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기 두 번째 수업엔 모처럼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셨습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 결석 없이 모두 오시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을 가져봅니다. ^^ 사실 이 드문 배움의 시간이 길게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드네요. 앞으로 한 달 하고 2주가 지나면 수업을 마치고 11월에 일찌감치 4학기를 마무리하게 되니 말입니다. 구사론의 첫 장을 넘기며 멘붕이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깨달은 아라한을 논하는 부분까지 왔습니다. 예류향-예류과-일래향-일래과-불환향.... 등등이 경전에 나오면 그냥 그런 경지가 있나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이제는 아라한에 어떤 어떤 종류가 있는지 아라한이 되기까지의 깨달음의 여정은 어떻게 촘촘히 되어있는지 배우고 있습니다. 여전히 4향4과는 이번 생의 저와는 별 상관이 없는 얘기인 듯하지만, 또 한편으론 한 생에 성취를 이룬 성자들을 떠올리며 그분들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 원인과 조건들을 만들어 갔을까 질문하게 되네요.
저희는 이번 시간부터 사성제를 활용한 새로운 형식의 공통과제를 시도했는데 처음이라 그런지 써온 글들이 제각기 달랐습니다. 그래도 토론 시간에 저희들은 서로 번뇌의 지점을 나누고 조언해주며 화기애애한 토론을 이어갔습죠. ^^
저희들의 글을 보시고 스님께서는 고-집-멸-도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고(苦)는 지금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이고, 이 고의 원인으로서 집(集)이 나타나야 합니다. 고와 집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 것이죠. 멸(滅)은 내가 겪는 고를 어떤 방식으로 끝낼 수 있는지, 어떤 대치를 통해서 뿌리 뽑을 수 있는지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도(道)는 멸의 해결을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입니다. 고-집-멸-도가 왜 그러한 순서로 설해졌는가에 대해 스님께서는 그것이 우리의 인식의 순서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죠. 지금 내 앞에 있는 문제를 인식하고(苦) 그것의 원인을 분석하며(集) 해결 방법을 생각해보고(滅) 그런 해결을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道)이라고 말입니다.
사성제가 두 쌍의 인과라면, 우리가 겪는 고통은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우리가 누리는 행복도 원인과 조건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멸성제는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행복의 상태이고 이 행복의 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을 도성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수업 중에 멸성제가 고통을 끝내는 해결 방식이라고 들은 것 같아 멸성제와 도성제와 좀 헷갈리네요. 고통을 끝내는 해결 방식과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둘 다 도(道)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요. (멸-도 part를 잘 이해하신 분 댓글 부탁드려요~)
스님께서는 자신의 고를 바라볼 때는 상처를 확 드러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상처가 숨어있으면 치료하기 힘드니 말입니다. 병이 있으면 분명하게 진단하고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건강한 상태로 되돌리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혜롭게 판단해야 하죠. 사성제를 저희의 삶에 제대로 적용할 수만 있다면 저희의 삶이 보살의 삶일 텐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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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시간에는 스토아학파의 자연학에 대해 심도 있는(!) 강의가 있었습니다. 수업시간엔 샘의 유려한 강의를 따라 고개를 끄덕끄덕하고 걍 넘어가는데 집에 돌아와서 강의안을 살펴보면 새로운 개념과 낯설고도 흥미로운 라틴어 단어들이 우수수 눈에 띕니다. 존재하는 것들과 존재를 둘러싼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철학자들의 사유는 개념을 나타내는 표현들 속에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당시의 언어가 저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하겠지만요. 가령 이번 시간엔 어떤 것들이 ‘혼합’된다고 할 때 이 혼합을 서로 다른 뉘앙스와 의미로 설명하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어떤 혼합은 서로 연접하는 병치(parathesis)이고 어떤 섞임은 완전한 융합(synchysis)으로 서로를 함께 파괴하며, 또 다른 종료의 섞임은 서로 같은 크기로 함께 있을 때 상호침투(antiparktasis)의 상태로 일어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번 시간 수업이 스토아 학파의 ‘자연학’에 대하 부분이라 하나의 전체로서의 우주, 물체들(soma-ta), 능동 근원(pneuma), 우주적 몸체 (corpus universum), 연속체(continuum) 등등의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했는데 여기에서 혼합은 능동근원이라고 불리우는 프네우마와 질료가 어떻게 완전히 섞일 수 있는가? 라는 부분에서 나왔었죠.
스토아 철학자들은 세계는 하나의 생명체로 시간적 질서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는 능동적으로 작용을 가는 것과 수동적으로 작용을 받는 두 가지 근원이 있다고 보았고요. 작용을 받는 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의 공통적인 바탕인 ‘질료(hyle)’이고 (샘께선 이게 일종의 기(氣)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셨죠) 그리고 작용을 가하는 것은 질료 안의 프네우마 (pneuma)입니다. 이 프네우마라는 건 질료에 스며들어 있어서 그것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자 사물을 활성화시키고 구체화 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능동근원 (프네우마)과 수동근원(질료)은 어떻게 서로 섞이는가에서 ‘혼합(krasis)’에 대한 설명이 나왔었습니다. ^^
저는 이 혼합 자체의 개념이 재미있었는데 엉뚱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마치 저희가 온갖 것들과 맺는 관계와도 비슷한 것 같아서요. 어떤 관계는 단지 연접해서 병치되어 자신의 고유한 성질을 바꾸지 않고, 어떤 관계는 자신을 파괴하지만 완전한 융합에 이르기도 하고, 어떤 관계는 자신의 고유한 실체와 성질을 보존하면서도 서로에게 섞여 들어가는 상호침투 같기도 하단 말이죠. 문득 공부란 것도 단지 연접되고 병렬되어서는 우리 자신에게 결코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재의 변이를 일으키는 관계, 공부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되네요. ^^
*** <불교 철학> 10월 5일, 4학기 3회 수업 공지입니다.
- <아비달마구사론 3> 1149-1170쪽 일독해 옵니다. 공통과제는 고-집-멸-도에 자신이 겪는 번뇌의 상황을 대입해서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써봅니다.
- 다음 주 간식과 청소는 미영샘과 경아샘, 후기는 미영샘입니다.
10월 첫 주에 뵙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