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번뇌, 고통을 경험합니다. 어떤 사건들은 예상치 못하게 느닷없이 밀어닥쳐 저희를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기원전의 고대 그리스 시대나 21세기를 사는 저희나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 중 하나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입니다. 지난 시간엔 연구실 도반이 갑작스런 부고를 당하여 저희들은 마음이 황망하였습니다. 어떤 말로 어떻게 그분을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런 사건이 우리 각자에게 닥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을까요.
샘께서 수업시간에 해주신 이야기가 있었죠. 고대 그리스에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겨우 10살이 된 어린 딸이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때 스토아 철학자였던 에픽테토스가 그 아버지에게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딸이 10년밖에 살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그동안 딸이 곁에 있어 주면서 10년간 주었던 기쁨을 생각하며 감사하라고 말입니다. 딸의 수명이 10년이 아니라 적어도 80년 90년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은 무지라고 말이죠. 죽어가는 딸을 보고 비통해하는 아버지의 귀에 이 말이 제대로 들렸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부디 그 아버지가 조언을 잘 새겨듣고 죽어가는 딸을 평온한 마음으로 보냈기를 바랍니다. 2천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겪는 고통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휘몰아치는 번뇌에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순간순간 일어나는 이런저런 소소한 갈등에 끄달리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3학기에 공부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에 이어 저희는 스토아학파를 공부하며 이 질문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갑니다. 에픽테토스, 세네카, 키케로, 아우렐리우스 등 스토아 학파의 큰 스승들이 남긴 편지와 텍스트, 어록들을 가이드 삼아서요.
3학기에 공부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키워드가 ‘세계는 운동한다’는 것이었다면 스토아 학파의 키워드는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결된 부분의 일부만 변해도 전체가 변하는 세계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지엽적인 사건 하나도 전체의 연결성 속에서 일어나는데 이렇게 존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은 “섭리” 속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하여 이 섭리를 이해하려는 인식론이 논리학으로서 발달하고 이로부터 윤리학이 도출됩니다. 자연학은 이들 사유의 출발이었고요.
인간은 부분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는데 사실 이 부분적인 것이 사실 전체로 보면 연속적이고 필연적이라는 겁니다. 개체의 차원에서 겪는 것은 전체 차원에서 보면 피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운명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무엇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성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섭리’를 이해하는 훈련을 이행함으로써 고통의 예속에서 벗어나 두려움 없고 흔들림 없는 삶이 가능하다고 스토아 철학자들은 말했다고 하지요. 최고의 덕이라고 말해지는 자연의 섭리와 이치가 어떤 것인지, 이 덕을 어떻게 우리 인간도 지닐 수 있는지, 섭리를 따라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앞으로 펼쳐질 스토아 현인들의 지혜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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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근기에는 하근기-중근기-상근기로만 나뉘는 줄 알았는데 이번 구사론에 둔근기와 이근기라는 새로운 표현이 나와서 공통과제와 토론에서 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죠. 상-중-하 근기는 법을 받고자 할 때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를 말한다고 했어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이 마음이 자신뿐 아니라 모든 중생에게로 확장되어 법을 배우고자 하는 상근기의 마음은 고귀해 보이지만 흉내 내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다 아주 잠깐 그런 마음인 것 같다가도,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바퀴벌레, 밉상 정치인을 떠올리면 그 마음이 비눗방울 터지듯 순간 사라져버립니다. 멀었습니다, 아직도 한~참 멀었어요! ㅎㅎ
이근기와 둔근기는 법을 배울 때 그 가르침을 날카롭게 가려보고 정리해서 받는지 아니면 뭉뚱그려 ‘그렇구나!’ 하고 믿어버리는지 차이를 말한다고 합니다. 구사론과 같은 텍스트를 공부하는 건 차곡차곡 갈래를 분류해보고 논리로 따져보는 이근기를 함양하는 공부가 아닐까 하네요.
법에 들어갈 때 자량도를 깨달음의 문이라고 하는데 이 문을 들어갈 때 법의 가르침이 좋다고 믿는 마음을 내어 들어가면 수신행(隨信行)이라고 합니다. 수신행은 둔근기와 연결이 되겠죠. 반면 내가 취하고 싶은 법이 있기 때문에 법을 따라가는 사람은 수법행(隨法行)이라고 하고 이근기와 연결이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자량도에서 선정에 들어갑니다. 선정이란 온전한 집중으로 한 마음에 드는 것을 말하죠. 이때 수법행을 통해 법을 따라온 사람은 법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수신행을 취한 사람은 믿음을 바탕으로 들어가지만 종국에는 이 두 가지가 합쳐져야 ‘법의 흐름에 드는 선정’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깊은 집중인 선정 상태에서는 법의 흐름을 막힘없이 이해하고 체화한다는 뜻이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선정에 들었을 때 선정이 주는 희열이 좋다고 기뻐하는 순간 바로 분별식으로 떨어진다는 거예요. 법의 흐름에 드는 선정을 유지하려면 선정에 대한 탐착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소위 한 번 ‘맛’을 보고 나면 그 맛을 자꾸만 다시 찾고 싶어집니다. 쾌락을 주었던 대상에 반복해서 집착을 일으키는 것처럼요. 선정의 쾌락에 머물지 않고 오롯이 앞으로 정진하게 되면 해탈의 길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 되겠죠.
*** 불교 철학, 9월 28일 4학기 2회 수업 공지입니다 ***
- 구사론 1101~1148쪽까지 읽어 오세요. 공통과제는 이번에 새로운 형식을 시도합니다. 자신의 번뇌인 고로부터 시작해서 고-집-멸-도를 간단히 적어오시는 겁니다. 번뇌가 무엇인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길게 쓰시는 게 아니고 고집멸도에 대한 자신의 사례를 간단히 요약하시는 정도입니다. 스님께서는 이미 저희가 공통과제나 에세이를 통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묵은 번뇌’를 써보기를 권하셨지만 현재 겪고 있는 번뇌를 마주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각자 핵심을 뚫어보실 수 있기를! ^^
- 간식과 청소는 태미샘과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담주 후기는 민호샘~
9월 마지막 수요일에 만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