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4-8 후기
Ⅰ. 그리스 철학 - 변방을 찾아서
스승님들과 도반들의 원력이 합쳐져 드디어 1년의 구사론 여정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에 그리스철학 수업에서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강의가 있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Being[존재]을 주구장창 사유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 철학(우리가 만나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을 한 철학자들은 소피스트(자유사상가들)라고 불리었는데 그들은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 아테네에서 철학을 한 이방인들(이오니아에서의 거의 옴.)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은 진리가 있고 사람들은 진리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사람들은 진리를 원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는 사유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플라톤은 이 공준을 종합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철학은 여기에서 진화했을까요? 아닙니다. 철학에는 진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문제들의 장이 있을 뿐이고 문제화함이 있을 뿐입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신화들을 펼치다가 철학은 소피를 향한 끝없는 이끌림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리를 원하는 이유를 플라톤은 결여되어있음에서 찾습니다. 하지면 니체는 결여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부분적으로 이해해도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각자가 자신들의 장에서 느끼고 살아가는데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플라톤의 결여설을 비판합니다. 이에 자기 삶에서 실존함은 충분히 나의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본질 자체는 나쁜데 나에게는 좋을 수가 있고 본질 자체는 좋은데 나에게는 나쁠 수가 있음을 설파합니다. 그는 개념이 어떻게 작동하는 지를 물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비역사적, 반시대적이란 단어는 조건 속에서 그 조건의 중심으로 향하지 않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삶의 장에서 중심을 향하지 않은 힘을 만들어내는 장은 내 문제의 장에서 이루어집니다. 문제의 장이 사라지면 개념이 도그마합니다. 그래서 세상과 개념을 일치화 시키려고 하게 됩니다. 또한 뭘 배워도 격자로 활용하면 자기가 놓여 있는 문제의 장에서 대응되지 않는 것은 버리게 되지요.
그리스 아테네에서 다수를 차지한 철학자들은 이오니아에서 왔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오니아 땅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순연하게 받아들였지만.(사람들은 복종의 상태를 받아들임. 모든 인간관계는 지배. 가장 완전한 자에 의한 통치) 이소노미아(관습, 법에 평등하다. 지배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이 아테네로 건너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처럼 폴리스를 형성해내는 민주주의(페리클레스-민주주의란 다수의 독재이다.)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된 이소니아 철학자들이 이소노미아의 사상을 복원하기 위해서 아테네로 온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플라톤에 의해서 반박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자유 사상가들이 세상을 망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플라톤(통일화의 경향)의 철학은 다른 사상의 다양성(통일화에 저항, 탈영토화)을 배제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사상도 아테네 외부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아테네 외부 사람이었지만 세상을 수로 여지없이 설명하여 플라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플라톤은 말년에 갈수록 수와 기하학에 몰두하게 됩니다. 수는 존재를 설명하는 데 중요하지요. 수로 이념의 세계가 존재함이 증명됩니다. 이에 반해서 플라톤에게 현상계는 닳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이데아와 현상계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플라톤을 비판하면서 근대철학이 시작됩니다.
어줍지 않게 철학을 주마간산한 지금의 나는 이데아와 현상계를 나눈 상태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 스스로의 중심을 만들지 못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여기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변방을 찾아서』라는 저서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일일까요? 오래전에 일독한 저서라서 잘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생기를 중앙을 벗어나 변방에서 중심을 형성한 저력에서 찾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Ⅱ. 불교 철학 - 깨달음의 길
- 있음과 없음
있음이란 총상 중에서 제일 큰 범위이고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인식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름으로써 식이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두 번째는 없앰으로써 들어가는 데 3가지가 있습니다.
1) 있음
⓵ 이름으로써 들어가는 방식
예는 컵, 책 등으로 그 자체가 앞에 있기 때문에 그 방식대로 우리에게 비춰지고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말합니다.
⓶ 없앰으로써 들어가는 방식
ㄱ. ‘저 사람은 뚱뚱해 그런데 점심을 안 먹어’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면 야식을 먹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없애는 데 뭔가가 남아있는 경우입니다.
ㄴ. 온전히 하늘을 콕 집고 싶을 때 ‘구름도 비행기도 없는 새도 없는 하늘’이라고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것을 다 지워냈을 때 하늘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는 뭐가 없음을 특징으로 하는 있습니다. 뭐가 없다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ㄷ. 눈을 딱 감고 머릿속에 어머니하고 머릿속에 떠올렸을 때 저장된 데이터베이스 안에서 저장한 그것 그대로를 찾아서 딱 가서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요만큼 틀려도 거기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저장한 그 모양 그대로 찍혀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눈을 감고 어머니라고 떠올렸을 때는 내가 고정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저장한 정확히 이러이러 한 것이 어머니라고 하는 그것이 있습니다. 분별식은 전부다 의총상에 의해서 정확하게 내가 저장한 것에서 요만큼도 달라서는 그거라고 인정을 안 해줍니다. 이는 의총상이, 분별식이 대상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2) 없음
있음과 반대되는 없음은 어떤 식으로도 그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경우를 뜻합니다. 여기에는 인식할 수 있는 식이 없습니다. 완전히 불가능한 것들을 없다고 얘기합니다.
예)토끼 뿔, 성녀[노새를 얘기함]의 아들, 허공화[경전 중에 꽃비가 내린다의 꽃을 실재적 꽃으로 보면 안 된다. 인연의 결과 맺어진 꽃으로 보면 안 된다.]
2. 득과 비득
설일체유부에는 모든 것이 실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맺음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는 선업이라든지 악업이라든지 그것이 확실하게 맺음이 생겨야 되는데 그것을 득, 비득이라고 얘기합니다. 현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을 득이라고 얘기하고 비득은 인연을 갖추지 않아서 그것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조건 하나를 빼는 것도 번뇌의 비득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 면을 성취하는 것이 내 행위에 대한 마침표를 찍어 열매를 하나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어야 우리 마음에 씨를 뿌려 선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3. 생의 첫 식
12연기에서 이생에 받는 첫 식은 화가 된다고 합니다. 엄마의 태에 들어간 순간 갇혀서 화를 팍 일어내게 됩니다. 이 생이 전부 번뇌로 물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태에 갇히는 그 순간 화가 팍 일어나서 그에 이어서 나쁜 인연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살이라든지 좋은 인연으로 내가 태를 찾아들어갔을 때는 내가 찾아들어갔기 때문에 화가 나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선연들이 모여서 좋은 몸을 갖게 되고 그래서 전생에 쌓은 좋은 구생이라고 하는 지혜를 계속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화로 生을 시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다 놓치고 번뇌로 고통을 받습니다. 그 때 이숙은 무기인데 어떻게 번뇌가 연결 되는가하는 의문이 듭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이 일찰라가 화이지만 몸을 받으면 열매를 맺어서 끝납니다. 더 이상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 상황에서 번뇌로 계속 이어지는 것, 나쁜 인연들이 모이는 원인들은 이숙에서 찾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숙은 이미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무기는 계속 무기로 이어지지 무기가 번뇌가 되지 않습니다. 불선이 불선으로 이어지던지 간에 선이 선으로 이어지던지 간에 이숙은 거기서 끝납니다. 태에 부딪혀서 화를 내고 계속해서 짜증을 내고 발광을 할 때 그 때 만드는 그 마음은 일으키는 화의 결과물이지 이숙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이숙은 열매를 맺은 것으로 끝이 납니다. 화를 일으켜서 그래서 그것이 계속 이어져서 나쁜 것들을 모읍니다.
4. 유집수
유집수는 스쳐 지나가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스쳐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지요. 무표업은 그렇게 해서 내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어도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에 [계를 수지하고] 한 번하고 잊어버린다고 해도 파계하지 않는 이상은 자국이 쭉 남아있습니다. 유집수의 대표적인 예가 아들이 죽은 어머니라고 합니다. 마음에 슬픔이 계속 스치고 있어서 무엇을 먹어도 맛을 모르고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닙니다. 보살의 근본지는 삼매에 들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기입니다. 보살이기 위해서는 항상 보리심이 있어야하고 자비심이 있어야 됩니다. 보리심과 자비심은 선입니다. 지금 선정[삼매]에 들어있는 그 사람은 자비심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인데 그 사람이 공성을 터득하고 있다고 해서 보살이라고 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에 덧붙여서 그러면 성문연각도 공성을 터득했으니 그들도 보살인가 하는 논쟁도 나옵니다. 이런 질문에 답을 하기위해서 유집수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유집수로 인한 자비심이나 보리심의 이유로 삼매에 들어간 이들에게 유집수로 인한 자비심이나 보리심은 선정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계속 선정의 안락함에 머물지 않고 어느 순간이 되면 다시 보살행을 하도록 선정에서 나오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성문연각은 선정의 상태에서 죽은 지 산지 모르는 상태로 계속 머물 수 있습니다. 특별한 동기를 가지지 않는 이상에는 그러합니다. 그런데 보살은 반드시 어느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 먹었던 자비심에 의해서 선정에서 반드시 일어납니다.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유집수가 아니면 설명이 안 됩니다. 보살이 선정에 든 마음은 무기일지라도 그 사람은 자비심에 의해서 자비행을 하기 위해서 선정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5. 중관
중관이란 이쪽, 저쪽을 없앤 그 상태 그 자체를 말합니다. 하지만 콕 집어서 길이가 여기 5센치, 여기 5센치 없애면 여기가 중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상은 實性의 법 먼지조차도 없음을 승인하는 사람입니다. 상(常)·단(斷)의 양변에서 떨어진 가운데를 승인합니다. 갈래는 자립논증학파와 귀류논증학파가 있습니다.
중관에서 많이 나오는 단어가 貪箸警[집착하는 경계]입니다. 이것은 이거다 라는 의총상에 의해서 고정 돤 대상을 잡는 집착에 의해서 그 대상을 보는 것을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싶어 합니다. 이미 그렇게 봐왔고 그렇게 봐와서 그것을 해치는 아무 상황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 방식으로만 보고 싶어 하는 우리의 집착을 탐저경이라고 얘기합니다. 탐저경은 날 때부터 삼독번뇌에 의해서 윤회를 계속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세세생생 견도와 수도를 통하지 않고 끊을 수 없는 것을 구생이라고 얘기합니다.
귀류논증학파는 본래 설명해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준비가 되지 않은 자에게 귀류논증학파의 견해를 얘기하면 잘못하면 맨붕이 오기 쉽기 때문입니다. 자립논증학파를 충분히 훈련을 해서 뭔가를 구축할 수 있는 힘이 생긴 다음에 귀류논증학파를 설명합니다. 귀류논증학파는 진짜 다 없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쳐내고 저것 쳐내고 이게 중관인데,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는 것이 귀류논증학파의 견해입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길 람림』의 맨 뒤 지혜품은 이 귀류논증학파의 견해가 없고서는 읽어낼 수 없습니다.
일단 귀류논증학파가 다른 학파와 가장 큰 차이는 커피가 담긴 컵을 눈앞에 현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식은 컵을 마음에 비췄다고 얘기합니다. 세세생생 마음에서 컵이라고 인식한 것을 습기가 남아있어서 그래서 컵으로 본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 자기의 습기에 따라서 컵이 비쳐질 뿐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자립논증학파도 마찬가지로 완전히 100%가 아니라 이쪽에서 50%, 저쪽에서 50% 반반해서 존재한다고 얘기합니다. 귀류논증학파는 어떻게 얘기를 하는가하면 컵이 완전히 무자성이다. 나도 하나의 조건으로서 존재. 얘도 하나의 조건이기 때문에 그냥 연기일 뿐이라고 합니다. 서로 의지해서 컵이랑 내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주침으로 존재한다고 얘기합니다. 순간순간의 마주침으로 존재, 매순간 인연의 조합으로 존재할 뿐이지 그 어느 것도 콕 집어서 이것이라고 할 것이 없고 어느 것도 자신의 모습으로서 나의 낮이다. 내 모습이라고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얘기합니다. 귀류논증학파는 현전분을 오로지 물질의 차원에만 경계의 차원에만 현전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앞에서는 현전 그러면 식이었습니다. 현전이 일어나는 이 상황[마주침]에서 근경식이 만나가지고 인정하는 이 식을 이 앞의 자립논증학파까지는 다 현전식[현전분]입니다. 귀류논증학파는 이것을 딱 구분합니다. 얘[←]는 현전하는 현량이고, 얘[→]는 현전분이다. 그래서 일단 인식론에 있어서 앞에 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이 귀류논증학파를 배우기 위해서는 심리철학을 따로 배워야합니다. 설일체유부와 자립논증학파까지 이어진 공통된 심리철학이 있지만 그것 가지고 해석이 안 돼서 귀류논증학파만의 심리철학이 따로 있는 것이지요.
6. 부처님의 몸
중생의 흐름이 끊어지는 마지막 무간도에서 나와 남을 구분하는, 마지막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내가 나를 포기함으로 인해서 나를 딱 없애는 순간 성불을 합니다. 그리고 그 성불하는 순간 부처님의 사신이 동시에 나옵니다. 순차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사신이 동시에 성립합니다. 그 이전의 10보살의 몸이 부처님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이 완전히 끊어지고 부처님의 몸은 그 이전에 자비심이라든지, 공덕자량으로 이루어진 몸이 끊어짐과 동시에 생겨납니다. 화관을 쓰고 육바라밀을 닦은 것은 팔찌와 …… 그런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온갖 공덕의 몸이 보신입니다. 응화신은 만약에 내가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을 세워서 그 원으로 성불을 했다면 내가 보신을 받는 동시에 아미타부처님의 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응화신은 각각 중생의 원에 따라서 각각의 달라지는 면입니다. 수승화신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서 너희들도 나처럼 수행하면 깨달을 수 있어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사람의 모습으로 나신 분입니다. 아미타경에 보면 아미타 절에 징같이 큰 것이 꼭대기에 있습니다. 이는 아미타부처님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극락에는 그런 쇠북이 있는데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무상하다, 일체유위법은 다 무상하다고 설법을 설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사업화신입니다.
지혜법신은 일체종지합니다. 딱 성불하는 동시에 번뇌장과 소지장을 다 끊은 것입니다. 아주 온전히 모든 번뇌가 끊어진 그 자체를 지혜법신이라고 얘기함이지요. 지혜법신이 있으면 모든 번뇌가 끊어져 맑아진 면이 있는데 그것을 자성청정이라고 얘기합니다. 이에 원래 본모습을 되찾은 것을 자성청정이라고 얘기하고 번뇌가 없어진 면을 객진청정이라고 합니다. 자성청정은 공성이고 부처님의 일체종지에서 원래 공한 성품을 자성청정이라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모든 번뇌를 다 없앤 면이고, 그것을 열반이라고 얘기하며 객진청정이라고 얘기합니다.
색신은 부처님의 공덕을 담는 그릇에 보신이 있고, 보신은 오로지 보살들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성불하는 도솔천은 미륵보살님의 석가모니부처님 다음으로 성불하기 위해서 머물러 계시는 곳입니다. 모든 보살[십지보살]이 성불하기 전에 머무는 곳이 도솔천입니다.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도솔천[뚜시따]과 미륵보상의 도솔천은 완전히 다릅니다. 대승에서 수행과 관상을 할 때 부처님을 도솔천에서 모셔옵니다.
8지에 들어섰을 때 번뇌가 끊어졌기 때문에 8지보살이 대부분 내가 열반을 성취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랬을 때 오로지 부처님만이 자성신을 가지고 있어서 이제와 속제가 다르지 않음의 본신이기 때문에 삼매에 들어있는 승의제라는 공성에 집중해 있는 믿음의 상태에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서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줄 수 있습니다. 공성 그 자체로 부처님의 모습이, 보신이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랬을 때 팔지 보살이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에 팔지 보살이 내 공덕이, 내 공부가 끝이 아니구나하는 것을 저절로 알아서 그 힘에 의해서 그 선정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보살이 아니라 수행자의 경지에도 못 올라간 저는 자상하신 가르침에도 도무지 부처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네요. ㅠㅠ 하지만 콩나물이 물을 다 흘려보내고 뺀질거리더라도 계속 물과 만난다면 어느 순간에는 물을 흡수해서 쑥쑥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 만난다면 저도 자비심과 보리심의 수행에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