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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께서 비유하신 대로 물이 쭈욱 빠지는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해온 구사론 공부가 이제 끝을 향하고 있습니다. 구사론의 별책부록이라고 하는 마지막 <파집아품(破執我品)>만 남겨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 구사론 본문은 이번에 읽은 정품(定品)을 마지막으로 전부 끝낸 것이라고 하네요. 미처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구사론을 다 끝내서 수희찬탄한다는 스님의 말씀에 저희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죠. 3월부터 물을 준 콩나물이 얼마나 자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행히 아직 썩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앞으로 쬐금 자랄 가능성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 이제 겨우 한 번 훑어본 것뿐이지만 구사론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얼추 감을 잡았으니 두고두고 계속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동안 읽은 경전과 논서로 지식의 탑만 쌓아가는 게 아니라 이 소중한 가르침들을 매일 조금씩 마음에 새기며 마음 안에 지혜의 사용과(士用果)를 길러야겠다는 다짐이 듭니다. ㅎ
지난 시간에 오직 부처님만이 지니시는 18가지 공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지니시는 또다른 공덕 중에는 아라한도 성취할 수 있는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무쟁(無諍), 원지(願智), 4무애해(無礙解) 등이 그것인데요, 그중에서도 무쟁(無諍)이 기억에 남습니다. 무쟁은 글자를 풀면 ‘투쟁이 없다’는 뜻인데 자신으로 인해 다른 존재들이 탐, 진등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어떤 존재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다른 이에게 번뇌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니 생각할수록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경전에도 부처님을 논쟁으로 꺾어버리겠다며 덤벼오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부처님으로부터 풍겨나오는 어떤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을 푸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물론 논쟁은 끝까지 하지만 부처님께 승복하고 말지요.) 아마도 이런 것이 어떤 평화로운 에너지장을 형성하는 무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무쟁의 힘이 부처님뿐 아니라 선정에 든 성문 연각에게도 가능하다는 것이고요. 우리는 멋지고 훌륭한 사람을 보면 감탄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탐(貪)을 일으키기도 하고 질(嫉)을 일으키기도 하죠. 그런데 상대에게 어떠한 부정적인 마음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그런 존재성을 성취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암튼 불교는 유정이 발휘할 수 있는 긍정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 놓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의 공덕에는 일반인(범부)도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호, 뭔가 희망적이죠. ^^ 6신통, 4정려, 4무색정, 8등지, 3등지, 4무량, 8해탈, 8승처, 10변처등 아주 많은데, 이들 대부분은 선정을 통해 성취되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선정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산란하지 않는 상태로써 지혜를 일으키는 토대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점차 거칠고 미세한 번뇌들로부터 순화되어 가는 상태죠. 선정의 단계와 각각의 이득이 무엇인지도 배웠는데요. 범부인 저희들도 마음을 길들이는 명상 훈련을 통해 이런 선정의 단계를 차근차근 이루어갈 수 있다는 것이 저는 무척 희망적이었습니다. 저희가 노력해서 닿을 수 있는 부처님의 공덕이 있다는 게 놀랍고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_^
스님께서는 구사론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게송을 짚어주시며 이 게송에 구사론의 핵심이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마지막 게송을 풀어내면 이런 내용이었죠. “부처님의 정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경율론 삼장의 가르침인 ‘교법’과 37조도품의 수행인 ‘증법’이 그것이다. 교법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에 맞게 올바르게 말함으로써 바르게 지녀야 하고, 증법은 37 조도품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수행함으로써 바르게 지니는 것이다. 오직 이것뿐이다.”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말하고 그리고 가르침을 제대로 수행함으로써 체험하는 것. 참으로 단순한 것 같지만 깊이는 무량한 이 말씀을 길잡이 삼아 저희의 구사론 공부가 오래도록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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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스토아 학파를 이룬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었다고 합니다. 먼 곳에서 와서 정착한 이방인이라면 기존 폴리스(polis)에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신분, 혈통, 나이... 이런 것들을 그닥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겠죠. 폴리스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폴리스라는 공동체 안에서 의무를 다하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좋은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의미의 삶이 좋은 삶이라고 주장했었습니다. “폴리스적 삶을 살지 않는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의 틀을 박탈당한 것”이라고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기반은 폴리스였지만 사실 이 폴리스의 구성원이란 것도 전체 아테네인이 아니라 사농공상을 제외한 ‘시민’, 다시말해 특정 자유인 남성에 국한되었습니다. 반면헬레니즘 시대에는 이런 분위기에 이탈과 저항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죠.
스토아에 앞서 에피쿠로스 학파는 전통적인 폴리스가 아닌 폴리스 외부에 "케포스(kepos, 정원)"라고 불리는 곳에서 우정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적 실험을 해나갔습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적 관계보다 우정의 관계였고요. 이들에게 있어 우정이란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철학과 그에 맞는 실천을 공유할 수 있는 자들 사이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성별과 신분등이 상관없었죠. 잠시 비켜나가는 얘기지만 문득 21세기를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우정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에 비추어본다면 당시에는 파격적이었을 성과 신분, 나이, 출신 정도는 우정을 형성하는데 지금으로선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삶의 철학과 실천의 공유’라는 지점에서는 그 범위가 무척 제한적이 되네요. 너무나 익숙한 단어였던 우정이란 말이 저는 요즘 낯설게 느껴집니다.
스토아는 어땠을까요. 스토아 학파는 기존의 폴리스에서 이미 주어진 것들과 무관하게 스토아적 삶의 양식을 살고자 노력하고 구현하는 자라면 모두 스토아의 폴리스 안에 있는 자라는 대안적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공간적, 정치적으로 제한되었던 폴리스의 개념을 확 열어버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라도 스토아적 삶을 산다고 하면 모두 같은 폴리스의 시민으로서 세계적 연대 의식을 가진다는 겁니다.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정치적인 것보다도 ‘윤리’였던 거죠. 하여 스토아는 전통적 폴리스를 넘어서 ‘코스모폴리스’ ‘코스모폴리테스’를 말합니다.
스토아에서는 이런 비유를 합니다. 자신이 그려내는 원이 있고, 자신의 주변에 진동하는 가족, 친족, 사회체의 원들이 있으며... 그리고 더 크게 나아가면 전 인류의 원이 있다고요. 훌륭한 영혼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각각의 원들과 제대로 소통해야 하고, 더 멀리 있는 원들의 사람을 가까운 원에 있는 것처럼, 가까운 원에 있는 사람을 멀리 있는 원과 다르지 않게 모두 귀중히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발적 노력을 통해 각 인격체에 대한 관계의 거리를 좁힐 수 있으면 규범적 척도에 도달한다’고 했고요. 불교의 자비 수행에서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한 자비의 동심원을 가까운 주변으로 확장하고 점차 멀리 나아가 전 존재로 향하게 하는데 이 부분에서 일부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샘께선 스토아의 마음을 일종의 ‘겸애(兼愛)’라고 하셨는데, 자비의 동심원들도 모든 존재를 평등하고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스토아의 원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샘께서 강의안에 인용해주신 휴고의 사유에도 닿아 있고요.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연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은 이미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연약한 사람은 세상 단 한 곳에 자신의 사랑을 고정시켰고, 강한 사람은 그의 사랑을 모든 곳에 펼쳤으며, 완전한 사랑은 그의 사랑 자체를 없애버렸다.” (성 빅토르의 휴고)
*** <불교 철학> 11월 2일, 7회 수업 공지입니다 ***
- <아비달마 구사론>을 읽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저희가 드디어 ‘파집아품’을 읽을 차례가 되었네요! 1340-1397쪽을 읽어오시면 되고요, 공통과제는 각자의 에세이 준비 과정에서 써오시는 것으로.
- 간식, 청소는 현정샘과 태미샘, 후기는 혜윤샘입니다.
11월에 뵐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