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대철학사-스토아학파의 윤리학2
로마시대 철학의 특징
로마시대의 스토아철학은 한마디로 실용적 현실적이다. 그리스시대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논리학과 자연학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헬레니즘 시대를 거쳐 로마시대에 이르면, 현실에 기반한 철저히 실용주의적 윤리학으로 스토아철학은 자리매김하게 된다. 지금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지혜, 그래서 교육방법은 편지와 대화, 명상과 걷기 같은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이 주였다. 스토아 후기철학의 대표적 철학자로는 세네카 키케로 아우렐리우스 에피테토스가 있다.
영혼의 훈련
스토아의 주된 훈련 방식은 무지의 수정이다.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에 집착하기 때문에 무지하다. 그렇다고 그런 인간의 지각과 감각작용을 스토아학파는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지각과 감각을 특정한 표상과 연관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연)은 인간이 전체 속에서 사유하고 행위할 능력을 주었다. 이성을 가지고 감각 지각을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인간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때 우리는 자연과 합치된 삶을 살게 되며,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게 된다.
영혼의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믿음,충동,욕구,혐오)과 달려 있지 않은 것(육체, 재산, 평판, 지위)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은 그 사건을 해석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을 사유하는 것이 스토아의 윤리적 관점이다. 다르게 욕망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윤리적 훈련
스토아학파에서는 ‘본다’라는 시선의 문제는 중요하다. 앞서 얘기했듯이 전체를 보지 못하는 인간의 무지를 훈련하는 것이 스토아의 윤리 철학의 핵심이다. 전체적 관점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표상에 얽매여 정념의 노예가 된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굽어볼 수 있는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대의 시선도 필요하다. 표상을 점검함에 있어서 대상을 구성요소로 분해하고 분석하여 환원적으로 기술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욕구 혐오, 충동, 동의와 관련된 훈련을 통해 어떤 것도 고정된 가치를 갖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삶의 기예로서의 철학
스토아학파에게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과 달려 있지 않은 것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의 표상을 음미(제대로 보기)하고 검사(따져묻기)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보기(觀하는 훈련)훈련은 자기 조형(변형)이라는 실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런 사유와 일상의 훈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자연의 삶과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인간은 그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아학자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했던 것은 외부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자족적 자기긍정이다. 이것은 자기배려의 문제이기도 했다.
노년, 죽음, 그러나 미루지 말라
스토아학파에서는 유독 노년의 시기를 강조한다. 노년은 욕망과 정념에서 해방되어 철학하기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죽음을 염두하지 않은 삶은 욕망에 휩쓸리기 쉽다. 인간은 지금이라도 죽을 것처럼 모든 것을 두려하지만 언제까지라도 죽지 않을 듯이 모든 것을 열망한다. 그래서 죽음 연습을 매일 자기 전에 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삶의 기예를 닦는 이 철학의 여정을 노년까지 미루지 말고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사론 강의 마지막-파아집품
파아집품이 나오게 된 배경
저자 세친보살님은 29장을 마지막으로 정리를 마쳤는데, 구사론의 마지막 게송인 “마땅히 해탈을 추구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할 것이리라” 라는 구절에서 왜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만 해탈을 추구할 수 있느냐고 범부들은 질문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답이 파아집품인 것이다.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구절은 삼갈 신愼으로 번역하며 불교 용어로 ‘불방일’이라고 한다. 이는 내가 하는 매순간의 마음과 행동이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는지 살피는 마음이다. 파아집품의 원래 이름은 ‘불방일품’이라고 한다. 근데 그 내용이 아집을 타파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서 파아집품이라 불린 것이다.
그럼 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야 하는가? 해탈은 괴로움을 모두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는 먼저 괴롭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할지를 따지는 게 구사론의 목적이기도 하다. 번뇌(유루)가 어디서 줄줄 세어 들어오는지, 금이 가 있는 곳을 찾는 이 작업을 끊임없이 해야만(불방일) 해탈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사론의 또 다른 제목은 “유루와 무루”라고 할 수 있다.
무표업으로서의 계(율의)
부처님시대 수행자가 계를 가졌는지 여부를 겉모습을 보고 알 수 없었다. 표업은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무표업은 무엇을 함에 있어 자기 판단인지 아니면 계가 있는 것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만든 개념이다. 무표업의 대표적인 것이 계이다. 그리고 무표업은 색이어야 한다. 법처의 색이어야 한다. 눈으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법처의 색으로 구분한다. 무표업은 사람의 의도에 의해 선을 행할 뿐이지 눈으로 구분할 수 없다. 율의와 불율의도 무표업에 해당된다. 계는 지키는 마음이다. 지키는 마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장치에 의해서(서약,의식) 확실히 강제하는 것이 율의이다. 삼귀의, 보리심, 자비심계와 같은 계는 내 마음에 울타리를 쳐서 상속하게 하기 위함이다.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이 계이다. 계는 확실히 나를 강제하는 힘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 아는 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들이 있다.
사업은 동기, 원인이다. 계도 여기에 포함된다. 사이업은 신업이나 어업, 함께하는 상응인의 마음이 사이업이다. 행은 업과 구분해야한다. 선인가 불선인가는 동기로 따져야 한다. 경량부 다음부터는 욕계의 마음에서는 행위하는 마음이 어떤지 따진다. 계가 다를 때는 동기를 따져야 한다.
전도망상을 타파하는 파아집품
화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예가 있다. 『안 좋은 말을 했을 때, 상대가 나아지는 면이 보이면, 더 심한 말을 하게 되고, 이제는 습관적으로 심한 말을 하게 된다.』 전도망상의 좋은 예이다. 이런 식으로 인과를 연결하면 불율의가 된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정당성dignity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인과를 잘 따져야 한다. ‘안 좋은 말의 결과’가 아닐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수없이 많다. 까마귀 날짜 배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전도망상을 타파하는 과정이 파아집품의 내용이다.
인식론의 첫 시작-불과 연기의 인과관계
연기가 나는 저 산에
불이 있다는 것은
연기가 나기 때문이다
먼저 관계에는 2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인과관계, 선후관계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본래 하나인 관계, 동시이어야 한다. 본래 하나인 관계는 총상과 별상의 관계이거나 동의어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나는 총상은 사람이지만 별상은 누구의 딸이다. 나는 사람이면서 누구의 딸이기도 하다. 또 무상은 찰나생 찰나멸과 동의어이다. 이처럼 본래 하나인 관계는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동시에 존재하면서 선후인과관계이면 아무관계도 아니다. 관계는 반드시 둘 중에 하나이어야 한다. 관계라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 개념이 없어지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연기가 나는 저‘산’과 ‘불’은 팩트이다. 연기가 나기 때문에 불이 있다는 것은 지나간 경험이지 현재의 사실이 아니다. 연기가 나는 저 산에 불은 이미 지나갔다. 따라서 불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이렇게 타파하는 것이 인식론의 시작이다. 경험의 의해 기억 속에 저장된 불과 연기가 나는 저 산의 불은 다르다. 연기가 나는 산에 불을 총칭하는 총상이라는 불을 가져와서 증명한 것이다. 불이라는 총상을 증명하는 것이지 연기와 불이 동시에 존재하는 걸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외도의 주장이지만, 유부에서는 이를 따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동시에 존재하면서 선후관계가 있으면 아무관계가 아니다. 원인과 결과이면서 동시 존재한다는 것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상응인과 유인은 동시에 존재하지만 인이 아니라고 구사론에서 계속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응인과 구유인은 사용과인데 엄밀히 얘기하면 원인에 놓을 수 없다. 경량부이상에서 상응인, 구유인, 사용과를 얘기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수행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구사론에서는 사용과가 있기 때문에 얘기할 수밖에 없다.
파아집품에서 타파하는 것들
구사론의 주장은“오로지 온의 상속을 가리키는 것을 뿐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아’ 자체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불방일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의 흐름을 이어갈 수 없는 것은 유루가 계속 세면서 그 결과로 괴로움이 생기는데, 그것의 원인이 바로 아집이기 때문에, 해탈을 위해서는 아집을 타파해야하는 것이다. ‘아’를 인정해서는 세는 것, 번뇌를 막을 수가 없다. 나와 온은 본래 하나가 아니다. 이는 내가 옷을 입고 벗는 것으로 비유된다. 우리는 나는 원래 있고 내가 옷을 입고 벗음으로써 이생과 저생을 오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1.보는 방식으로서의 타파
그럼 색이 그 사람을 규정하는가? 유부에서 색은 쪼개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사람이 색이라면, 사람을 쪼개어도 실유로 남아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경량부의 실유는 콕 집어서 ‘이것이다’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면서 본래로 하나인 관계이어야 한다. 만약 눈동자와 사람이 하나라면 눈동자가 없으면 사람도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럼 가유인가? 가유는 우유의 예를 들고 있다. 우유를 끓이면 요구르트와 물로 나뉠 수 있다. 만약 가유라면, 우유안에 요구르트와 물이 될 부분이 같이 있고 요구르트를 유제품이라고 이름붙이는데, 네가 생각하는 총상으로서의 유제품인 요구르트는, 요구르트의 원인인 우유와 다르다. 이는 총상을 얘기하는 것이며 그것의 원인이기 때문에 가유로 존재하는 것도 맞지 않다.
2.원인의 방식으로서의 타파
그럼 스쳐지나가는 흔적(유집수)인가? 우리는 스쳐지나온 이력들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보는 대상에 어떻게 이름 지을까. 소연이라는 것은 대상을 상대해서 떠올리는 것이다. 바로 앞에 있는 사물이 아니라 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원인과 조건은 선행된 것이다. 불과 연기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선행된 이력에 의해 ‘나’라고 하는 것은 나의 이력이며 인과관계이고, 나와 오온은 동시존재하기 때문에 ‘나’라고 할 수 없다. 그럼 오온 전체를 나라고 할 수 있는가. 오온을 의지해서 나를 떠올리는 것인데, ‘불이 나무를 태운다’라고 했을 때, ‘불은 태우는 것이고, 나무는 타는 것’이다. 불이 나무를 어떻게 태워질 수 있는가. 불과 동시에 존재하는 나무가 태워지는 것인가. 아니면 불이 선행해서 나무가 태워지는 것인가. 이에 나무 안에 불의 기운(따뜻함이)이 있어, 원인인 불에 의해서, 나무 안에 불의 원소의 기운이 커져서 타는 것이라고 답한다. 오온을 원인으로 해서 오온의 본래 모습인 것에 ‘나’를 붙인 것이다. 이는 동시에 존재하며 인과관계면 아무 관계가 아닌 것과 같다. 오온과 나는 반드시 인과관계가 아니어야 한다. 나는 나의 오온을 의지해서 이름 붙여진 ‘발생한 이’일 뿐이다.
3.총상과 별상으로 따지는 것으로서의 타파
그럼 나는 계속 존재하는데 왜 찰나멸한다고 하는가? 외도들은 기억이 유지되는 한 나는 찰나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별은 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있다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별이 항상하지는 않다. 별은 이미 발생한 것이고 우리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 인식할 수 없다. 부처님의 일체종지(지혜법신)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세세생생 이어지는 흐름 속에 있지만, 내가 발생했다는 것은 멸하는 것이고, 찰나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흐름 자체가 무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언제 발생했는지 모를 내가 있고, 지금의 나(별상)가 있는데, 지금의 나는 단지 오온에 의지해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이번 생의 온을 의지해서 누구의 아들 딸로 이름붙여진 것이다. '나' 라고 하는 것이 총상의 나인지 별상의 나인지 구분해야 한다. 지금의 나를 어디까지 포함할지를 고민해야하며, 원인에 이름을 붙이면 안 된다. 전생과 현생의 나는 습기로 이어진다고 하는 것이라고 경량부이상부터는 말한다. 찰나멸이지만 상속은 이어진다. 총상으로써 나는 무기이다. 선, 불선이 아니지만 얼마든지 선, 불선이 될 수도 있다. 나쁜 생각을 하면 나쁜 사람이다. 이것을 거부하면 안 된다. 우리는 가능하면 좋은 사람의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하며, 이에 필요한 것이 삼가는 것, 지켜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파아집품의 내용이다.
우리는 이름 붙여진 존재이다. 순간 순간 내가 규정되어지는 것이다. 조건에 의해 규정되어질 뿐 확실한 나, 정해진 나는 없다. 이런 조건 속에서 변해갈 수 있는 나를 찾아내는 것이 파아집품의 가르침이다.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은 순간의 나의 생각들이다. 우리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식으로 습을 패턴화한다. 번뇌의 습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살펴보지 않으면 유루, 번뇌가 생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걸 막고자 하는 것이 삼가다, 불방일, 알아차림,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며, 스님들은 '살림을 산다' 라고 표현한다. 마음의 살림살이는 마음을 살리는 것으로, 저절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규모있게 살림을 꾸리는 것처럼, 마음의 살림살이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효암스님의 스승님게서 구사론을 완독한 저희에게 수희찬탄하는 메시지를 멀리 다람살라에서 보내 오셨습니다. 티벳어를 구사하시는 웅장한 목소리와 그 내용의 묵직함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뜻도 모르고 책장만 넘기기만 한 거 같아 맘이 편치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이제까지 저희가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타파할 수 있는 선업을 지은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구사론을 읽은 계기로 경량부 이상의 견해를 꾸준히 배워 나가면 마음의 종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니 앞으로 계속 정진할 것을 당부하시기도 하셨구요. 회향해 주신 스승님과 올 한 해 동안 구사론의 의미를 저희에게 전달하고자 애써주신 효암스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정리해 옮기면서 오류가 많이 발생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이는 효암스님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로 저의 모지람이라는 사실을 아실 거라 믿습니다.^^;; 개인적으로 올 한해 공부를 하면서 새롭게 안 사실은 “내가 사람 말을 이렇게 못 알아듣는구나.”였습니다. 느리지만 꾸준히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담 주에도 역시 책걸이 3탄이 이어 지겠지요ㅎㅎ 담 주에 뵙겠습니다.^^
우와... 엄청나게 꼼꼼하고 정성 가득한 후기 감사합니다~ 혜윤샘 !
저는 수업시간에 이 부분을 놓쳤는데, "우리는 에너지를 절약하는 방식으로 습을 패턴화한다." 라는 부분이요... 요거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반복한다는 것은 새로운 길을 내는 것 보다 에너지를 줄이는 게 맞죠. 저희가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습들이 일종의 에너지 절약 법칙 (? ) 이라면 정말 주의해야 하는 거네요. 번뇌의 습관도 마찬가지라니!!!
번뇌의 습으로 가려는 방향을 거슬러 전환시키는 것이 불방일, 알아차림, 마음 수련 등이란 거죠. 유루에서 무루로~ 구사론의 큰 주제를 다시 한 번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