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아의 자연학 : 철두철미한 내재적 일원론, corporealism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학이 윤리학과 논리학의 노른자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자연은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 모든 것을 성장하게 하는, ‘자기 동력’을 가진 존재-운동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연학의 주제는 물체(soma : 물질, 신체, 관념을 포함함)와 근원 혹은 원인 그리고 우주를 포괄했습니다. 즉 존재하는 것들과 그것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탐구의 총체가 자연학이었던 것이죠. 스토아의 자연학은 주로 BC 3세기 경 제논과 크리쉬포스에 의해 정리되어 전해졌다고 합니다.
우주는 하나의 전체, 전일한 것(to holon)이자 전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바깥은 허공이자 무입니다. 이 허공은 원자론자들이 원자의 운동 원리로 요청했던 ‘빈 곳’과는 전혀 다르며, 있음의 부정으로서 전체로서 운동하는 우주 밖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세계는 하나의 생명체로서 작동합니다. 시간적 질서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스토아 철학은 그런 하나 된 우주의 움직임, 통일된 질서를 설명하는 두 가지 원리(혹은 근원)를 상정했습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말을 인용해봅니다.
“스토아 학자들은 우주의 두 가지 근원, 즉 ‘작용을 가하는 것’과 ‘작용을 받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용을 받는 것은 무규정적인 실체, 즉 질료(사물의 질료이자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공통적인 바탕)이며, 작용을 가하는 것은 질료 안에 있는 로고스, 즉 신이다. 이것이 영원히 질료 전체에 스며들어 있어서 그 하나하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만물은 능동 근원과 수동 근원의 구성체입니다. 그 두 근원이 서로 갈마들고 서로를 내재하며 사물들을 구체화하고 활성화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질료를 움직이고 질료에 형체를 부여하는 힘인 능동 근원(원인, 로고스, 신, 프네우마-숨, 영혼 등)이라고 해서 신비한 무언가라고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능동 근원도 물체적이라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독특함이었죠. 로고스, 신, 숨, 불은 모두 질료의 분리불가능한 성질입니다. “작용을 가하고 작용을 받는 것으로서의 질료와 신은 모두 물체soma”라고 제논은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계 안에서 성장하고 소멸하는 것들 일체는, 나아가 우주의 인과연쇄 전체는 신의 자기 전개에 다름 아닙니다. 두 원리는 결국에는 하나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개념이지요. 하나인 우주적 몸체 스토아적 유물론 혹은 스토아적 일원론, corporealism입니다.
이는 앞서 배웠던 원자론의 유물론과는 또 다른 유물론입니다. 원자론의 기본은, 우선 존재의 최소치인 낱낱의 원자들이 허공 속을 운동하다가 서로 마주치는 사건에 의해 만물이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논의입니다.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기원이나 숙명론과 구분 짓기 위해 운동의 근원적 원리인 클리나멘이 원자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얘기했죠. 채운샘께서는 스토아학파가 보기에 이러한 에피쿠로스의 논의는 조금 번거롭게 보였을 수 있다고 얘기하셨습니다. 스토아는 원자, 허공, 클리나멘을 거치는 게 아니라 단번에 일원론으로 나아갑니다. ‘모든 것은 작용하고 작용 받는 원리 속에서 각각 발현되고 있는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죠.
강의를 들으며 힌두교의 경전 <바가바드기타>가 떠올랐습니다. <기타>에서도 하나인 신 브라흐만에 의해 전개되는 일자적 우주가 시간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그 안에서 무규적적인 질료적인 실체 프라크리티와 만물의 프라크리티를 작동시키는 숨결이자 영혼으로서의 프루샤라는 두 원리가 성립됩니다.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세계를 결코 낱낱의 것이 아닌 하나로 보고, 서로를 함축한 두 원리가 만물을 빚어낸다고 보는 점은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학설이 정리된 시기도 기원전 4~3세기로 엇비슷하네요. 스토아의 이러한 유물론-일원론적 자연학이 어떤 윤리들로 이어질지 기대됩니다.
현관에 드는 순서와 4향 4과
저희는 <아비달마구사론>의 ‘분별현성품’을 배우고 있습니다. 고집멸도 사성제 중 ‘도제’에 해당하는 부분이죠. 지난주까지는 견도의 가행론에 대해 배웠습니다. 견도란 온갖 지식으로 잘못 아는 소견을 여의고 ‘이전에 보지 못한 것을 보는’ 자리라고 합니다. 가행 혹은 가행도란 모든 현상에 대한 공성을 관하면서 거기에 지(止)를 결합한 수행의 단계를 이루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견도의 가행으로서 부정관과 지식념을 배웠었죠. 그리고 별념상주, 총념상주를 배우고 난선, 정선, 인선, 세제일법 등 4선근을 배웠습니다. 세제일위에 이르면 현관할 수 있게 됩니다. 현관이란 확실하게 보아서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경지입니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견도의 시작입니다.
깨달음의 단계는 크게는 견도와 수도가 있고 이것을 나누면 16심(4제 16행상)이 있습니다. 왜 16이냐하면, 욕계 고집멸도 4제에 대한 인(忍)과 지(智) 8단계와 상계 고집멸도 4제에 대한 인과 지의 8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이란 무간도로서 진리 앞에서의 두려움을 참으며 밀어붙이는 단계이고, 지란 해탈도로서 번뇌를 뿌리 뽑아 알게 된 경지입니다. 인은 도둑이 있는지 샅샅이 뒤지는 단계로, 지는 도둑이 없음을 알고 문을 걸고 단도리하는 단계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욕계의 인과 지를 법인과 법지라고 하고, 상계의 인과 지를 류인과 류지라고 합니다. 그렇기에 16행상을 순서대로 하면 고법인 고법지 집법인 집법지 멸법인 멸법지 도법인 도법지 고류인 고류지 집류인 집류지 멸류인 멸류지 도류인 도류지입니다. 이것이 현관에 드는 순서입니다. 15번째인 도류인까지가 견도이며 16번째 도류지가 바로 수도입니다.
견도 이후 수도에서부터 네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1)깨달음의 흐름에 들었음을 뜻하는 예류(최대 7번 더 윤회할 수 있음), 2)한 번 더 욕계로 태어난 후 깨닫는 일래, 3)더 이상 욕계로 윤회하지 않는 불환, 4)그리고 아라한. 이 수준마다 거기까지 이르는 단계인 향(向)과 성취한 상태인 과(果)가 있기에 이를 4향 4과라고 부릅니다. 견도에 해당하는 15번째 마음까지를 예류향이라고 하고, 16번째 마음이 도류지에 도달한 상태를 예류과라고 합니다. 비로소 수도에 이르러서야 7번 이하의 윤회 끝에 깨닫게 되는 경지를 성취하는 것이죠.
차제증과 초월증
“이상에서 설한 4향 4과의 성자의 단계는 무루도가 증진되어 나아가는 순서에 따른 것으로, 이를 차제증(次第證)이라고 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수소단의 번뇌는 반드시 무루도에 의해서만 끊어지는 것은 아니며, 유루 세속도에 의해서도 끊어진다. 따라서 일찍이 이생위에서 수소단의 번뇌를 끊은 이가 견도에 들어 제16 찰나에 이르게 되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나 불환과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를 초월증(超越證)이라고 한다.”(권오민, <아비달마불교>, 4장)
불교의 깨달음이 궁극적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모든 수행을 불교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을 닦는 방법은 고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방법으로 행해져왔습니다. 부처님만 해도 여러 스승들 밑에서 고행 수련들을 했었으니까요. 그러한 수행들로도 욕계의 많은 번뇌들을 끊을 수 있습니다. 그 다양한 수행들은 계기로서 그리고 하위 단계의 경지의 성취로서 탁월하긴 해도 최종적 깨달음으로까지는 이끌어줄 수 없기에 불교 입장에서는 그것들을 유루의 세속도라고 부릅니다. 유루의 세속도로 욕계의 수혹 일부 혹은 전부를 끊고 난 후에, 견도와 수도에 들어서 나머지 수혹을 끊는 것을 ‘초월증’이라고 합니다. 탐욕을 여의는 것을 먼저 행했다고 해서 ‘이탐선행’이라고도 하죠. 한발 한발 탈속의 길을 나아가는 차제증에 비하면, 초월증은 종의 우회 전술이라고 할 수 있네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초월증이셨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이렇게 저렇게 여러 생 동안 여러 구석에서 수련의 계기들을 만나온 이상 많은 수행자들도 초월증이 아닐까 합니다.
강의에서는 초월증과 차제증의 순서와 차별에 대해 배웠는데요. 소단, 종성, 근기, 소의 등에 의해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것이 정말 많은 사람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선에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소승의 아라한은 아주 다양합니다. 대승의 아라한과는 전제 자체가 다르기에, 아라한이 화를 내거나 뭔가 부족해 보인다고 해서 무턱대고 비난해서도 안 됨을 알려주셨습니다.
"현관이란 확실하게 보아서 더 이상 물러남이 없는 경지입니다." 어떻게 확실하게 보고 이해하면 물러남이 없을 수 있는 건지... 물러남을 종종 경험하는 1인으로서 궁금해집니다. ^^;;
규문 후기의 달인 민호샘~ ^^ 수업 중의 뽀인트를 짚어주신 친절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