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멸-도라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저희 자신이 당면한 번뇌에 대입시켜 구성해보는 글쓰기가 요즘 불교팀의 공통과제입니다. 그래서 토론시간엔 서로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시간이 부족할세라 왁자하게 이야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옆 방에서 나누어 토론하는 1조도 시끌벅적한 걸 보면 비슷한 분위기인듯하죠. ㅎ 어려운 구사론의 개념들을 붙들고 이것이 맞느냐 저것이 맞느냐를 논의하던 토론과는 달리, 다른 도반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걸 어떻게 풀어볼 수 있을까 궁리하는 자리에서 저희들의 집중도가 훨씬 높은 것 같네요. ^^
그런데 저희들의 이런 성향을 똬악(!) 파악하신 스님께서 토론 중 다음의 유의사항을 꼭 지키라고 하셨어요.
고: 함부로 공감하지 않는다.
집: 논리적 인과관계를 따진다.
멸: 4종 대치력등을 <구사론>에서 찾는다.
도: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함부로 공감하지 말라는 말씀이 어찌나 찔리던지요 ㅋㅋ 토론하다 보면 도반들의 고민에 “오, 완죤 공감!”하고 손을 번쩍 들고 싶어진단 말이죠! 그런데 도반들이 서로 해줘야 할 것은 단순한 공감에 그치는 게 아닙니다. 도반이 번뇌 가득한 산 속 한가운데에 있다고 한다면 도반들은 그가 안에서 보지 못하는 산 전체의 모양새가 어떠한지를 알려줘야 합니다. 또한 하나의 문제를 고민하다 보면 여러 문제가 뒤섞이기 마련인데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번뇌와 그 원인이 되는 인과에 문제가 있다면 논리적으로 짚어주어야 합니다. 멸-도의 부분에서도 대치가 되는 부분과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토론해 보라고 하셨고요.
저희는 각자의 글에서 드러나는 고가 무엇인가를 가지고도 한참을 씨름하느라 짧은 시간 안에 멸-도까지 가는 길이 좀 요원했습니다. 그래도 서로가 고민하는 상황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그랬는지 뭔가 진지하고 끈끈한(^^) 시간을 보낸 느낌이 있더라고요. ㅋ
멸제와 도제에 관한 질문에 대해선 스님께서 직접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법문을 인용하며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번뇌란 원래부터 그렇게 있는 게 아니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것이죠. 이것을 이해한다면 번뇌가 없어질 수 있고 이것이 대치력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멸이란 번뇌가 완전히 없어진 그 자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하자면 화살의 끝부분부터 화살촉까지 화살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현현해야 하는 멸제”란 본래는 존재하지 않던 번뇌가 대치로써 멸하게 되는 과정 전부를 의미한다는 겁니다. 화살의 촉만 보면 번뇌가 사라진 멸이지만 화살은 화살 촉뿐 아니라 화살의 끝부분과도 하나인 것입니다. 만약 화살의 촉이라는 ‘멸’ 그 자체만 본다면 이것을 공(空)처럼 여길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멸제는 번뇌의 소멸을 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음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번뇌의 소멸을 획득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계과(離繫果)가 되는 것이고요.
도제는 말 그대로 한 발 한 발 쉬지 않고 가는 길(道)입니다. 멸제에서 본 대치력을 바로 지금 내 발아래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번뇌와 그 원인 그리고 그것을 멸할 수 있는 바를 알았다고 한다면 도제에서 그럴 수 있는 조건을 스스로 하나하나 갖추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힘들게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마치 향내가 옷에 스며들 듯이 자연스럽게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계속 길을 가는 것을 ‘정진’이라고 하고요.
수업 시간엔 깨달음에 이르는 37 조도품에 대해 배웠습니다. 궁극의 보리에 이르는 37가지 법이라는 의미에서 37 보리분법이라고도 합니다. 이게 초기 경전을 볼 때 아주 많이 반복해서 나왔던 게 기억나네요. 4념주, 4정단, 4신족, 5근, 5력, 7각지, 8정도 등등 각각의 수행 덕목은 내용상 서로 비슷한 것도 있어 보이는데 각각이 중요한 수행 체계처럼 보입니다. 스님께서는 37 조도품의 각 내용은 저희가 앞서 배웠던 5별경과 관련이 된다고 짚어주셨죠. 중생의 거친 몸과 말과 마음을 어떻게 수행으로 차근차근 길들여서 정진해 나아갈 수 있을지 37조도품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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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시간에는 스토아학파를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샘께서는 매번 저희가 서양 고대 철학사를 공부하며 어느 지점 즈음에 있는가 혹은 이런저런 철학사의 맥락에서 어떤 질문을 던질 수 있는가를 짚어주시는 인트로로 강의로 시작을 하시곤 합니다. 이번 시간에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들, 가령 시간, 공간, 물체, 인식... 등이 어떻게 발생되고 문제화 되었는가를 말씀해주셨어요. 고대 철학을 훑듯이 공부하면서 저는 어떤 철학자나 학파가 무슨 주장을 했고 그 핵심이 무엇인지에만 신경을 썼단 말이죠. ^^;; 그런데 샘께서는 고대 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며 각각의 기본적인 개념이 어떻게 발생했는가의 관점에서 하나의 맥을 잡아주셨습니다.
가령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게는 공간(허공)을 지칭하는 ‘케논’(keno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물체와 물체 사이의 틈을 지칭하고, 스토아에게는 물체의 바깥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저희는 ‘공간’이라고 하면 space, place 등을 떠올리는데 같은 ‘공간’이라고 해도 어떤 표현을 쓰느냐에 따라 함께 떠올리는 사유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이전에도 철학자들은 공간에 관련된 개념들을 언급했습니다. 헤시오도스는 만물이 생겨나는 바탕이자 질서가 자리 잡기 위한 터전으로써 ‘카오스(chaos)’를 말했다고 합니다. 카오스는 규정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뒤섞인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그 원류는 공간성이었단 말이죠. 그리고 플라톤은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모태로서 ‘코라(chora)’라는 개념을 언급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물체가 점유하는 공간으로서 ‘토포스 (topos)' 를 설명했다고 합니다.
철학자들은 왜 이렇게 각자 다른 개념을 말했을까요? 그들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와 그로부터 개념화하고 사유하는 지점이 달랐기 때문이었겠죠. 공간이라는 개념뿐만이 아니라 시간, 물체, 인식 등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기초적인 개념들이 어떠한 문제 제기에 관련해서 등장하고 그에 관련해서 어떤 식으로 인식이 전개되어 나갔는가... 샘께서는 이런 지점들을 보라고 하셨죠. 결국 철학자들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유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생각들을 개념화해갔던 것이겠죠. 공간, 시간... 이렇게 아주 근본적인 것들에서부터 말입니다.
이렇게 샘께서 짚어주신 서양 고대 철학의 맥을 따라가다 보니 문득 저 스스로 무척 게으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을 이해하고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자들은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낯설게 질문하고 사유하고 궁구하기를 멈추지 않았단 말이죠. 저는 이미 발견된 진리를 편안하게 앉아서 듣고 있으면서도 그닥 절실하게 사유하지 않으니 이런 게 게으른 게 아닌지... 부끄러워집니다. -.-;;
*** <불교 철학> 10월 12일, 4학기 4회 수업 공지입니다. ***
- <아비달마구사론> 1171-1222쪽 읽어오세요. 이번 주에도 자신의 문제로 고-집-멸-도를 작성해 봅니다.
- 간식과 청소는 민호샘과 윤순샘, 후기는 기웅샘.
다음 주 수요일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