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들이고, 다른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들이 아니다.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들은 믿음, 충동, 욕구, 혐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반면에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은 육체, 소유물, 평판, 지위,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 자신이 행하지 않는 그러한 모든 일이다. 게다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본성적으로 자유롭고 훼방 받지 않고 방해받지 않지만,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들은 무력하고 노예적이고 방해를 받으며 다른 것들/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본성적으로 노예적인 것들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것에 속하는 것들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장애에 부딪힐 것이고 고통을 당할 것이고 마음이 심란해지고 신들과 인간들을 비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에픽테토스, 채운샘 강의안 中)
지난 수업 시간에 받은 서양철학 프린트를 다시 읽어 보면서 이 구절에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달려있지 않은 것을 구분해서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결핍을 느끼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고 스토아의 현자들은 조언하고 있습니다. 샘께선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태, 사건들을 포함한다고 하셨어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이태원에서 일어났던 그 슬픈 참사도 포함이 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고, 내가 행하지 않았으나 내게 갑자기 다가온 사태, 사건, 참사.... 스토아의 설명에 대입해보면 이 참사 자체는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았던 것이므로 이미 일어난 사건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 개입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면 장애에 부딪히게 되고 대단히 고통스러우며 신과 인간들을 비난하게 되죠. 그러나 지금 저희들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희생자의 가족과 주위의 고통과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이 사태를 바라보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깊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무력함을 느낍니다. 그럼 스토아 현자의 조언을 따르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 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앞서 저는 이 참사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을까, 그렇게 무 자르듯이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과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을 나눌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들었습니다. 불교 구사론에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더라도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데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원인이 된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능작인’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따라서 그 무엇도 어떤 것의 간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하죠. 그런 관점이라면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토아의 현자들에겐 그렇게 전체로 확장될 수 있는 간접 요인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스토아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행위하고 마음을 냄으로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어 우리가 실제로 관여할 수 있는 것들 - 이를테면 판단, 충동, 욕구, 혐오 등 - 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행위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훈련이 되지 않은 대부분의 우리들은 이 참사 앞에서 어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감정적인 충동에 휩쓸려가지 않으면서 특정인에 대한 비난과 분노로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헬레니즘 시대는 전쟁을 겪으며 가혹한 전쟁의 참상에서도 인간이 자신을 지키고 윤리적, 영적 훈련을 통해 삶의 기예를 닦을 수 있는 철학을 시도했다고 배웠습니다.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사물들이 우리를 근심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물들에 대해 품게 되는 판단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경험하는 이 슬픔과 무력감은 어떤 판단에, 어떤 표상에 근거한 것일까요.... 스토아의 훈련대로 이것을 해체해서 보려는 노력부터가 필요한 것일까요.
세네카는 “운명이 우리를 매질한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운명과 싸울수록 우리는 용감해진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가슴을 모질게 매질하는 참사 앞에서 슬픔과 고통과 무력감에 헤매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지혜롭게 해석하여 승화시키기를 시도할 수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인간에겐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자연적으로 주어져 있다는 스토아 현자들의 이야기에 기대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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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론을 진짜로 마쳤습니다. 마지막 파아집품까지 어찌어찌 4권의 책을 마무리한 셈입니다. 열심히 세심하게 읽어낸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용두사미가 되어 뒷부분은 그저 겨우 한 번을 훑는 수준이 되어 부끄럽습니다. 다만 구사론과의 인연을 놓지 않고 계속 가꾸어 가겠다는 다짐 정도를 품고 있다고 할까요. 이런 마음을 멀리 인도에서도 아셨던 건지 스님께서는 다람살라의 큰 스승님께서 저희에게 전달해주신 녹음된 육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정말 깜짝 선물이었어요! 저희가 효암 스님께만 배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효암 스님께 가르침을 전해주신 큰 스승님과도 연결되어 있는 거였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티벳어로 말씀하시는 목소리에 (비록 효암 스님의 통역이 없으면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혜윤 샘께서 수업 내용을 자세하고 친절하게 복기해주셨으니 저는 큰 스승님께서 해주신 귀한 말씀을 요약해서 올립니다. (잘못된 부분은 저의 귀가 둔한 탓이오니 혜량해 주시길.)
“여러분이 구사론을 공부하고 토론했다는 것은 아주 큰 일을 한 것입니다. 구사론의 게송은 세친보살께서 대승으로 전향하시기 전 대승을 폄하하는 마음을 지녔던 것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사론을 공부하면 비록 구사론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더라도 그동안 자신이 지었던 악업을 소멸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동안 여러분께서 구사론을 공부하고 구사론을 바탕으로 토론을 한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선한 마음으로 복을 짓고 업을 소멸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복을 짓는 것은 순리에 맞게 생각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순리에 생각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야 하지요. 무엇이 진리인지 이해하고 진리에 맞게 생각하는 방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계를 지님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이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문(聞)-사(思)-수(修)를 행해야 합니다.
‘문(聞)’이란 구사론을 멀리하지 않고 배우고 토론한 내용을 계속 떠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사(思)’는 그 내용을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지 따져보는 것입니다. ‘수(修)’는 이 배움이 내 일상에 피와 살이 되도록 적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향이 몸에 배이면 몸에서 향이 저절로 나듯이 그렇게 일상 속의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진리의 이치와 하나가 되고 여러분의 모든 것이 복과 하나가 됨으로써 저절로 복을 짓게 됩니다. 계(戒)를 바탕으로 마음을 수호하고, 문사수(聞思修)를 지키는 원인과 조건을 갖추게 되면 그에 따른 좋은 결과가 생겨납니다, 구사론에서 모든 것은 물질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한 것(물질)도 어디에 가지 않고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숙과인 내생에는 다시 공부를 하게 될 때 아주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구사론에서 하나의 행을 하면 세 가지 결과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구사론을 공부해서 좋은 스승과 도반을 만나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은 좋을 결과를 맺어나가는 길입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순리입니다.
구사론을 통해 설일체유부의 견해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경량부, 유식, 중관의 견해까지 공부하며, 죽기 전까지 이렇게 진리에 마음을 두겠다는 다짐으로 공부를 하면 여러분에게 좋은 결과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입니다.
지금까지 1년 동안 공부한 것을 잘 회향하시기 바랍니다.” _()_
*** 불교철학, 4학기 8회차 수업 공지입니다 ***
- <티베트에서의 불교철학 입문> 402-462쪽 중관학파/자립논증학파 일독해 오세요. 공통과제는 에세이 준비 글입니다.
- 간신은 저와 길례샘이 준비할께요. 다음 주 후기는 태미샘,
수요일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