질문하며 배우는 도반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