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철학> 스토아의 자연학(2)
세계 속에서 작용하고 작용을 받는 모든 것은 물체입니다. 그러므로 음식물이 침투하고 다른 생각들이 침투하는 신체와 영혼도 물체입니다. 반면 허공은 스토아학파에게는 물체의 바깥, 즉 물체가 놓이지 않는 것으로 물체와 혼합되지 않기 때문에 비물체적입니다. 크뤼시포스는 혼재되어 쓰이던 혼합의 개념을 정리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혼합은 전일적 이여야 합니다.
전일적 혼합이란 섞이지 않고 나란히 있어 변화를 야기할 수 없는 병치도 아니고 자기를 잃어버린 상태로 어떤 것이 되는 융합도 아닙니다. 어떤 것과 새롭게 구성하고 있지만 뒤섞이기 이전의 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혼합의 과정에서 큰 것이 작은 것을 흡수한다고 하면 최종에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호 침투에 의해 뒤섞여 변형이 되면서도 다른 것에 자기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 완전 혼합에 의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세상은 완전한 혼합체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를 다양성이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 변형을 계속하는 이유라고 봤습니다.
어떤 것이 접속을 하면 그것에 대해 표상을 갖습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관념은 그 사물과 닮아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 관념은 임시로 만들어 붙인 것입니다. 표상은 판타지아(phantasia)로 임시로 갖다 붙인 것을 실체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제화 한 것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입니다. 그들은 표상과 그에 따라 생긴 정념(pathos)이 문제라고 생각 했습니다. 우주는 무구한 작용의 세계인데 여기다가 붙이는 판타지아와 파토스를 문제의 근원이라 파악하고 어떻게 여기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을 도출했습니다.
프네우마(숨, 호흡, 에너지, 신, 불 등을 의미함)
스토아학파는 프네우마를 물체들이 분리되지 않고 묶일 수 있도록 하는 힘. 우주의 연속성을 만들어 내는 힘으로 봤습니다. 모든 물체들에게 각기 근원적인 에너지인 프네우마가 있어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말도 이 시대에 처음 쓴 말은 아닙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영혼, 개체들을 이어주는 끈 같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의 운동, 감각을 주관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히포크라테스는 생명유지와 성장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힘, 즉 개체를 이어가게 하는 생명력으로 봤습니다. 크뤼시포스는 생명력을 이어가게 하는 힘으로써 긴장운동을 강조합니다. 마치 음양이 상호작용해야 뭔가 만들어 지듯이 서로가 서로를 전제해서 움직이는 힘으로 봤습니다. 쌤은 일종의 원심력, 구심력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자기 것으로 끌어들이는 힘과 다른 것에 이끌리는 힘의 작용에 의해 자기를 존속할 수 있습니다. 나이기를 바라는 충동과 나 자신이 아니고자 하는 충동이 동시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에 따르면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것 같은 물체도 긴장운동을 통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물체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것이 우주의 프네우마이며, 상호 연쇄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므로 부분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우주 전체가 함께 겪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떨어진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물들에 대해서도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도 공감으로 얽혀있습니다. 그러기에 개인만의 행복이 있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스토아학파가 강조한 자기배려는 자기를 계속해서 관통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 공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어떻게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갈 것인가와 연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토아학파에게 우주적 프네우마는 공감이며, 만물이 하나의 연속체로 혼합되어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공감 속에 존재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불교철학>
멸과 도의 차이
멸도(滅度)는 끊어야 할 바를 끊은 이계과의 공덕입니다. 이것은 우선 유정들의 때(번뇌)가 얼마든지 간에 일시적인 성질의 것이라 그 반대쪽의 행을(대치)하면 다함이 있을 수 있다는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해야하는지를 제대로 알고 4성제를 수행하여 이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멸성제를 화살로 비유하면 번뇌소멸이라는 결과에만 치중하여 화살촉만을 주시하는데 그 꼬리부분이 있어야 멸도는 성제가 됩니다. 화살의 전부를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꼬리에 해당하는 것이 번뇌는 우리의 힘(사용과)으로 없앨 수 있음을 알고 수행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제에서 멸도를 쓸 때 4종대치력 등을 <구사론>에서 찾아 써보라는 스님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도(道)는 우리가 지금 행할 수 있는 바를 찾는 것으로 그 시작은 내 발밑, 즉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 때가 없어지는지 알지만 상황에 따라 당장 없앨 수는 없습니다. 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갖춰나가야 합니다. 조건들을 갖추게 되면 저절로 깨달음의 길이 됩니다. 도의 다른 말은 정진(精進)입니다. 정진은 깨달음의 길을 한발 한발 기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가신 길을 본받고 따르며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행을 취하고 익히며 길들이는 과정을 기쁜 마음으로 겪는 것입니다.
네 가지의 도
일체의 도를 간략히 설하면 가행도와 무간도, 해탈도와 승진도가 있습니다.
가행도는 번뇌를 끊기 위한 준비단계로 이것으로부터 무간에 무간도가 생겨납니다. 무간도는 마땅히 끊어야 할 장애를 능히 끊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해탈하면 멸성제를 성취해서 윤회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의 해탈은 지금 나를 묶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남을 말합니다. 벗어났으나 번뇌의 뿌리는 뽑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그대로 있게 됩니다. 설일체유부에서 해탈을 이러한 두 가지 의미로 설하는 이유는 후득지(선정에서 나와서 거기서 닦은 마음을 기억해내고 일상을 영위하며 계속 사찰하는 것)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탈도와 승진도는 해탈하고 나서 생겨나는 도로 그 행위의 찰라 제1초를 해탈도라고 하고, 2찰나 이상으로 뭔가 더 도모하고 이행하고 있을 때는 승진도라고 합니다.
가행도, 무간도는 번뇌에서 온전히 벗어나서 좋은 집으로 가는 길이고, 해탈도, 승진도는 그 두 길보다 행의 차별을 일으키면서 상위로 가는 길로 이것이 생기면 무루에 들어가게 됩니다.
37보리분법
도를 일컬어 보리분법이라고도 합니다. 번뇌의 다함과 나지 않음은 아는 것은 보리인 것과 그것의 어울림뿐이기에 어울리는 부분을 이름을 통해서 37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37보리분법은 5별경(욕, 승해, 염, 정, 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5별경은 대상을 인식하는 힘으로 번뇌의 자리에서 수행을 통해 멸도를 이룰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반대되는 믿지 않음, 게으름, 잊어버림, 산란함, 알아차리지 않으려는 마음을 피하고 버리면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가야 합니다. 5별경에서 욕은 하고자 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길에서는 정진의 의미가 되며, 승해는 수승한 이해로 지혜를 성취했을 때 신(信)으로 바뀌게 됩니다.
-37보리분법의 구성
4념주: 身, 受, 心, 法의 본질을 닦는 것.
4정단: 단단(이미 일어난 악법을 끊음), 율의단(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법을 생겨나지 않게 함)
수단(아직 생겨나지 않는 선법을 생겨나게 함), 수호단(이미 생겨난 선법을 지속하고 증장함)
4신족: 공덕을 성취하는 발이 신통이다. 욕(欲), 근(勤), 심(心), 관(觀).
5근 · 5력: 신(信), 정진(精進), 염(念), 정(定), 혜(慧). 5근은 뿌리로 갖추고만 있어 열매를 맺을 힘은 없으나 싹을 틔울 근간으로서 수행을 지키기에 충분하므로 5청정근 이라고 합니다. 5력은 깨달음의 길에 어울리지 않는 것을 쳐낼 수 있는 힘을 갖춘 것을 말합니다.
7각지: 염, 택법, 정진, 희, 경안, 정, 사각지.
8정도: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37가지를 어떤 이는 성상에 따라 가른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유부에 대한 다른 이의 견해로 실제적 본질인 다음의 10가지로 37가지를 분류한 후 30가지 실유과 7가지 가유로 나눕니다.
신(信): 신근, 신력
근(勤): 4정단, 정진근, 정진력, 정진각지, 정정진
염(念): 염근, 염력, 염각지, 정념
정(定): 4신족, 정근, 정력, 정각지, 정정
혜(慧): 4념주, 혜근, 혜력, 택법각지, 정견.
사(捨): 사각지
희(喜): 희각지
계(戒): 정어, 정업, 정명
심(尋): 정사유
경안(輕安): 경안각지
신, 근, 염, 정, 혜에 해당하는 30가지가 실유이고, 사, 희, 계, 심, 경안에 해당하는 7가지를 가유로 구분합니다.
-4정단은 선법을 증장시키고 악법을 여의려는 수행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5가지의 허물을 벗어나야 합니다. 5가지 허물이란 해태, 가르침을 잊는 것, 도거와 혼침, 행을 하지 않는 것, 행을 하는 것입니다. 해태는 ‘지금은 안가, 저것 먼저하고 가야지, 나는 못가, 내가 왜가, 등으로 선을 닦지 않고 악을 방지하지 않는 허물입니다. 스승님께서 내려주신 구결(나의 조건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수행을 가르쳐주신 것)을 잊는 것도 허물입니다. 도거는 강한 마음을 일으켜 마음을 쉬지 못하고 들뜬 상태입니다. 혼침은 거친 것과 미세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거친 혼침은 아무생각 없이 흐리멍덩한 상태이고, 미세한 혼침은 자신의 생각에는 집중하고 생생하게 잘 듣고 있는데 옆에서 볼 때는 자고 있는 것 같은 상태입니다. 마음을 너무 미세하게 써서 몸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상태로 수행자들이 빠지기 쉬운 혼침입니다. 미세한 혼침은 도반이 없으면 절대로 모르기 때문에 공부를 할 때는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정에 들어가 맛을 보려하거나, 미세한 혼침에 들어가기 직전 알아차렸을 경우에는 바로세우는 행을 해야 합니다. 이때는 행을 하지 않으면 허물이 됩니다. 반대로 선정에 집중을 잘하고 있을 때는 다른 것에 끄달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때는 행을 하면 허물이 됩니다.
37보리분법은 어떠한 단계에서 증가하는 것인가?
설일체유부는 자량위-가행위-견도위-수도위-무학위. 5단계의 수행론을 제시합니다.
처음으로 업을 닦는 단계인 자량도에서 4념주를 닦습니다. 가행도의 난위에서는 4정단, 정위에서 4신족, 인위에서는 5근, 세제일위에서는 5력, 견도에서는 8정도, 수도에서는 7각지를 닦습니다. 대승에서는 4정단을 견도에서 닦습니다. 단(끊음)인 멸제는 견도에서 성취하며 여기서부터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부는 견도에서 8정도를 닦습니다. 왜냐하면 유부에서는 8정도의 정견을 견도에서 알아야할 바를 아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을 미래형으로 보기 때문에 4정단을 난위에 놓을 수 있습니다. 4신족도 대승에서는 견도위에 놓지만 유부에서는 견도와 1초밖에 차이가 안나는 세제일법 이후는 행을 닦을 수가 없기 때문에 끝까지 밀어붙여 두려움을 이겨내고 선근의 물러남이 없는 단계인 정위에 4신족을 놓습니다. 대승에서는 난위와 정위에 5근을 인위와 세제일위에서 오력을 닦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유부와 대승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수도위에 후득지가 없고, 있고의 차이입니다. 후득지가 있는 대승은 7각지를 견도에서 닦고, 8정도를 후득지에서 닦을 수 있지만, 후득지가 없는 유부는 견도에서 8정도를 닦을 수밖에 없으며 세속에서의 수도로 선정을 닦을 수 있기 때문에 7각지를 수도에 놓을 수 있습니다.
오, 미영쌤~ 모범생의 노트를 보는 듯한 후기 감솨합니다! 일주일만에 희미하게 아스라해지려던 수업 내용을 샘 덕분에 요로콤 다시 머릿속에 붙잡아 둡니다요. ^^;;
37 보리분법을 저희랑은 상관없는 먼 얘기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저희들의 공부와 수행의 자리로 데려와 좀 친해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만.... 아직 쫌 어렵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