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4학기도 절반이 지나갔습니다. 슬슬 에세이가 다가오네요. 이제 시동을 걸어봐야 할 텐데요...! 주제는 세 가지였습니다. 일체개공, 제법무아, 제행무상. 채운샘께서는 일 년 간 배운 모든 것을 활용하되, 반드시 자신의 언어로 풀어쓸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공, 무아, 무상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자꾸만 고집하게 되는 有, 我, 像을 찾는 일에서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11.8) 공지부터 드리겠습니다.
1) 낭송 텍스트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11장, 12장(295~342쪽)까지 읽고 옵니다.
2) 세미나 텍스트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7, 8, 9장(128~195쪽)까지 읽고 옵니다. 발제는 김자영 선생님과 정은이 선생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3) 간식은 이기웅 선생님, 김경아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김자영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중사도와 상사도 : 보리심과 자타불이(自他不二)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 9장의 제목은 ‘소승의 수행, 중사도’입니다. 중사도는 “모든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 해탈을 반드시 성취해야만 한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정진하는 중근기의 수행길입니다. ‘이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람으로 천상계(혹은 조건 좋은 인간계)의 삶을 꿈꾸는 하사도와 달리, 중사도는 “천상계와 그 아래 인간계 또한 고통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자각 속에서 정진합니다. 그렇기에 하근기와 중근기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고’의 문제를 얼마나 통찰하는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의 고통과 삼선도(천상, 수라, 인간)의 고통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떤 점에서 공통될까요? 세미나 시간에 저희는 불교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층위들을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사성제의 첫 걸음인 고성제는 고고(苦苦), 괴고(壞苦), 행고(行苦)로 요약되는데요. 고고는 생로병사를 겪는 누구라도 느낄 수 있는 아픔과 불편입니다. 괴고는 ‘무너지는 고통’으로 제행무상한 연기 속에서 뭔가를 붙들고자 하는 습성과 함께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것과 해어져야만 하는 애별리고, 미워하는 것과 만나야만 하는 원증회고,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구부득고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저희는 이것이 지성이 발달한 인간(양원적 인간보다는 주관적 인간)에게 강력하게 나타나는 괴로움이 아닐까 이야기도 나누어보았습니다. 행고는 오온으로 이뤄진 존재이면서 ‘아집’을 갖는 한 발생하는 “만연하는 괴로움”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이렇게 말씀하시죠.
“모든 불완전한 생명의 기저에 있는 알아차리기 힘든 미세한 괴로움이며, 쇠락과 소멸을 기반으로 하는 모든 윤회 중생의 공통적 특징이다. 가장 높은 천상의 신, 인간, 동물, 및 지옥과 아귀 중생들은 모두 괴로움의 그물에 얽매여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몸과 마음의 본성 자체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윤회의 과정에 매어 있기 때문이다.”(250쪽)
하여 가장 근본적인 행고는 삼선도든 삼악도든, 욕계든 색계든 항존합니다. 바로 이 근본적이고 미세한 괴로움에까지 초점을 맞출 때에야 윤회로부터의 해탈의 원을 세우고 정진할 힘을 얻는 것이죠. 이것이 중사도의 고귀한 수행 동력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열반의 존재, 아라한을 성취하지요.
하지만 달라이라마는 그보다 더 수승한 근기인 상사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일체지의 성취’를 목표로 합니다. 여기에 또 다시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뛰어난 스승 나가르주나께서는 “일체지를 구하는 자에게 보리심은 여의주와 같다. 수미산만큼이나 흔들리지 않으며, 연민의 마음으로 시방세계에 기쁨을 주며, 대상과 주체를 동떨어진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 불이의 지혜와 합일해야 한다.”고 말슴하신다.”(261쪽)
상사도의 목표는 보리심 혹은 보살심을 베이스로 합니다. 아라한은 그것 없이도 삼학만을 닦는 것으로 가능하지요. 저는 이 대목에서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대체 아라한에게 보리심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만약, 보리심이 “대상과 주체를 동떨어진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 불이의 지혜”, 즉 자타불이의 지혜라면, 무상 무아의 연기를 깨달은 아라한 역시 자신이 타자와 둘이 아님을 이해하셨을 테니, 보리심을 가져야만 하는 것 아닐까? 상사도만의 수승함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서는 대승과 소승의 역사적 배경과 입장을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토론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달라이라마의 이런 말씀이 도움이 될 것 같아 인용해봅니다.
“열반에 머무는 분들은 번뇌의 망상을 끊고 이에 따라 윤회로부터 자유로우시다. 그분들은 최상의 진리, 진제에 오롯이 집중하는 삼매에 머무실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무한한 세계를 동시에 보지는 못하신다. 그 결과, 세계를 복되게 하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더불어 그분들은 아직 아주 미세한 지혜의 장애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을 완전하게 성취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한층 더 높은 일체지로 목표를 바꿔야 한다. (...) 어떻게 하면 우리가 (...) 중사도를 넘어 상사도로 나아갈 마음을 낼 수 있을까? (...)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명상의 중심을 바꿔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궁리하는 대신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 속 중생들이 겪고 있는 괴로움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 전에는 명상의 대상이 자신이었다면, 대승의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대상의 범위를 가까운 친지 즉 어머니, 아버지, 가족, 친구 등으로 넓혀 모든 중생이 겪고 있는 괴로움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265~266쪽)
명상의 중심을 바꾸고, 괴로움의 폭을 훨씬 더 멀리까지 밀고 가는 일. 중근기든 상근기든, ‘과로움’에서 출발하고 연기를 통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기에서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대승의 수행은 추락하고 있는 비행기에서 나 자신의 탈출에 힘쓰는 대신에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산소마스크를 찾아 쓰고 기내의 승객들을 구하는 일과도 같다는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렇다면 보리심과 연관된 자타불이의 깨달음은 훨씬 더 힘 있게 펼쳐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칸트의 이성 : 유한성에 대한 자각
지난 시간에 못다한 칸트 강의가 이어졌습니다. 자료를 읽고도 헤매는 저희를 위해 채운샘께서는 칸트 철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왜 그가 사상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뤄냈는지를 보충해주셨습니다. 칸트에게 문제는 경험론에 기반해 형이상학을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독단론과 회의론을 넘어가는 방향이기도 했습니다. 독단론은 “알 수 있든 없든 간에 어쨌든 나타난 것보다 본질적인 무엇이 있어”라고 말하는 모든 사상이고, 회의론은 “나타나는 감각 세계만이 전부이며 나머지는 모두 관념이고 허구야”라고 말하는 사상입니다. 칸트의 고민은, 어떻게 경험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환원하지 않으면서도 거기에 갇히지 않을 수 있을까였습니다. 흄은 경험되는 감각정보들의 실재성을 주장하며, 그보다 더 본원적 실체가 있다고 믿는 독단론과 단절했습니다. 칸트는 경험 세계속의 유한성에 천착하는 이러한 경험론의 토양으로부터 출발하여 종합의 문제를 고민합니다. 즉 경험되는 것 너머의 절대적인 실체를 질문하는 일(형이상학)을 그만두고, 경험되는 것들 안에/이전에 경험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원, 즉 선험적 차원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경험되진 않지만 경험 세계에 내재하면서 경험 세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발생적 원인과 역동적 원리의 차원. 그것이 선험성이죠.
여기서 긍정의 문제가 떠오를 수 있습니다. 칸트에게 현상은 가짜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짜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현상은, 그렇게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즉 이러이러한 조건과 인연 안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출현했다는 점에서 진실이지만, 그러한 의존관계와 방식이 달라지면 언제든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다는 점에서는 진실이 아니기도 합니다. 만약 경험된 것이 전부라고 말해버린다면, 그것을 절대화하면서 다른 경험과 다른 해석들을 허구로 만들어 부정하게 됩니다. A를 사실이라고 말하는 순간 A 아닌 것들이 사실 아닌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경험 세계를 믿되 언제나 그것이 특정한 조건들, 관계들, 연기들과 더불어서만 경험됨을 믿어야 합니다. 발생의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무언가를 긍정한다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 발생적 조건이라는 것은 감성으로 지각되거나, 지성으로 인식되는 차원은 아닙니다. 즉 경험세계 안에 있지 않지요. 조건은 사유될 수밖에 없는 것, 즉 이성과 관계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성, 그것은 말하자면 ‘유한성에 대한 자각’입니다. 여기서 유한성이란 무한의 반대라기보다는 제한되어 있고 경계를 가짐을 말합니다. 즉 선험적인 원리 및 조건과 더불어서만 나타난다는 것인데요. 채운샘께서는 경계라는 것은 언제나 이질성, 즉 타자성과 다름없다고 하셨죠. 나를 나이게 하고 나로 내버려두지 않는 힘들과 면해 있음에 대한 사유가 이성이죠. 놀라운건, 그렇게 유한성을 자각하려 하자마자 그 자각이 우리를 유한성 경계너머로(언저리로) 끌어냅니다. 타자들이 우글거리는 경계 너머의 세계. 그것이 무한이고 이념이죠. 사유를 추동하는, 이성에 내재된 욕망은 칸트에게 네 가지로 정리됩니다.
1)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 사변적 관심
2)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해야 하는가 : 실천적 관심
3)나는 무엇을 희망하는가 / 원하는가 : 향유적 관심
경험 세계에 기반하지만 경험 세계를 넘어서지 않는, 초월적 조건을 향한 이 세 가지 물음이 인간에 대한 질문이고, 인간 능력에 대한 비판입니다. 비판의 욕망은 이 세계로부터 육박해오는 것이죠. 이것을 사유하는 것이 이성이 가진 힘입니다. 한계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그 한곌르 초월해서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칸트의 시간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요! 너무나 흥미로우나(머리를 지끈 거리게 하긴 하지만)공지가 너무 길어진 관계로 윤순샘의 후기로 토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칸트가 시간을 운동에의 종속에서 풀어버렸고, 시간은 양도 질도 가질 수 없는 ‘텅빈 형식’임을 밝혀냈다는 점을 남겨봅니다. 시간은 주관 자체도 대상 자체도 아니며, 수용 및 인식과 더불어서만 사유되는 ‘내감의 형식’이라고 합니다. 시간은 종합되는 것이라고 하죠! 들뢰즈의 시간의 종합이라는 문제에 깊이 연관을 준 칸트의 시간개념! 아주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