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 9월 7일 3학기 에세이 후기
효암 스님께서는 우리가 이번 학기에 구사론의 핵심 파트인 업품과 수면품을 배웠으니 ‘나의 번뇌를 탐구해보라’는 에세이 주제를 주셨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번뇌라 생각하는 것을 찾아 괴로움의 원인을 직시해 보라는 겁니다. 에세이 발표 날 이 미션을 주신 스님은 명상 센타에 가셔서 안 계시고, 여러 학인들도 불참하는 바람에 빈자리가 많아 아쉬운 감이 있었습니다. 발표한 에세이의 내용을 대충 살펴보면 글쓰기의 어려움,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 사업상 일어나는 탐심과 진심, 엄마와의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 견취를 강화하는 ‘왜’를 묻는 습에 관한 고민, 도반과 겪은 갈등에 깔린 수면 등 다양한 번뇌를 풀어놓은 자리였습니다. 채운 샘께서는 전반적으로 본인에게 가장 핵심이 되는 번뇌를 캐치하지 못하고 주변만 맴 돈다는 총평을 하셨고, 각자의 업에 대해 콕 집어 세세하게 코멘트 해 주셨습니다.
업이란 반복되는 행위나 인지 매커니즘입니다. 나에게 글을 쓰는 끈질긴 경향성은 무엇인가요? 자신에게 끈질기게 반복되는 어떤 경향성이기 때문에 잘 바뀌지 않는 나의 잠재력을 업이라 합니다. 각자의 글에서 변하지 않는 생각의 방식 즉 업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생각의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단편적으로 아무리 좋은 생각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 문제를 대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고, 그 N개의 길을 가는 방식은 각자의 근기가 결정합니다. 뭐든 좋게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번뇌가 필요하고, 비판적인 사람은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한 거죠. 그러니 자신의 병증의 정도를 직면해야 합니다. 매번 좋은 것으로 번뇌를 넘는 척하면 그것이 바로 자신의 업입니다.
불교는 내가 어떤 일을 선택할 것인지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어떤 사건을 어떻게 맞이하고 대할 것인가는 불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업과 번뇌에 대해 설명하기 때문이죠. 어떤 문제의 발생과 해결 방식은 각자의 업에 따라 다릅니다. 내가 어떤 것이 좋으면 그것의 단점까지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됩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는 것처럼요. 그 사람이나 물건에 원래 단점이 있었으나 내 눈이 자만에 가려져서 그 단점을 간과하게 됩니다. 그러니 중중무진의 인연 조건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난 일에 대해 그걸 처리하는 나의 경향성은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계속 거기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다음에 똑같은 방식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업을 봐야 합니다. 모두 다 자신의 업의 장을 못 벗어나기 때문이지요. 자신이 반복하는 업에 다른 길을 낼 수 있도록 마음자리 하나를 바꾸는 것(클리나멘)이 아주 중요합니다.
탐진치는 인연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지 내 안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닙니다. 실체가 없는 진(瞋)심을 실체가 없는 선(善)심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진심을 몸에 장착하고 있는 사람은 없지요. 자신을 진심과 동일시해서 규정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싫은 것입니다. 진심이 실체가 아닌데 부정적인 경향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본인의 업이라는 겁니다. 모든 존재의 번뇌는 업에 따른 것인데, 과거의 어떤 표상을 반복하면서 어느 순간 그것이 현재와 미래의 자신의 업이 됩니다. 마음에 안 드는 나라는 실체가 있을까요? 모든 것이 다 싫다는 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방식입니다. 업이 되는 자기 마음자리 하나를 보는 순간 문제가 사라집니다. 자기의 업이 계속 반복되는 이유는 그런 방식으로 사는 것이 죽을 만큼 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못 살 정도로 괴로울 때 업을 바꾸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구사론은 자신의 생각을 회피하지 못하도록 수 십 가지의 갈래로 마음을 나누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고 바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을 완벽하게 써야한다는 표상이 있기 때문에 글쓰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완전한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어떻게 글을 책임질 수 있을까요? 글이 안 써질 때는 욕심이 들어간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이상은 쓰지 않아야 합니다. 글이 안 써지는 것은 잉여가 들어간 것입니다. 자신의 글이 자신의 소유라는 아견 때문에 글쓰기가 어렵고, 자신이 완전히 다 통제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있기 때문에 글쓰기가 힘든 겁니다. 성실한 그래서 좋은 결과를 낸 자신에 대한 표상이 있어요. 자신의 성취로 칭찬받고자 하는 업이 있습니다.
비평에 대한 불편함은 당연합니다. 근거를 가지고 비평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근거 없이 느낌으로 말하는 것에는 반박해야 되고, 정곡을 찌를 때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공부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칭찬을 경계해야 합니다. 비평하는 말을 하는 사람은 어떤 근거에 의거해서 코멘트해야 합니다. 어떤 이익이 없이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파레지아)으로 코멘트 하고 듣는 사람도 불편함을 감수하고 들어야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도반이란 어딘가 함께 가는 친구를 뜻하는데 함께 비젼을 공유하는 친구입니다. 나와 완전히 동일자라면 친구가 아니고 적당히 거리두기를 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도반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이 비대하면 알맹이가 없게 됩니다. 내 생각을 견고하게 지키기 위한 ‘왜’가 아니라 내 생각을 해체하기 위한 ‘왜’로 바뀌어야 합니다. 왜 삼보에 귀의해야 하는가?를 묻기보다 삼보란 무엇인가? 귀의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수행이란 무엇인가요? 수행과 공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수행 없는 공부가 없고, 공부가 전제되지 않는 수행이란 없습니다. 수행의 차원은 다양하고 하나의 절대적인 수행은 없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수행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수준에 중요한 지점은 깨달음 보다는 번뇌입니다. 우리의 삶이 톡이나 유튜브로 번다합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번뇌 종자인 수면은 구사론 당시 보다 훨씬 더 다양할 겁니다. 아마도 수 십 가지 그 이상이겠지요. 하여 탐진치를 바탕으로 하는 번뇌를 다르게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현재 이 인연조건 속에서 어떻게 번뇌의 자리를 다르게 인식할 것인가? 이 차원에서 어떻게 번뇌를 규정하고 어떤 수행이 필요한지에 강조점을 찍는 것이 더 다양하지 않을까요? 번다함을 줄이는 것이 현대 대중의 수행에 핵심일 겁니다. 번뇌가 발생하는 지점에 따라 수행도 달라져야 합니다. 각자 생각하는 견취가 있고, 그걸 해체하기 위해 공부하고 문제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자신이 지켜야할 계를 만드는 겁니다. 각자의 수준에서 지금의 인연 조건에서 지킴을 밀고 나가면서 계속 공부해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글쓰기 패턴은 일상의 패턴과 동일합니다. 끝까지 파고 들지 않는 습이 일상에도 작동합니다. 번뇌가 있는데 없는 척 덮으려는 것이니, 계속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파고 들어야 합니다. 글쓰기는 언제나 결과입니다. 글쓰기가 삶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이 바뀌면 글쓰기가 바뀝니다.
후기를 정리하다 보니 각자의 글에 각자의 업이 고스란히 다 녹아 있구나하는 생각에 새삼 놀랐습니다. 본인들도 잘 모르는 업을 냉철하게 캐치해서 파레지아의 마음으로 코멘트해 주신 채운 샘께 감사드립니다. ‘글쓰기는 언제나 결과!’라는 말씀 잘 새기고요, 방학 잘 쉬시고 공부 & 수행하러 다시 모여 봅시다.
에세이날 가지는 못 했지만 보내준 음성파일과 후기를 통해 뒤늦게라도 그날의 분위기를 짐작해봅니다. 에세이를 쓴 도반들의 고군분투와 채운샘의 코멘트 속에 묻어난 고민들이 저를 자극하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네요. 명절연휴에도 빨리 후기 올려준 현화샘. 고맙게 잘 읽었어요. 다들 방학 잘 보내고 다음 학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