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을 마지막으로 <아비달마 구사론>과 <서양 고대철학> 4학기 과정이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드디어 최종 에세이만을 남겨두고 있네요. 3주간 에세이를 준비했지만 대부분 여전히 헤매고 있던 터라... “아무래도 나 그 주제로는 못 쓸 것 같아.” 흔들리는 눈망울로 말씀하시던 도반도 계셨고, 그간 결석으로 아직 시작도 못했다며 한숨을 내쉬는 분도 계셨습니다. 매번의 에세이는 늘 부담이지만 저희가 배운 것을 한 가지라도 소박하게나마 자신의 언어로 사유하고 글로 써보는 것은 저희를 제 자리에 맴돌게 하지 않고 단 반걸음이라도 전진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다들 아시지요. 지금쯤 각자 자신의 주제와 끙끙 맞짱 뜨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수요일에 그 고민의 결과들을 들고 만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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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서양철학에 대한 4학기에 걸친 강의를 규문 연구실 밖 어디에서 이렇게 공부할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지난 4학기 동안의 수업은 고대 지중해 연안에 살았던 현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풍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채운샘께선 마지막 강의를 서양철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저희가 생각해 볼 두 가지를 짚어주시며 마무리하셨습니다.
먼저 샘께서 짚어주신 점은 철학이란 역사를 거쳐 어떤 사유가 발전, 진화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은 언제나 그 시대 속에서 어떤 것에 시선을 던지고 개념화 함으로써 서로서로 관계하고 작동하는 문제의 장들 속에 있다고 합니다. 저희는 샘을 따라 ‘호메로스’로부터 ‘스토아학파’에 이르기까지 고대 서양 사유의 발자취를 훑어보았죠. 그러나 이 철학의 흐름에는 어떤 하나의 방향성이 내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사유를 보완해서 더 완전한 무엇이 도출되어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든 다양한 철학적 사유들이 서로 경합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죠.
철학을 예술이나 다른 것들과 구분하며 철학이도록 하는 것은 개념 (concept)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개념도 그 자체로 순수한 본질을 지니지 않습니다. 개념이란 그 개념을 구성하도록 하는 여러 문제들의 장(場) 속에서 도출됩니다. 서양철학의 원류이자 서양 고대철학을 자신의 스타일로 종합했다고 하는 플라톤도 역시 그런 문제들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플라톤이 도출해 낸 철학적 사유와 개념들이 있었죠. 이후 서양철학을 플라톤에 대한 주석으로 보든, 플라톤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로 보든, 다양한 철학적 사유들은 그 시대의 수많은 문제들의 장 속에서 철학자가 무엇을 바라보고 문제화시켰는가에 달려있었습니다. 따라서 철학자가 어떤 주장을 했느냐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시대적 맥락 속에서 어떤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들 속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봐야 한다는 것이죠.
지금의 현대 철학에선 어떤 사유 자체의 옳고 그름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려고 한다고 합니다. 가령 “진리가 있다”면 그것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것이죠. 샘께선 이것을 탈구축적 또는 해체적인 방법이라고 설명해주셨는데, 이 부분은 불교와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교에서도 우리가 붙들고 있는 확고한 전제를 끊임없이 분석하고 해체해 나가기를 훈련하니 말입니다.
두 번째는 철학을 환경과 지리의 측면에서 연결시켜 생각해 보라는 점이었습니다. 인간의 사유가 발생하는 데에는 지리적 환경이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땅에서 존재와 세계를 사유하는 방식과 배를 타고 멀리 떠날 수 있는 해안가나, 하늘과 땅 사이에 높은 산과 수목이 무성한 곳에서 인간의 사유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불교의 경우도 광대한 땅이 펼쳐진 중국 대륙에서 받아들인 불교와 히말라야 고원 지대의 티벳 유목민이 발전시켜온 불교, 남방 문화권의 불교는 매우 다릅니다. 당연히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불교가 전파된 맥락이 있지만, 이를 어떻게 계승하고 해석하고 발전시켰느냐는 그 나라의 지리적 특색도 영향을 미쳤겠죠.
그럼 21세기 한국의 대도시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저희는 어떨까요? ㅎㅎ 산과 바다도 있긴 하지만 아파트와 빌딩들, 아스팔트와 자동차와 지하철을 오가며 천만의 인구가 운집한 대도시 안에 살고 있는데 말입니다. 또한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을 횡단하는 거의 모든 지혜에 접속할 수 있는 놀라운 인프라 속에서 저희들은 어떻게 공부의 지도를 그려가며 올바른 철학적 사유를 구축해 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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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사론을 마치고 난 뒤 4학기의 마지막 수업은 불교 학파 중 중관학파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구사론에서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논쟁을 볼 수 있는데, 스님께서는 매 학기의 마지막 시간마다 두 학파를 포함해서 불교의 주요 학파들에 관해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설일체유부-경량부-유식 학파에 이어 이번엔 중관학파를 공부하는 시간이었죠. 중관학파는 진실로 존재하는 법은 아무것도 없으며 지극히 미세한 극미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학파입니다. 중관학파는 자립논증학파와 귀류논증학파로 나뉘는데, 이는 다시 유식 쪽과 연결되느냐 경량부 쪽과 연결되느냐에 따라 더 세부적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작년에 연구실에서 잠깐 짧은 불교 세미나를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불교를 처음 공부하러 오신 분이 계셨는데 당시 읽고 있던 텍스트에 자립-귀류 논증학파가 언급되었거든요. 그걸 보시더니 그분이 놀라서 도망가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거 모르셔도 괜찮다고 겨우 진정시켜드렸지요 ^^;; 그런데 올해 스님께 각 학파의 차이들에 대한 귀동냥을 하며 공부하다 보니 이렇게 학파를 나누어 치열하게 논쟁을 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저희 수준에서 그 쟁점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논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더 정밀하고 오류 없이 이해해 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니까 몰라도 되는 게 아니라 가능하다면 공부를 해나가며 차근차근 따져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요. 가령 인식에 있어서 자기 인식을 인정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식의 외부 대상(外境)은 인정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승의와 세속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깨달음의 길(道)은 어떤 지도로 갈 것인가 등등에서 각 학파의 논지가 다르단 것이죠.
귀류 논증학파는 달라이라마 존자께서 가르치시는 티벳 불교의 핵심입니다. 귀류 논증학파는 무자성론(無自性論)으로써 자상(自己性相)으로 성립한다는 사실을 말(語所)로도 인정하지 않는 학파라고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언어에 의존한 주장은 완전할 수 없으며 근본적으로 난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들은 모든 것이 상호의존하여 가설된 것이라는 논거에 기초하여 그 무엇도 자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격합니다. 모든 것을 다 양극단으로 쳐내어 버리던 <중론>에서 그랬듯이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중관학파에 대한 자료를 직접 자세하게 정리하셔서 프린트로 나누어 주셨는데 도표 안에는 여전히 어려운 개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전히 모르는 와중에도 뭔가 익숙해진 듯한 이 느낌은 뭘까요. 공부의 옅은 습기가 스며든 것일까요. ㅎ
*** 불교철학 11월 16일 에세이 공지입니다 ***
- 에세이 분량 3-4쪽입니다. 화요일까지 숙제방에 올려주세요. 발표는 수요일 오전 10시 정각에 시작합니다.
- 간식은 경아샘, 미영샘, 민호샘, 윤순샘, 길례샘, 호정샘, 기웅샘, 현화샘께서 조금씩 준비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에세이 후기는 윤순샘!
수요일에 만나요~
정말로 지리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아스팔트 위에서 기계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유는 어떻게 발생할지가 궁긍해지네요!
일 년동안 이렇게 꼼꼼하고 세심하게 공지를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업 내용부터 안내까지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