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팀에는 매주 써와야 하는 공통과제를 해오지 않으면 그 날 모든 도반들의 글에 대해서 코멘트를 해야 하는 벌칙 아닌 벌칙의 전통(?)이 있습니다. 올해는 조도 나뉘고 그래서 그닥 해당 사항이 없었는데... 지난 시간 스님께서 갑자기 과제 안 해오신 분들 누구냐며 정신 번쩍 나게 호명을 하셨죠. 그리하여 무려 세 분이 뒤쪽 무대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의 과제를 가지고 그 글의 논리적 인과가 맞는지, 어떤 대치법을 쓰면 좋을지 꼼꼼하게 질문과 대답을 시키셨습니다. 저희끼리 조를 나누어 오순도순 토론을 하다가, 전체 앞에서 스님의 질문을 따라 도반들의 글을 다시 보니 이게 또 다르더군요.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번뇌가 무엇인지, 원인과의 논리적 인과가 타당한지, 해결로 제시된 방법이 유의미한지... 핑퐁핑퐁 질문과 답을 따라가다 보니 신기하게도 문제 지점들이 더 선명해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무대에 앉으셨던 세 분 도반들께서도 갑작스런 스님의 집중훈련에 뭔가 나름의 공부가 되셨을 것 같고요. ㅎ
문득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께서 숙제 안 해온 아이들에게 손들고 있으라는 벌 대신 이런 식으로 공부를 시켜주시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결국 공부란 공부하는 자신뿐 아니라 그 공부로써 세상에 이로움을 주기 위함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어떤 약속과 기대를 저버린 상대에 대해서도 바로 화를 낼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이 약속을 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피면 화낼 일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시간 10지(智)에 대해 배웠고 이번 시간엔 이렇게 지혜를 통해 성취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지혜로 얻게 되는 일차적인 이로움은 번뇌를 없애는 것이겠지만 이외에도 여러 공덕을 성취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혜를 통해 얻는 공덕이 붓다와 다른 깨달은 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붓다만이 성취하는 공덕은 18가지로 다른 이들과 공통되지 않는다고 해서 "18 불공법(不共法)"이라고 하고 공통되는 것은 "공법(共法)"이라고 했습니다. 18 불공법은 10력(力) + 4무외(無畏) + 3념주(3念住) + 대비(大悲)를 더해서 18가지가 되네요. 이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저는 이 중에서도 10력의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이 기억에 남습니다.
말이 길어서 복잡해 보이지만 찬찬히 나누어 보면 의미가 그 안에 다 들어있네요. 종종(種種)이란 각각의 중생을 말하고 승해(勝解)란 각각의 중생이 원하는 바에 맞는 것을 의미하며 지력(智力)은 말 그대로 그것을 아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중생이 원하는 바를 잘 파악해서 그에 맞는 것을 줌으로써 해탈의 길로 이끌 수 있는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좋은 걸 타인에게도 좋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곤 합니다. 매우 자기중심적이죠. 그러나 우리는 각자 바라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주면 이것이 상대에게는 자칫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그것을 줄 수 있을 때만이 그 사람을 돕는 일이 됩니다. 아무리 내게 좋은 의도, 선심(善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상대의 원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바른 전법이 되기 힘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죠. 지혜의 힘(智力)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려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섬세하게 관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비는 당연하겠고요.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는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이란 것도 있었죠. 이건 각각의 중생의 (種種) 마음이 어느 상태(界)에 속해있나를 알고 그에 맞게 이끌어야 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계(界)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의미한다고도 해요. 그러니까 가령 색계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욕계의 물질적인 것들에 전혀 마음이 동요되지 않습니다. 오직 선정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상태죠. 붓다의 경지가 되면 각각 다른 마음의 상태에 있는 중생을 그에 맞는 방편으로 이끌어 해탈의 길로 갈 수 있는 가르침을 주신다는 겁니다. 저는 욕계의 상태에 출렁이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계지력이 따로 필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이런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과 이런 힘이 필요한 대상들이 나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갈 길이 멀고도 먼 자신의 위치를 겸손하게 알게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무엇보다도 이번 시간 가장 기억에 남는 가르침은 깨달음의 가장 큰 장애란 원인 없이 결과를 바라는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큰 결과는 바라면서 그에 적합한 노력 등등의 조건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건 어리석은 욕심만 부리고 있는 셈이니까요. 원하는 결과를 이룰 수 있는 원인과 조건은 무엇일까.... 이걸 살피는 것에서 공부와 수행의 첫걸음이 시작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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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감각을 경험하고 그것이 이렇다 저렇다라는 생각과 판단을 내립니다. 이때 기준은 우리 자신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믿음과 판단의 체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회로가 고착화되면 내가 일으킨 표상을 세상과 동일시하고 그것만을 고집하는 ‘꼰대’로 전락하는 거겠죠.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이런 사람을 ‘어리석은 바보’라고 했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도 꼰대가 되지 않고 바보에서 벗어나기 위함일 텐데 어찌하면 좋을까요. 스토아의 처방은 바보가 아닌 현자가 되려면 열심히 인식론적인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보와 달리 현자는 감각 표상으로부터 어떤 것을 파악하고 판단 내릴 때 특별한 정신적 과정을 거칩니다. 바로 ‘동의’라는 것입니다. 동의란 어떤 것을 감각하고 인식할 때 이것이 제대로 된 조건 속에서 파악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지금 잠시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산란해서 저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조건들 때문에 저렇게 보이는 것인지 따져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의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감각에 이런저런 표상을 갖다 붙이기 전에 스스로 이것이 정말 그러한가? 라고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여여하게 바라보기를 위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토아는 진리가 아닌 허위 인상에 붙잡히는 것은 비정상적 마음의 상태일 때라고 합니다. 반대로 진리의 기준이 되는 지적 인상은 평정한 마음 상태에서 가능하다고 했고요. 평정한 마음 상태란 평정심을 말하는데 스토아가 말하는 평정심이란 대상의 좋고 나쁨을 의미화하기 전에 이 우주 자체에는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는 인식의 상태를 지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좋아함과 싫어함의 분별을 벗어난 평등심과 매우 유사하게 들리지만 아직 스토아를 깊이 이해한 것이 아니라서 섣부른 비교는 자제하는 것으로. ^^;;
스토아에게 어떤 것이 ‘참’임을 알았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우주적 법칙과 일치함과 동시에 그렇게 아는 것이 내 삶에도 적합하고 유용함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내게 유용하고 이롭다는 것을 알면 마음은 그 방향을 지향하게 된다고 했어요. 저는 이 부분이 흥미로웠는데 어떤 것이 참되다는 것을 인식하면 자연스럽게 그 참됨에 동의하고 싶은 마음의 지향성 (카테콘)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지향성은 ‘의무’라고 번역이 된다는데,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스토아에게 의무란 우리가 생각하던 의무와는 아주 차원이 다릅니다. 여기서 의무란 나의 욕망을 누르고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하는 강제가 아니라, 참된 인식이라는 기반에 의해 기꺼이 그 참됨에 닿으려는 의식의 지향성이 되는 겁니다. 욕망과 의무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의무를 따르게 되는 것이죠. 아, 이럴 수만 있다면 무거운 의무감에서 벗어나 마음이 늘 유쾌할 것 같네요. ^^
그러나 감각 표상으로부터 참됨을 인식하는 과정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기존의 믿음과 판단의 체계로부터 벗어나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하는 훈련, 우주는 생성 변화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협소한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전체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위로부터의 시선을 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어요. 진리에 닿을 수 있는 마음의 평정심은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진실로 참임을 알면 저희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이리로 지향하게 되겠죠?!
*** <불교 철학> 10월 26일 6주차 수업 공지입니다. ***
- <아비달마구사로 4> 1266-1339쪽까지 읽어옵니다. 7주차의 ‘파아집품’이 마지막이니 이제 구사론을 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 이번 주 공통과제는 3주 뒤에 있을 에세이를 준비하며 첫 번째 초안을 써오시는 겁니다. 무엇을 주제로 쓰고 싶은지 생각을 정리해오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에세이 주제는 그동안 공부해온 구사론의 내용 중 새롭게 알게 된 개념을 중심으로 글을 써보는 것인데요, 구사론 전체가 범위인 만큼 1학기부터 배운 내용을 되짚어 보며 주제를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3주간은 도반들과 함께 차근차근 에세이를 준비하는 과정으로 잘 마무리 해보아요~
- 간식과 청소는 기웅샘과 현화샘, 후기는 길례샘이시네요.
수요일에 뵐께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