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학파의 인식론--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분별하느냐는 우리가 그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방식으로 대면하고 살아가는지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토아학파가 세계를 분별하고 인식하는 방식은 이전 시대의 철학자들과 비교해보면 더 분명해집니다. 플라톤에게 물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copy의 세계일 뿐입니다.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세계. 물론 이런 세계는 모방한 것보다도 못한 판타지, 환영의 세계보다는 우위에 있지만 열등한 세계일 뿐입니다. 단순히 copy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질의 세계란 형상을 본떠서 존재하는 세계일 뿐입니다. 물체와 비물체 사이에 명확한 분할선과 위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둘 모두에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에 反해서 물체와 비물체의 관계를 보는 학파가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입니다. 물체의 세계를 관념에 의해 근거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물론자로 불리는 이 두 학파는 물체적인 세계가 그 자체 메커니즘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스토아학파는 물체적인 세계가 발생적 측면에서 원인이 되어서 비물체적인 세계에 의미가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인식이 발생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끊임없이 작용을 가하고 받는 능동과 수동의 세계인 물체적인 차원에 의해서입니다. 그러나 비물체적인 세계는 물체적인 것들과 일대일로 대응되거나 그것을 지시하는 세계가 아니라, 그 자체의 메커니즘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서 발생하는 것이 의미이자 표현 · 효과이고, 이 지점이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의 독특함이기도 합니다. 스토아학파의 인식론은 물체적인 것이 불러일으키는 감각표상을 바탕으로 인식이 구성된다는 일종의 자기인식으로 설명됩니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원자의 해체와 결합으로 구성되는 이 세계는 선악이 없는 무관한 세계입니다. 문제는 이런 세계를 표상화하는 데서 일어납니다. 표상이 분명 세계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표상과 세계를 동일시하고 붙잡는 데서 문제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스토아학파는 이러한 에피쿠로스에서 더 나아갑니다. 물체적인 세계를 원인으로 하여 발생하는 일차적인 표상만을 문제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세계가 의미화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표면효과로서 의미가 발생하는 이 지점에 주목한 들뢰즈는 의미를 사건의 차원과 연관해서 사유합니다.
세계에 선악이 없듯이 존재하는 모든 사건들은 비인칭적입니다. 일어난 사건은 그 자체로 불교의 관점처럼 ‘무기성’인데 그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서 다르게 의미화되어 집니다. 어떤 사건도 원래 그러한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석한 대로 존재합니다. 사건은 표현되는 기호이자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 개념은 현재만 존재하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간성을 만들어냅니다. 우리가 겪는 시간을 어떻게 의미화하고 어떤 것들과 계열화하느냐에 따라서 현재는 다르게 해석되고 그렇게 해석된 현재는 과거와 미래와 다른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현재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 미래가 변환되는 생성의 시간인 아이온의 세계로서 말입니다. 의미화와 함께 매 순간 전환되는 생성의 시간을 산다는 것은 삶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깊이 연관되며, 삶에 대한 긍정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스토아학파의 이런 인식론 나아가 윤리론은 사실 회의주의자와 비교해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회의주의자는 의미의 구성을 표상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 표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기준으로 진리를 판단할 수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상식적 차원에서 판단하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판단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게 됩니다. ‘에포케’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스토아학파는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윤리는 어디서 나와야 되는 것인가? 우리의 사유 역량이 표상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합니다. 진리를 판단할 기준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katalepsis’ 혹은 ‘kataleptike phantasia’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탈렙시스는 영어의 apprehension 곧 손으로 움켜쥐는 이해, 파악한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뭔가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손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앎은 수중에 있다’는 표현은 손을 움켜쥐듯이 앎이란 바로 손안에 있는 것이며 언제든 펼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의 기준을 주먹 단계로 보는 제논이 있다면, 크리쉬포스는 사물이 우리 신체에 남긴 흔적, 인상 단계를 그 기준으로 봅니다. 외부에 실재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 도장을 찍듯이 각인되어 파악할 수 있는 ‘인상’이 옳은 것이냐 아니면 환각적인 것이냐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대해 이성이 ‘동의’를 하는 정신의 과정을 거쳐 우리는 이해를 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감각표상을 평가하고 판단 동의하는 진리의 기준이 되는 ‘카탈렙시스’는 그렇다고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훈련과 기술습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인식을 형성할 수 있는 재료가 되는 ‘phantasia’(표상, 인상)와 ‘phantasma’(허상, 환영)은 구분해야 합니다.
진리의 기준이 성립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다 잘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갖는 것이자, 어떻게 잘 살 것인가 라는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에게 대한 실질적인 고민으로 이어지는 것이죠.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의 적합성과 유용성을 이해하는 것이자 동시에 그 참에 가깝게 가고자 하는 의식의 지향성(kathekon)을 낳게 됩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강제적 의무가 아닌 욕망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의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참된 것을 이해한다면 그것에 동의하고 싶고 자신의 삶을 가능한 한 그것에 일치하고자 하는 마음의 지향성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욕락’, 바라고 추구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죠. 외부가치에 종속된 복종이 아니라 바른 이해에 기반한 자발적 복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인식과 그것에 일치하려는 마음의 경향성과 행위의 의무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꾸준한 훈련과 습득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후대 로마 후학들이 실천해온 훈련의 과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문제는 감각표상이 아니라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믿음과 판단의 체계에 있음을 이해하는 ‘사물 그 자체의 인식’(식별력의 훈련)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이 두렵다는 우리의 믿음이 두려운 것이듯, 우리가 갖는 최초의 감각표상에 붙들리지 않도록 그것이 인상일 뿐임을 알고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지 않기 위한 노력입니다. 둘째, ‘우주적 관점’으로서 끊임없는 생성의 원리 속에서 존재를 사유하고 받아들이는 자아확대의 훈련이 있습니다. 셋째, ‘위로부터의 시선-탈세속화의 훈련’, 겪고 있는 것을 자신의 시공간의 범주를 넘어서서 다양한 관점, 전체적인 시각으로부터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양의 고대철학이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며 인식을 구성하고 윤리를 실천하기 위해 도출한 훈련과 습득의 과정은 불교의 수행과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
‘고집멸도’-무엇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
사성제 사성제 말로만 떠들었지 하나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았던 이 개념을, ‘고집멸도’ 이렇게 네 단계로 끊임없이 분별해보았던 그동안의 과제가 얼마나 유용하고 중요한 작업이었던지... 불량학생으로서 부끄럽지만 이제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자신의 ‘고’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것만 해도 훌륭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대부분 괴롭기는 하지만 무엇이 정확하게 자신의 번뇌인지 무엇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날을 세우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괴롭기에 더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를 바로 캐치할 수 있다면 일단 한 단계는 통과한 것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집’을 바로 안다면 절반의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새삼 중요하게 와닿는 부분이 이 고와 집의 관계성입니다. 한마디로 인과관계. 서양철학을 공부하든 동양철학을 공부하든 우리가 하는 공부의 중요개념이 이 인과관계가 아니었겠습니까.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단지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개념을 익혀왔던 것이지요. 저도 상호인과니 원인과 결과의 동시성이니, 구조적 인과성이니 등 인과관계에 대해 배워왔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일상에서 인과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시켜 왔는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괴로워하는 지점의 원인만 제대로 짚어도 이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 같다는 자각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이 말은 제가 헛다리를 계속 짚고 있었다는 자각이기도 합니다. 고통의 원인을 전혀 다른 데서 찾고 있었으니 그 해결책과 실천방안이 영 엉뚱한 곳에서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겠지요. 항상 ‘멸도’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우리의 모습은 ‘고집’의 인과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와 미숙함의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결과로서의 ‘고’와 원인으로서 ‘집’의 관계를 바르게 앎으로써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릴지를 명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바로 사성제라는 스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이런 명료한 분별은 멸도를 적합하고 유용하게 이끌어내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길을 실천하는 ‘도’가 그 원인이 되어서 ‘멸’할 수 있는 방법인 결과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쭙잖은 공감은 백해무익한 것이지만 어쩌면 도반들이 내놓는 ‘고’ 중에 우리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이럴 땐 왜 이리 공감이 저절로 되는지. 새로운 문명과 기술에 적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것도, 남의 비난과 지적이 나를 향한 해하는 마음으로 읽혀서 화가 나는 것도, 나의 언어 나의 앎이 있다는 전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글쓰기의 어려움과 힘듦을 수시로 토로하는 것도, 가족관계에서 일어나는 번뇌에 허덕이는 것도, 내 문제가 아닌 것이 없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공감하고 서로 위로해준다고 해서 우리의 번뇌가 해결되는 것이 아님도 실은 알고 있습니다. ‘고’의 원인이 뭔지 깊이 따져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 근거를 경전과 여러 분야에서 찾아보며 주변 사람들도 둘러보고 자신의 경험도 다시 유추해보며 ‘대치’, 해결방안을 찾습니다. 노력하지 않은 채 결과를 바라는 탐심을 대치해서 주는 마음, 보시를 행하는 것을 사유해보고, 대상을 향한 분을 대치하기 위해 화를 내는 자신을 알아차리거나, 내가 상대방은 될 수 없더라도 나도 저런 조건이면 저렇게 할 수 있겠다고 입장을 바꿔보거나, 생주멸의 관점에서 화 또한 영원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을 사찰해보는 대치를 배워갑니다.
스님이 비유하신 것처럼 커다란 파도를 그대로 맞으면 바로 물에 빠지거나 많이 다치겠지만 그 파도를 작게 부서서 맞으면 견딜 만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번뇌를 조각조각 분해해서 헤아려보면 그렇게 뭉뚱그려져서 답답하기만 했던 것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면 아니 생각보다 별 게 아니었네 하며 만만하게 여겨지는 여유가 생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낱낱이 분별해보고 그 분별한 조각들을 인연조건과 업보와의 관계 속에서 다시 사유해보면 어찌해야 할지가 명확해지겠지요. 스토아학파의 훈련과정처럼 자신의 부분적이고 부적합한 믿음과 판단의 체계에서 벗어나서 전체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대면하고 사유해보면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치를 행하는 용기를 갖게 되고, 비로소 한 발자국을 떼는 것, 그것이 바로 사성제의 길(道)이 아닐까요.
18불공법(不共法)--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번 시간에 했던 ‘십지(十智)’는 지금 여기 세속에 있는 우리가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설명해주는 개념입니다. 이번 시간에 배운 18불공법(不共法)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부에서 말하는 것처럼 진짜를 가리는 것이 속제입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진짜인데 그것을 보지 못하게 가리는 것이 속제이기에 이 속제의 자리를 벗어나서 원래 있는 그대로의 자리, 근본을 볼 때 智를 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저절로 터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유부에서 말하는 십지의 ‘智’는 기술을 익혀서 터득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본, 참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갈고 닦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런 智를 열 가지로 분별한 것이 ‘十智’인 것입니다. 그런 십지가 어떤 공덕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 부처님만이 가지신 공덕인 ‘18불공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만이 가지신 공덕인데 우리랑 무슨 상관? 이라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유부에서는 번뇌가 없는 선정(無諍)을 세속지로도 성취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나와는 상관없는 먼 길이라고 치부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부처님만의 공덕인가를 이해하고, 부처님처럼 깨닫고 행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세속지를 사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불공법에는 ‘10력’과 ‘4무외’와 ‘3념주’와 ‘大悲’가 속합니다. 그중에서 10力은 산스크리트어로 bala로 크다는 뜻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같습니다. 첫째 처비처지력, 둘째 업이숙지력, 셋째 정려·해탈·등지·등지지력, 넷째 근상하지력, 다섯째 종종승해지력, 여섯째 종종계지력, 일곱째 변취행지력, 여덟째 숙주수념지력, 아홉째 사생지력, 열째 누진지력이 해당됩니다. 이러한 10력은 부처님이 가지신 공덕이시지만 우리가 갖추어야 할 역량이기도 합니다. ‘처비처지력’처럼 깨달음의 길에 어울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바르게 아는 힘은 우리를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살아가는 데 힘이 드는 것은 사실 원인이 없는 데서 결과를 바라거나 잘못된 인과관계를 상정한 채로 결과를 기대하는 우리의 무지 때문이 아닐까요. 부처님처럼 깨달음의 모든 길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힘은 없을지라도 어떤 것이 나에게 이롭고 해로운 것인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길은 분명 세속지에서도 가능합니다. 이런 10력이 ‘남섬부주에서 태어난 남성의 佛身’에 의지하여 일어난다는 경전의 말씀은 ‘근’에 대한 바른 이해 속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남근과 여근이 단지 생리학적 성이라는 표상 속에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지키려는 힘과 나아가려는 힘으로 의미화될 때, 경전에서 말씀하시는 의미를 적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가 갖추고자 하는 힘과 공덕이란 계를 지키는 마음처럼 정지와 정념을 갖춘 끊임없는 수행의 과정 곧 정진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도 쉽게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달라이라마의 말씀처럼 ‘Art of happiness’로 정의되는 불교의 길은 수행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뭘 취하고 버릴지를 명확하게 분별하고 해야 할 바를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고, 몸과 마음에 근육이 붙어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저절로 될 때까지 계속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초심자인 저 같은 경우 마음을 다치지 않게, 정진의 반대말인 지침이 일어나지 않게 마음을 살피면서 가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이 깊이 남습니다. 나를 길들이는 것, 전에도 이 말씀이 제게는 참 새롭게 다가왔었는데요. 숨쉬는 것처럼 쉬운 것을 하라는 말씀도 그렇고, 내가 하는 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보상으로서 꿀을 발라주는 것도, 선업으로 돌리는 방편인 악작과 수희찬탄을 대치로 활용하는 것도 제게는 새롭습니다. 思를 어떻게 조작할 것인가, 마음을 어떻게 일으킬 것인가, 나를 어떻게 길들일 것인가의 문제가 수행의 문제입니다. 그런 수행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기에 구사론은 더없이 보배로운 경전이라는 생각이 다시금 들고 있습니다.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배운 것을 자신의 삶과 연관하여 발전된 사유를 하시는 샘의 건강한 모습에 많이 배움니다.
수희찬탄합니다
여기도 수희찬탄이요~
이토록 밀도있게 수업을 정리해 주시다니!!! 후기를 읽는데 현정샘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는 줄.... ^^
그나저나 고와 집의 인과관계를 면밀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매번 느끼지만, 왜 늘상 주저리 주저리 변죽만 울리는 걸까요. 어흑.
현정샘이 지적하신대로 고-집에서 헛다리를 짚고 있으면 해결책과 실천 방안도 엉뚱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마음의 산만한 잉여를 거두어 내면 핵심이 무엇인지 보일랑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