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대철학 시간에 배우는 내용들을 불교에서 배운 관점과 연결시켜볼 수 있는 부분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vs 스토아 학파의 논리학에 대해 배웠는데요, 이들이 언어를 바라보는 관점이 존재와 세계는 매순간 변화하는 것이며 결코 단일하고 항상적인 것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불교의 관점과 연결지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는 언어는 우리가 의식하고 사유하는 방식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통상적인 사유란 언어로 한계 지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죠. 불교에서는 언어가 끊어진 세계, 언어 너머의 세계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언어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속에서 궁구할 수 있는 모든 디테일한 방편을 통해 진리의 가르침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합니다. 서양의 고대 철학자들은 언어로 표현되는 명제들 속에서 어떤 논리적 사유를 이끌어 냈을까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명제를 구성합니다. 이때 명제를 구성하는 본질은 주어(명사)가 되고, 무엇이 있다고 할 때의 ‘있음’이라는 술어(동사)는 주어에 귀속됩니다. 술어를 주어에 귀속시킨다는 것은 주어를 중심으로 해서 존재론적으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언어가 표현하는 바란 주어의 본질을 정의하고 주어의 실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되고요. 주어-있음의 명제가 아주 선명해지는 방식이죠. 이것은 우리가 언어로 어떤 표현을 할 때 의식, 무의식적으로 이 세계를 분절화시키고 규정시키는 것과 연관이 됩니다. “OO은 OO이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OO라고 표현된 세계와 존재가 정말 그렇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실제 세계는 그렇게만 존재한다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언어를 통해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는데 거꾸로 언어를 통해 세계가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는 전도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거죠.
스토아학파는 이런 관점을 전복시킵니다. 스토아의 관점에서는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 언어 자체의 동일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의 역할을 하는 명사가 어떤 상황에 있는가를 언어가 표현해 내느냐 입니다. 가령 ‘괴물’이라고 하는 단어는 같은 말이라고 해도 어떤 상황과 행위 속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전달하게 됩니다. 어떤 표정이나 행위, 상황에서 말이 발화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스토아의 관점에서는 사물의 존재를 단순히 지시하고 규정하는 것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각 사물들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의미(lekta)화해낼 것인가가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운동 중인 이 세계 속에서 어떤 상태로 규정된 존재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가 중요했던 것이죠.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삶을 긍정화할 것인가라는 사유와도 맞닿게 되고요.
스토아의 철학자들은 “운명을 받아들여라”라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이 의미는 수동적으로 운명을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운명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그렇게 결정된 채로 바뀔 수 없는 상태로 있는 게 아님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물질들의 혼합과 뒤섞임으로 운동하는 이 세계는 그것이 어떻게 의미화되는가와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세계를 규정하고 한정 지으려고 한 것과는 반대라고 볼 수 있죠.
스토아의 철학을 가장 잘 계승했다고 하는 조에부스케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이 분은 “나보다 먼저 상처가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죠. 내가 이렇게 있어서 내 몸에 상처를 입는 사건을 겪는 게 아니고, 생성하는 세계 속에서는 나보다 먼저 사건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조에부스케의 말을 거꾸로 바꾸면 ‘내가 사건보다 먼저 있다’가 됩니다. 어떤 사건을 겪을 때 그것을 겪어내는 내가 먼저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죠. 실은 이런 방식의 사유에 우리는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내가 이렇게 있고, 이렇게 있는 내가 무엇을 한다고 여기는 것 말입니다. 이런 생각에는 내가 내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동네 한 바퀴를 산책하는 것도 나 자신이 내 의지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날 오전의 날씨, 며칠 전 걷기가 건강에 좋다는 유투브를 본 것, 아파트 위층의 공사 때문에 나는 소음을 피하고 싶은 것, 산책을 나가지 못하게 막는 다른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은 것 등등이 모두 작용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산책을 나간다는 사건이 일어나죠.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어쩌면 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잠재태로 있는 조건 속에 자신을 두는 것이 아닐까요.
구사론 시간에 스님께서는 아집(我執)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 이 부분도 조에부스케의 사유와 연결지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집은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의지적인 힘으로 움직인다는 믿음입니다. 저는 아집을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 수많은 조건들과 관계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여기서 저기로 움직이는데 그렇게 움직이는 힘을 지닌 내가 있다고 보는 것 말입니다. 하여 내 의지와 힘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아집의 반대 개념은 ‘인무아(人無我)’가 됩니다. 아집과 헷갈리지 않게 유의해야 하는 개념으로 상견(常見)이 있습니다. 상견이란 과거-현재-미래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가 있다는 믿음입니다. 1초전의 나와 1초 뒤의 내가 변하지 않고 항상하다는 생각이죠. 그러므로 상견의 반대는 무상(無常)입니다. 그러고 보니 앞서 서양철학에서 언급한 언어 명제의 문제, 그러니까 “내가 있다.” “나는 존재한다.”라는 습관적 언어의 사용이 우리의 사유를 편향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와 닿네요.
스님께서는 아만(我慢)도 언급하셨습니다. 만이란 뭐든지 내가 다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탐심과 어리섞음이 합쳐져 일어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아만은 어떻게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자신을 가르쳐주시는 스승을 생각하고 자신을 스승 아래 낮추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희들은 조금만 뭘 알아도 ‘내가 좀 알거든..’ 하는 태도를 취하기 쉬운데, 수업 중에도 스승님의 사진을 보시고, 늘 스승님께 배운 바를 전달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씀하시는 스님께서는 아만을 다루시는 수행을 늘 하고 계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럼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스승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의 입장과 타인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훈련을 함으로써 자기중심적인 만심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구절을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아무렴 스승이 없을 리가요! 저희들이 읽는 텍스트 속 지혜의 언어를 남긴 수많은 선지식들과 철학자들이 또한 저희들의 스승이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 불교철학 10월 19일, 5회 수업 공지입니다 ***
- <아비달마구사론 4> 1223-1265쪽 읽어오세요. 공통과제는 고-집-멸-도로 써보는 마지막 글입니다. 이번엔 고-집에서 인과를 객관적으로 살피고 멸-도에서 무너지지 않기를... 모두 파이팅. ^^
- 담주 간식과 청소는 호정샘과 혜윤샘, 후기는 현정샘입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만나요~
윤지샘! 불교와 서양철학을 잘 연결하여 읽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와닿도록 정리해주셨네요 샘의 글을 읽으니 우리의 삶과도 매칭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나 자신의 삶을 드려다 보게됩니다. 훌륭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