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토아철학
철학은 진리를 구성하는 틀을 만드는 것이지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다 자연학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런데 그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양립 가능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실천윤리가 비슷해 보여도 바탕이 되는 세계관은 전혀 다르기도 하고, 비슷한 세계관에서 전혀 다른 실천윤리가 도출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유념하면서 철학을 공부하라는 채운샘의 당부 말씀으로 오늘 후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배운 에피쿠로스 학파와 오늘 배운 스토아학파는 세계관은 다르지만, 실천윤리는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세계를 불연속적인 것으로, 스토아학파는 연속적인 것으로 보지만, 둘 다 외부 권위에 의지하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통해 품위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마음의 평정 – 금욕 nope, 욕망의 구도 바꾸기
오늘은 스토아학파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토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금욕주의인데요, 욕망을 억누르는 것은 스토아학파와는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스토아학파에게는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나의 사유에 부합하게 만드는 것 즉 욕망의 구도를 바꾸는 것이 좋은 삶입니다. 이때 사유란 이성을 말하고 이성에 따라 사는 것은 자연에 따라 사는 것, 시민으로 사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맞게 사는 것인데 우리가 받은 근대 교육에 비춰보면 자연은 이성과 반대되는 방향에 있을 것만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연이 이성이고, 게다가 이것이 시민적인 삶이라니, 전혀 연결되지 않는 것들을 이어 붙여놓은 것만 같은 생경함이 있네요. 생경함이란 우리의 생각이 흐르는 방향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스토아학파의 논리는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사고의 틀을 한 번 벗어나 보는 경험을 해볼까요? 이렇게 쓰고 보니 수업 시간에 그냥 설명을 수동적으로 듣는 것과는 달리 뭔가를 찾아 탐구하는 느낌이 있네요. Let’s go.
세계는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들의 운동에 의해 세계가 구성된다는 에피쿠로스학파와는 달리 스토아학파는 만물은 하나로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들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일어난다는 연속적인 세계관을 주장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자연의 섭리(providence)’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죠. 개체의 차원에서는 피하고 싶은 일들도 전체적인 우주 차원에서는 필연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선악이 아니고, 생성과 소멸도 대립적이지 않습니다. 어떤 것의 소멸은 전체 차원에서는 또 다른 것의 발생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분적인 것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와 가치에 따라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행복과 불행을 왔다갔다 합니다. 우리가 우주의 일부분임을 자각하고 이성적으로 구성된 자연법칙에 따라 살아갈 때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연법칙으로부터 미세한 클리나멘을 그림으로써 어떻게 자신의 자족을 발명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에피쿠로스학파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 로마는 작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지중해 전역을 아우르는 제국이 되었습니다. 제국주의와 같은 중앙집권은 아니었지만, 마을공동체를 잘 유지해야 제국적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서 로마인들에게는 citizen으로서 의무를 다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고, 사회의 원리도 자연적 규칙에 따라 구성하는 것이 좋은 사회였습니다. 사회를 지배하는 왕들도 철학자가 되어야 우주적 이성에 따라 인간 사회를 지배할 수 있으므로, 로마 시대에는 어릴 때부터 황제에게 철학 교육을 시켰습니다. 일반인들도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는데 있어 어떻게 나의 정념을 다스릴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철학이 필요했고, 따라서 올바른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시민으로서 도리를 다 하는 것과 잘 사는 것이 공과 사로 나뉘거나 모순되지 않았습니다. 우주, 사회, 개인이 추구하는 것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일치하는 삶이 덕이었던 것입니다.
자연과 일치하는 삶은 우주적 이성에 따라 사는 삶이고 이것이 덕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덕과 쾌락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 학파 모두 세속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고 어떻게 흔들림 없이 잘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즉 고통 없는 삶이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이해함으로써 고통의 예속에서 벗어나는, 고귀하고 품위있게 욕망하는 삶을 살고 싶어 했던 것이지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이 자연의 규칙, 섭리입니다.
우주는 영원히 순환하는 주기 속에서 운동합니다. 우주의 순환하는 주기, 우주의 영원한 필연성이 우주적 본성이고 이것이 이성입니다. 세상에는 온갖 일이 일어나지만 그 어떤 일도 이러저러한 인과사슬에 의해 일어납니다. 우주적 이성을 깨달으면 인간해방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한데서 불행이 시작됩니다. 생노병사에 반하는 삶을 살려고 하거나, 헤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다 자연의 이치를 외면하는 것이겠지요. 자신의 가치와 견해에 얽매이기 때문에 사소한 것들, 우연처럼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어떤 우연도 사실은 필연이라는 섭리를 깨달을 때, 인간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깨달을 때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가장 자유로운 자는 자연의 변용에 따라 사는 자입니다. 우주적 이성이 인간의 이성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것을 깨달으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부분에서는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깨달으면 해탈한다는 불교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된 기둥(스토아) 주변에서 강의하는 스토아학파(라고 보이는 그림) 】
철학하기 좋은 나이, 노년.
스토아학파가 그리스시대의 철학들과 다른 점은, 철학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를 노년으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나이 들면 인지활동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텐데 철학이라니. 지금도 철학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뭐 늙어서도 할 일이 있다니 반갑기도 한데, 손이 저절로 머리로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암튼, 기둥(스토아) 주변에 몰려든 자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볼까요? 죽음과 병을 피할 수 없는 나이인 노년에 들어서면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겠죠. 나와는 먼 일일줄 알았던 것들이 갑자기 현실로 들이닥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의 갑작스러운 발병이나 죽음도 흔해집니다. 그것이 왜 발생했는지도 모르는 채로 우리는 그것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때 외부적인 미신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 안에서는 필연적이며, 이것을 나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래서 스토아학파에는 섭리를 훈련하는 명상훈련이 여러 가지 있다고 합니다. 또 이성적인 사유 훈련을 위해 우주자연의 이치를 내재하고 있는 몸에 대한 사유가 많아, 몸이 존재하는 방식을 바꾸는 양생술이 실천율의 일부로 들어가 있다고 하네요.
다음 시간에는 더 자세하게 스토아 이야기를 들어보아요.
2. 수행도
수행도에만 들어오면 저는 정신줄을 놓고 아득해지곤 합니다. 성인의 경지가 너~무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내 주제에 무슨, 언감생심 득도라니’ 하는 마음이 들면 흥미가 뚝 떨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고의 원인을 살피는 것은 그것을 멸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임에도 막상 견도니 수도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피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지금 내 고를 실제로는 고로 느끼지 않아서일까요?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당장 눈 앞의 쾌를 고수하려는 오래된 습관일까요? 이런 마음을 안고 4학기 공부를 해야 하는 우리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스님은 공통과제를 자신의 고집멸도를 써오는 것으로 바꿔 주셨는데 이것이 공부가 되도록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겠지요. 스님께서는 우리가 배우는 불교에서 자신만의 몫을 가져와서 각자의 고를 해결할 수 있어야 잘 공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저는 이번 시간에 배운 내용을 간략히 제가 이해한 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법을 받으려면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그 그릇이 근기(根器)입니다. 내가 들고 있는 그릇이 어떤 것인가에 따라 받는 법이 달라집니다. 법을 받을 때 어떤 마음으로 받는가, 즉 내가 준비한 그릇의 크기에 따라 상,중,하의 근기로 나누어집니다. 이생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법을 받으려면 이생만 담아도 되기에 그릇이 종지 크기이며, 이것을 하근기라고 합니다. 이생에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을 받고자 할 때는 중근기,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도 행복해야 하므로 모든 이의 행복을 다 받아야 하기 때문에 큰 그릇이 필요합니다. 이때의 근기는 상근기라고 합니다.
법을 받을 때 뭉뚱그려서 받을 때는 법을 만나는 내 마음의 면적이 뭉뚝하므로 둔근기(鈍根機)라고 하고, 법을 낱낱이 나눠서 받을 때는 예리하고 날카로워서 이근기(利根機)라고 합니다. 이근기와 둔근기는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법을 받을 수 있는 나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나의 습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둔근자는 믿음을 따라 수행하고, 이근자는 법에 따라 수행하지만, 믿음을 따라 수행하는 수신행(隨信行)도 믿음을 기반으로 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고, 법에 따라 수행하는 수법행(隨法行)도 법을 기반으로 믿음을 채워야 합니다. 이러한 성자가 예류과에 이르게 되면, 전자의 경우 믿음의 뛰어난 힘(信根)으로 말미암아 승해勝解가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 지혜의 뛰어난 힘(慧根)으로 말미암아 정견定見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을 각기 신해信解와 견지見至라고 합니다. 견도위의 성자가 수도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수신행에서의 믿음은 더욱 증장하여 무루의 승해를 처음으로 일으키기 때문에 '신해'라고 한 것이며, 수법행에서의 지혜는 더욱 증장하여 정견의 혜가 나타나기 때문에 '견지'라고 한 것입니다.
법에 들어갈 때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이 자량도입니다. 자량도는 깨달음을 준비하는 단계로, 그 원인과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복덕을 쌓는 길을 말합니다. 가행도는 모든 현상에 대한 공성을 관하면서 거기에 지(止)를 결합한 수행의 단계를 이루는 과정으로, 존재의 본성이 점점 확연히 드러나도록 하는 길입니다. 계속 한 곳에 마음을 모아 따뜻하게 해서(煖位) 끝까지 밀어붙여(頂位) 그 무게를 감당하는 순간(忍位) 깨닫게(世第一位)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확실하게 구분짓는 결택이 필요합니다.
견도에서 비로소 택멸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견은 현관(現觀)입니다. 눈에 보이듯 확실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현관은 지관쌍수(止觀雙修)를 통해 보는 것으로, 현관으로 뚫었기 때문에 견도입니다. 견도 이전에는 대충 그러겠지 하는 믿음과 논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즉, 경험을 바탕으로 한 확신으로 밀어붙여서 온 것이지만, 눈에 보이듯 확실하게 본 것은 아니므로 흔들립니다. 나의 마음에 번뇌가 따라 붙습니다. 그러나 현관하고 나면 더 이상 물러나지 않습니다. 견도에서는 생이 없는 법인, 즉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성취합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윤회를 벗어납니다. 윤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윤회의 생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예류과의 경우 최대 7번의 생을 반복한 후 반열반을 성취합니다.
상, 중, 하근기/둔근기와 이근기 그리고 이와 연결된 믿음에 관한 의문이 계속 일어났었는데, 이번 수업 시간 근기에 대한 스님의 설명과 호정샘의 친절한 후기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우와... 상상속에 펼치던 고대 그리스 스토아의 분위기를 그림까지 곁들여 나눠주신 호정샘의 디테일한 후기 감사합니다~
확인해보고 싶었으나 게을러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탈속의 수행> 도표까지 좌악 펼쳐 보여주시니 가려운데를 긁어주시는 느낌! 수희찬탄 합니다. ^_^/
그나저나 자신의 사유에 맞게 욕망의 구도를 바꾼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궁금합니다. 스토아 학파의 양생술과도 관련이 되는 걸까요? "품위있게 욕망하기"라고 샘께서 하셨던 말씀도 생각나고요. 스토아의 세계로 푹 빠져보는 4학기가 될 것 같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