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임인년 에세이 발표 후기/2022.11.23./윤순
2022년 임인년 수요 불교 철학 마지막 에세이 발표가 무사히 끝났습니다. 시작 멤버 모두가 마지막까지 함께 하진 못했지만, 지금 공부하고 있는 학인들 모두가 정성껏 자신의 글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이상하지요? 글쓰기가 어렵다고 입을 모아 말하곤 하지만, 모두 자신의 글을 들고 약속 시간에 모인 것만 보면 우리는 말과 다르게 글을 쓰고 싶었던가 봅니다.
올해 2월 16일에 시작해서 11월 16일 마지막 에세이 발표까지 우리는 코로나가 막아도 어김없이 규문에 모여 쭉 달렸습니다. <아비달마구사론>이라는 불법서부터가 우리를 좌절하게 할 만큼 방대한 내용과 세밀한 논리로 구성되었기에 처음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읽고 정리하고 토론하면서도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는 의심이 함께 했습니다. 효암스님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한 챕터를 넘어가면 다음 산이 또 기다리는 게 반복되었기에 ‘이렇게 하는 게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라는 자기 불신의 벽도 넘어가야 했습니다. 이런 불안이 있어도 규문에 모여서는 나름 자신이 읽고 마음이 닿은 부분들을 서로 나누고 다른 동학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퍼즐을 맞춰가는 토론은 (복잡하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내용들을 나누어야 하는 과정이었지만,) 우리가 이 과정을 끝까지 쫓아갈 수 있게 하는 데 큰 힘을 보탰던 것 같습니다. 물론 방과 후에 나누는 차담도 우리의 불교 공부에 활기를 주었죠. 그리고 불교와는 연관이 없을 것만 같다고 생각된 채운샘의 서양 고대 철학 강의도 생각과는 달리 우리의 뚫리지 않는 사유를 채찍질해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런 고밀도의 과정을 나름 즐겁게 통과한 우리와 이 과정에 큰 도움을 주신 효암스님과 채운샘을 수희찬탄 합니다.
일 년을 돌아보는 일은 여기까지 하고 마지막 에세이 장을 얘기해 볼까 합니다. 자기 글 14부 복사본과 간식을 싸서 12명의 학인들이 규문에 모였습니다. 에세이 주제는 일 년 동안 <아비달마구사론>에서 배운 개념 중 하나를 자신이 소화한 만큼 쓰는 것이었습니다. 에세이 발표는 4명씩 세 조에 나누어 발표하고, 동학들이 질문하고, 스님 말씀을 듣는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의 코멘트 중심으로 에세이 장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조는 현화, 현정, 혜윤, 경아 샘 순서로 발표했습니다.
먼저 현화샘은 ‘칼각’을 고집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대로 조합하고 배치할 수 있다’에서 비롯되었고, 남편과 함께 사는 집이기에 칼각을 흐트러뜨리는 남편을 문제 삼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칼각을 문제 삼는 업이 이숙과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몸과 사람으로서의 마음은 이숙과이지만, 이것 이외에 마음은 선업 또는 번뇌(악업)에 함께 길러지는 소장양이기에 원래 칼각을 고집하는 것은 바뀔 수 있다는 게 스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보면 좋은 사유거리를 주셨는데, 집은 남편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우리집이라고 할 수 있어서 관리자로서의 ‘나’가 있지만, 그 공간에 각자의 몫이 있기에 남편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정샘은 이번 에세이 장을 ‘글쓰기(공부)에 대한 회의와 그것으로 인한 불편함’을 사유해보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스님께서는 글을 보시고 순간순간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자신에 대한 위안이 필요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신에 대한 ‘작의’가 부족한 게 아닌가 살펴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는 오고 있는데 우산을 쓰고 있어 메마른 자신을 촉촉하게 적시지 못하는 것 같으니 현정샘에게 ‘자신에 대한 자비’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혜윤샘은 ‘자신이 어떻게 행위할지에 대한 불확실함’이 자신을 괴롭혔고, 구사론의 득과 비득의 개념을 행위의 맺음, 중간 마침표와 연결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습니다. 스님께서는 득과 비득에 관해 혜윤샘이 스님보다 더 세밀히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혜윤샘의 에세이를 가지고, 그것/ 그것이다/ 그것으로서 존재를 구분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현상세계이고, ‘그것이다’는 행위의 득이라 할 수 있고, ‘그것으로서 존재’는 그만한 값을 치루고 나에게 그것으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풀어 주셨습니다. 이 세 번째를 혜윤샘은 인식의 득으로 이해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서 존재’는 나에게 득으로 존재하게 만들지 않으면(값을 매겨주지 않으면) 어떤 상황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기에 나에게 ‘그것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해 주셨는데 이 설명이 어렵지만, 이는 불교에서 ‘공’을 사유할 때 중요한 개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분위기상 이 개념은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하면서 계속해서 사유해야 할 중요한 개념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조 마지막으로 경아샘의 에세이는 현재 번뇌가 여실이 드러나는 사건에 대한 경아샘의 사유의 진행 과정이 잘 드러나는 글이었습니다. ‘가닿기를 멈추지 않을 뿐’이라는 제목에서 추측되듯이 상대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서로 부딪히는 상황에서 드러나는 괴로움들을 상대방을 탓하기보다 자신의 문제로 다룬 것과 상처의 세밀한 분석은 우리 사유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나를 줄이는 데만 몰입해서 글이 진행되면서 자신이 값을 치루지 않아서 용두사미로 결론이 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경아샘이 쓰는 용어를 다른 사람에게 명확히 하기 위해 설명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하셨고, 글이 더 나아갔으면 좋았을 지점은 대상이 마음을 열어 내 말이 들어갈 수 있고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는 부분을 사유해보기를 권하셨습니다.
김밥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짧은 산책으로 환기를 하고 두 번째 조 발표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조는 민호, 미영, 윤순, 태미 샘 순서로 발표했습니다. 이번 조는 첫 번째 조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구사론> 개념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었습니다.
과학공부를 하고 있는 민호샘은 이번 에세이에서 물질의 최소단위인 원자 개념과 맞닿아 있는 <구사론>에서의 ‘극미’ 개념을 탐구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구사론>의 극미 개념에서 발견되는 구멍들에 대해 나름 질문을 하며 물질을 이해해 보려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극미를 공부해서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에 대해 명확한 질문이 병행되지 않아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란 학인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구사론> 극미 개념 중 ‘무방분’과 무위허공(공간으로 나눌 수 없는 극미)을 탐구하면 현대 과학과 통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데 거기까지 사유가 나아가지 못해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구사론>의 극미 개념은 선정위주의 수행 시 집중해서 파고들어 진동에까지 닿은 선사들이 진동과 하나가 되어 공명하는 내가 ‘참나’라는 것을 깨닫고 신통을 얻는 과정과 연결된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단정적 문장을 실증적인 예를 가지고 증명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나에게 득이 될 수 있기에 다음에는 실증적 예를 함께 생각해 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미영샘은 자신의 억울한 감정에 대해 사찰한 글을 쓰셨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관련해 이런 감정이 생겨났을 거라고 원인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없어서 사찰이라는 것은 내 수행과 함께 가는 것인데, 문제만 제기하고 연결이 사라져버려 나의 수행이라는 생각이 없어 보이는 글이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미영샘이 더 나아갈 지점은 상대방이 불의를 행할 때 익어진 대로 행하며 침묵하고 있었다면, 당한다고 생각하는 나도 불의에 동참하는 것과 마찬가지기에 공업에 대한 사찰이 더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도록 시각을 넓이기를 권하셨습니다.
제(윤순) 차례인데요. 저는 ‘무아’에 관해 글을 썼습니다. <구사론> 30권 파집아품에서 세친 보살님의 ‘무아’에 대한 세세한 설법을 간직하고 싶어 쓴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아’는 제가 논하기에는 불교의 법에 대한 사찰이 더 필요한 분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업과 번뇌가 윤회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바로 이런 결론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이는 도둑질한 후, ‘내가 안했어. 내 손이 했어’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업과 번뇌가 윤회하는 것이 아닌 업과 번뇌에 의해 드러나는 ‘나(총상)’를 더 사찰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업과 내가 둘이 아니라 업과 번뇌의 총상으로서 ‘나’가 존재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업이 아니라 총상으로서 ‘나’가 윤회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버거운 주제여서 무게를 감당 못해 실수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모르는 부분이 드러났고 그것에 대해 스님과 동학들의 도움을 받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대답 태도를 보시고 깨지는 것이 번뇌야지 ‘나(총상)’가 되면 해가 된다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태미샘은 자신의 게으른 태도를 반성하면서 방일과 불방일에 대해 사찰하는 글을 쓰셨습니다. 스님께서 구사론에서 설하는 방일과 불방일에 대해 먼저 자세히 정리를 한 후, 이 글을 쓰셨으면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 하시고, 불방일, 아집, 미세한 혼침을 모두 찔러도 아프지 않은 무덤덤함(무기 마음)으로 섞어서 썼기에 다시 말해 펼쳐서 미세하게 분별해서 쓰지 않았기에 이를 분별해 본다면,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되는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컨대 방일이 생각 없이 저절로 습관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 즉 에너지를 덜 들이고 지속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선업을 행할 때는 좋게도 작용하는 마음이 된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어서 세 번째 조는 호정, 윤지, 기웅, 길례 샘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호정샘은 ‘계라는 무표업’을 다시 보는 기회로 글을 쓰셨습니다. 목표 설정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호정샘에게 계는 지켜야 하는 무엇이라는 부담감으로만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글 말미에서 계의 작용을 무시하고, 계를 지키는 것에 대한 고단함에만 초점을 맞춰서 일어난 거부감이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여기에서 더 생각해 보면 좋은 지점은 계가 싫은 것과 계를 지키지 못하는 내가 싫은 이유는 다른 것이고, 두 번째에 해당하는 원인은 나의 완벽한 모습을 상정하고 그것에 미치지 못함에서 가지게 되는 불만족, 즉 번뇌와 연결해 보면 만/질투와 연결된다고 알려 주셨습니다.
윤지샘은 구사론에서 ‘근’에 관해 공부한 것을 촘촘히 정리하시고, 우리의 근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근의 힘은 어떻게 닦이고 발현되는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셔서 기뻐하시는 글을 쓰셨습니다. 스님께서는 근이라 함은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데, 뿌리에 대한 사색이 빠져 있고 예가 없어서 정리가 훌륭함에도 공감되지 않는 면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던져주신 질문은 먼저 뿌리가 양분을 빨아들이지 않으면 싹이 날 수 없는데, ‘뿌리는 씨앗의 원인인가, 조건인가?’, ‘근은 씨앗이 싹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원인인가, 조건인가?’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와 같이 하나의 정답을 도출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웅샘은 자신의 ‘부정적 습관력’을 들여다 보는 글을 펼치셨습니다. 기웅샘은 자신의 번뇌를 뭉뚱그려서 보지 말고 낱낱이 쪼개서 보는 연습을 하라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노력하면서 자신의 번뇌를 구체적으로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이러한 말은 스님 말고 다른 사람이나 책에서도 접한 적이 있었을 텐데 ‘왜 내 말만 들렸을까요?’를 질문하셨습니다. 기웅샘은 유익한 말을 몰라서라기보다 ‘인연조건’의해 그 때 스님의 말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스님의 말씀은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고 노력(값을 치루고)이 드러난 결과에 대한 인연조건을 살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인의 어떤 질문에 대해 조건을 따져 보는 사찰에 따른 대답을 하는 게 아닌 결과에 대해 자신의 한계라고 대답하는 태도야말로 따져 보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길례샘은 ‘경안’에 대해 글을 쓰셨습니다. 조급함으로 마음에 불편함이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어서 ‘경안’에 대해 관심이 가셨고, 대치로 수행을 통해 편안함(경안)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담긴 글이었습니다. 스님께서 경안을 힘덜림이라고 말씀하셨듯이 경안은 도달해야하는 어떤 상태가 아닌 ‘번뇌의 그침을 얻기 직전 내 몸과 마음이 내 마음대로 되는 심소’라고 집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과인 경안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길례샘의 글이 조급함을 보여주고 있기에 더 사찰해보았으면 좋았을 지점으로 9주심의 과정에서의 원인과 조건들을 따져 보았다면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조급함을 내세우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히 섬기는 스승의 도움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웠을 때 얻어지는 게 법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께서는 수요 불교철학 전체 과정을 끝마치는 날, 몇 가지 공양물을 준비하셔서 달라이라마 존자님 앞에 차리시고, 그 의미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양물은 맑은 물, 과일과 곡식, 차, 술이었습니다. 물은 법의 비이자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우리의 갈애를 해결한다는 의미로, 과일과 곡식은 활동들이 꽃피어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로, 차는 세심한 정성이 있어야 만들어지고 그것을 온전히 지키는데 살피지 않으면 차맛이 유지되기 어렵기에 알아차림의 의미로, 술은 스님들이 마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대락(큰기쁨)’을 상징하기에 공양물로 올린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 저에게 남아 있는 잔상으로 대략 에세이 장을 정리했습니다. 이 후기 외에도 마음에 새길 말씀들이 넘치는 수요 불교철학 마지막 에세이 장이었습니다. 부처님의 가피로 일 년 동안 불교철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 스승님이신 효암스님과 채운샘, 저의 의지처인 매니저 윤지샘을 포함한 동학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순샘 이렇게 세세하게 하나하나 써주다니. 감사합니다. 샘들 덕분에 저도 올 한해 잘 넘어올 수 있었네요. 다들 자기 자리에서 뭐 하나라도 넘어보려고 애쓴 흔적들이 보여 고마웠습니다. 우리들이 에세이 다 끝났다고 손 탁탁 털고 있을때 후기 쓰느라 애쓰셨어요
에세이를 마치고 시간이 흘렀는데도 뭔가 다시 구사론 책을 뒤적여야 할 것 같은 여운이 남아있습니다. 한 분 한 분에 대해 정성어린 마음이 담긴 윤순샘의 후기를 보고 있자니, 에세이에 다루어졌던 개념들을 다시 봐야 겠다(!)는, 예전 같았으면 절대 들지 않았을 생각이 듭니다.... ㅎㅎㅎ
다들 글쓰기가 힘들다고 하지만 실은 글을 쓰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는 윤순샘의 말씀이 공감되옵니다. 어렵다고 궁시렁대면서도 글을 쓰지 않았다면 공부한 내용을 거름삼아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겠죠. 글을 통해 서로에 대해서도 이해가 깊어지고 말입니다.
이렇게 공부의 기회를 마련해주시고 끝까지 이끌어주신 두 분 스승님들, 1년간 함께 공부해주신 불교 도반님들 그리고 마지막 후기까지 훌륭하게 마무리해주신 윤순샘,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꾸벅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