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다섯 번째 시간 후기/2023.3.23./윤순
1교시 <불소행찬(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 강독을 끝내며
형식은 한 권의 책 전체를 한 사람씩 적당한 분량을 돌아가며 1시간 반 정도 소리 내어 읽습니다. 강독 후, 잠깐(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토론 시간이 있습니다. 토론 시간이 짧은 관계로 알찬 토론을 위해 집에서 읽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구절이나 질문을 미리 짧은 글로 남깁니다. 이 글들을 모아 토론합니다. ‘불교+철학’ 수업 시작 전 저는 처음 이러한 형식이 지루함을 낳는 게 아닐까라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특히 1시간 반 정도 소리 내어 읽을 때, 지루함을 느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제로 소리 내어 읽거나 각 동학들의 다양한 톤과 속도의 소리로 <불소행찬>을 들을 때가 혼자 묵독하며 토론할 질문을 준비하거나 실제 토론 때 보다 보이지 않던 부처님의 말씀들과 진하게 만났습니다. 똑같은 책을 읽지만, 다른 체험을 하는 느낌이 생생하게 다가왔지요. 특히 다른 학인들이 특색있는 리듬과 톤의 목소리로 읽을 때 저에게 특별해지는 단어들이 생겨났습니다. 신기한 체험이었습니다. ‘시로 쓴 부처님의 생애’라는 특별한 이 책의 문체도 저의 체험에 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다음 책은 <현우경>입니다. 이번에는 강독 과정 어느 부분에서 진한 체험을 하게 될지 궁금합니다.
<불소행찬>의 이번 강독 분량은 제5권(신력주수품, 리차사별품, 열반품, 대반열바품, 탄열반품, 분사리품)입니다. 공교롭게도 읽은 전체 품들이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과정, 준비 시작부터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사리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모셔졌는가? 까지 긴 분량을 할애하여 찬탄하고 있습니다. 저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처님 열반을 슬퍼하는 제가자와 대중에게 자신이 깨달은 법을 다시 한번 꼼꼼히 전해주시려 하는 부분에서 나오는 음식에 대한 계율이 다가왔습니다.
음식에 관해 이 시대 사람들은 어떤 태도를 가질까요? 맛있고,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더 먹는 게 최고지 라는 빈약한 윤리 정도가 아닐까요? 부처님께서는 음식을 대하는 계율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음식이 왜 필요한지 음식을 먹을 때 우리의 마음은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분량을 알아/ 마땅히 약을 먹는 방법처럼 하고/ 그 음식을 먹음에 의거하여/ 탐하거나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음식을 먹는 것은 굶주리고 목마름을 풀기 위한 것으로 마치 녹이 슨 수레의 기름과 같으니라.”(26-32) 이 부처님의 말씀은 제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를 돌아보게 하고 이제부터 어떻게 음식을 대하는 게 좋을까를 사유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도 중생들에게 자비를 행하십니다. 법보시를 하셨지요. 경아샘과 자영샘도 부처님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가 중생들의 깨달음을 돕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점을 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열반 해탈과 티베트에서 부처(보살)의 환생이 대치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봐야 하는지 질문하셨습니다. 티베트의 툴쿠제도에서 달라이 라마가 ‘첸리시 보살의 화신’이라는 말에서 윤지샘이 ‘법신, 보신, 화신’에 대한 차이를 다시 한번 설명해 주셨습니다. 화신은 육으로 나타난 부처님(보살)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다른 학인들에게서도 부처님의 법에 관한 질문들이 많았습니다. 민호샘과 호정샘은 왜 인연을 따라 일어나는 것, 거품 같이 멸하는 것, 항상함이 없는 것이 왜 고(괴로움)인가?를 질문했습니다. 즉 고집멸도 사성제를 그냥 받아들이든 일상에서 끊임없는 괴로움에 시달려서 우리가 괴로움을 느끼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든, 왜 우리는 사물들의 필멸성을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라고 받아들이는가? 괴롭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다음 질문은 괴로움의 단계 없이는 고차원적 지복에는 이를 수 없는 것일까였습니다.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일에서 처음부터 고를 느끼기도 하고 즐거운 일이라도 그것이 사라지는 게 결국 고가 된다는 의견, 고를 더 큰 고가 덮는다는 의견,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었지만, 괴로움의 단계 없이 고차원적 지복에 이르지 못하는 건 고를 겪는 인간만이 깨달음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과도 연결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가 아니라고 부인해서 즐겁게 된다면 괴롭지 않게 되려는 절실한 마음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우리가 겪는 고야말로 도를 닦게 만드는 게 아닐까요? 당연한 것 같지만, 부처님께서 고를 사성제의 첫머리에 설하신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관한 긴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불소행찬> 마지막 품인 ‘분사리품’에는 부처님 사후, 남겨진 사리를 나누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사리를 갖겠다고 전쟁을 불사하는 장면이 매우 재미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은이샘과 혜윤샘은 사리를 서로 가지려는 과정에서 나누지 않으려는 사리를 수습한 힘센 사람들에 관해 질문하셨습니다. 결국 열 몫으로 나누어 가지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 전쟁(큰 살생)의 중재를 위해 현명한 바라문이 힘센 사람들에게 ‘법을 아끼는 허물’과 ‘법을 즐기는 것’을 비교하며 말한 부분에 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다 되어 충분한 토론은 되지 않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소행찬> 강독이 끝났는데도 여운이 남습니다.
2교시 ‘입체적 다양성’의 관점으로 보는 역사와 6세기 ~7세기 중국(당 – 불교의 중국화) 채운샘 강의
<달라이 라마가 들려주는 티베트 이야기>라는 역사서를 함께 읽고 있기에 먼저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궁금해하는 부분, 달라이 라마가 말씀하시는 ‘첸리시의 원대한 계획’과 역사(무엇이든)를 영성으로 보는 관점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역사라 하면, 과거 사실을 기술하는 분야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사실이라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근대(19세기 이후) 이래로 역사적 사실(fact)은 1차 사료로 공문서에 따라 기술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러한 역사 서술 개념 속에서 역사가 ‘이러저러했구나’ 판단하게 됩니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아날학파(1920년~1930년 정도) 역사가는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층위들이 있는데 이 모두를 뭉뚱그려서 기술하는 게 맞는가를 묻습니다. 경제의 시간과 정치의 시간 일상 문화의 시간은 다르게 속도감을 가지고 흐릅니다. 어떤 특정 시대에 전쟁에서 지고 이기는 단편적 사건이나 어떤 왕이 집권했다는 정치적 사실만 있는 역사 기술(거시사)은 놓치는 사건들이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왕이 되는 동시에 그 시대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형태로 모여 살았는지 등의 세부적인 사실들(미시사)도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당연하게 정치사를 역사라고 여기는 것과 달리 19세기 이전의 다양한 역사 서술이 있습니다. 예컨대 그리스 헤로도토스의 <역사>, 중국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전혀 다른 형식으로 역사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사실인지 증명될 수 없는 ‘운명’을 따라 기술됩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천명’을 기준으로 기술됩니다. 정치적 사실을 중심으로 쓴 것만 역사라고 하는 우리의 개념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역사>나 <사기>도 과거 이야기인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이지 못한 기술 같아 보이지만, 무엇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개념으로 보는가에 따라 다른 합리성이 도출되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티베트 이야기>에서 달라이 라마가 말씀하시는 티베트 역사 기술이 ‘영성으로 보는 관점’이라서 비합리적이라 생각하면서 읽으면, ‘첸리시의 원대한 계획’이라든지 환생인 달라이 라마를 찾아 이어지는 ‘툴쿠 제도’를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듭니다. 티베트의 지도자 선정 과정인 ‘툴쿠 제도’가 투표해서 한 표라도 더 받으면 대통령이 되는 우리나라의 선거 제도보다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티베트 사람들은 ‘툴쿠 제도’로 지도자를 선정하는 전통에 자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14대 달라이 라마까지 이어지고 있는 안정적 제도이고, 어느 집(가문)에서든 뽑힐 기회가 있기에 민주적이고, 첸리시(관세음보살)의 화신이 티베트의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유를 보니 나름 합리적이고 자부심을 느낄만하죠? 따라서 우리의 선거 제도와 다른 형식이라고 비합리적이라 확신한다는 점이 더 이상해 보입니다. ‘툴쿠 제도’는 비합리적이 아닌 다른 합리적 제도이고 티베트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기술하는 자체에는 기술하는 자의 ‘vision’이 드러납니다. 달라이 라마의 vision은 ‘자비(불법)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입니다. 달라이 라마에게 보살의 원대한 계획, 불법의 전파는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가는 여정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영성으로 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중국 당나라 시대의 불교의 중국화 강의는 민호샘 공지에서 확인하세요.~
우리가 어느새 불소행찬을 다 읽어제꼈네요. 다음에 읽을 현우경도 재미있는 이야기일것 같아 기대돼요.
이야기에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이 들어가 있죠.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는지를 보면 그사람이 세상을 보는 시각을 알 수 있고 어떻게 살고싶은지도 추측할 수 있죠. 저는 지난시간에 수업을 들으면서 비전, 역사인식, 사관이란 결국 나의 삶의 자세의 반영이라고 이해했어요. 비전이라는 것을 미래의 영역이라고만 생각하는건 그것이 과거, 현재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자꾸 잊어버려서인것 같아요.
달라이라마의 원대한 계획, 즉 자비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나가는 역사, 그런 꿈을 가진다는 것은 가슴뛰게 멋진 일이기도, 꿈만 같은 일이기도 합니다.
툴쿠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이었어요. 아니 오히려 우리의 민주주의 선거제도에 대해서 다시...
'여론'이라는 것의 표본 크기도 그렇고, 거대 정당과 라인과 파벌과 계급적 이해관계는 정치 지도자를 훨씬 경직되고 형편없게 만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영적 에너지가 환생한다는 이 관점과 합리성은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채운샘 강의를 통해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단순히 정치적으로 환원하려는 근대적 관점을 저도 역시 답습하고 있음을 확인했네요. 어떤 방식으로 사건을 겪을 것인가...그 방향성을 제시하는 현 달라이라마의 역사적 관점을 존중하며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습니다^^::
불소행찬에서는 음식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저도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쾌락과 번민이 가장 요동치고 있거든요. 저만의 실천윤리는 늘 고민 중입니다.
글구 윤순샘 얼떨결에 후기 맡게 되어 많이 당황하셨죠 ㅎㅎ 잘 읽었구요. 고생하셨습니당~~
같이 소리 내어 읽고 듣는 즐거움에 대해 동감입니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경험인 것 같아요^^ 우린 너무 머리만 쓰고 살아요 그 머리도 자기 생각대로만 쓰면서 말이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