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음’의 중요성과 칸트
사성제인 ‘고집멸도’의 출발점은 ‘고’입니다. ‘고’부터 해체하고 재종합한다는 면에서 불교는 우리 신체의 느낌(유한성)을 전제한 경험 세계를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경험 세계를 절대화하거나 평가절하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타자의 ‘고’를 벗어나게 하는 이타행, 보살행, 자비행은 상사도의 일체지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수행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험 세계를 열등한 것으로 인식하거나 부정하여 우리를 미신으로 이끌게 되는 독단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환원주의나 극단적 유물론인 회의주의와는 다른 불교의 방향성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불교가 우리가 겪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말입니다.
18세기 독일 칸트 역시 대상의 완전한 형상이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작업에서 방향을 돌려 인간의 조건에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질문했습니다. 세계가 있고,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인식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칸트는 세계(물자체)가 있긴 하지만,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점은 우리가 인식한 세계일 뿐이지요. 이러한 접근에서는 세계 자체보다 우리의 주관적 인식 요소들과 이 요소들의 작용 탐구가 중요해집니다. 세계가 이 요소들의 작용에 의지해서 구성되기 때문입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 요소들에는 감각, 상상, 지성, 이성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물자체와 만나는 지점들입니다. 이 요소들의 작용으로 세계가 정의됩니다. 이 정의는 세계 자체가 아닌 인식한 세계(경험 세계)를 말하겠지요. 칸트는 이 경험 세계를 구성해주는 경험 이전(선험적) 차원을 초월적 차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조건 속에서 세계를 구성합니다. 세계는 외부의 신이 창조한 무엇이 아니라, 내재적 역동적 장치인 우리의 인식이 구성하는 것이 됩니다. 선험적 차원(조건)이 경험 세계와 나란히 갑니다.(내재적) 칸트의 인식 메커니즘에서는 조건과 조건의 결과가 분리되지 않기에 미신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그가 경험 세계의 발생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이성’ : 인간 주관의 사유할 수 있는 역량
우리는 현상만을 인식합니다. 이 현상이 가상일까요? 현상은 우리가 인식하는 무엇이기에 실재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드러나도록 해주는 원리적 차원(선험적 차원)이 있습니다. 선험적 차원은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기에 우리가 직접 인식하지 못합니다.(초월적) 대상 그 자체가 있는 게 아닌 대상은 선험적 차원(초월적, 잠재적 차원)에 의해 출현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출현시킬 때, 감각에 내재한 어떤 형식이 있는데 이 형식이 시간과 공간입니다. (초월적(transcentental) 감성학)
수학적 지식은 인식 요소 중 지성의 작용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지성의 지평을 넘어서 사유하려면 철학적 이성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이성의 조건은 첫째 주관적(사변적) 관심과 둘째 유한성을 넘어가는 근본적 차원인 이념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엇을 희망하고 원할 수 있을까요? 이 세 가지 질문은 인간의 조건(초월적 본성)을 묻고 있습니다. 이들은 인식하는 게 아니라 사유해야 하는 문제들이죠. 칸트의 저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의 내용은 이 질문들에 대한 그의 사유함입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한계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이 한계를 넘어서서 물을 수 있는 이성을 가졌습니다.
칸트의 ‘시간’ : 종합의 형식
저는 11월 4일 오후 8시 반에 2평 남짓한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인 듯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지요. 이 문장은 시계가 기준이 되는 시간과 자가 기준이 되는 공간을 살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시간과 공간을 습관과 다르게 사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사유의 역량 즉 칸트식으로 이성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첫걸음으로 채운샘께서 강의한 칸트의 ‘시간’을 이해한 만큼 적어 보겠습니다.
칸트에게 시간 자체, 공간 자체는 없습니다. 감성적 직관이 이루어질 때, 이를 가능하게 하는 형식이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감각적 정보의 수용 과정에서 외부적 형식이 공간이고, 주관적(내재적) 의식의 형식이 시간입니다. 주관과 세계의 만남은 어떤 질서(형식) 속에서 일어납니다. 칸트에게 시간과 공간은 감각 자료를 그러한 방식으로 만들어 주는 형식입니다. 경험의 형식적 조건입니다. 이러한 시간과 공간은 주어진 내용(양, 질)이 없이 텅 비어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발생하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이들이 감각 자료를 종합하는 형식일 뿐이니까요. 그렇다면 감각 자료가 어떻게 종합되는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형식은 자아들(애벌레 주체들)의 반응들(감각 자료들)을 선/후, 인/과 등을 토대로 연결(종합, 묶음)합니다. 수동적 자아들의 통일성이 ‘나’입니다. 이 ‘나’는 시간의 종합에 의해 통일됩니다. 동일한 ‘나’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시간의 형식에 의해 연속되는 동일한 ‘나’를 인식합니다. 또한 감각 자체(자극)를 질서화하는 종합에 의해 시간이 생겨납니다. 경험 없이 시간 자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현재라는 감각은 시시각각 명멸하는 것들을 가지고는 느낄 수 없습니다. 시간의 종합 측면에서는 현재는 순간이라기보다 어떤 A 그리고 B의 연결인, 짧더라도 지속의 감각(경험) 속에서 출현합니다.(흄) 이처럼 감각 대상들 사이를 연결하는 형식이 시간입니다. 이것이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이자 우리가 현재라고 인식하는 시간이 됩니다. 이러한 현재 감각을 발생하게 하는 다른 잠재적 차원이 과거라 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손) 우리는 이 감각을 가지고 세계를 구성합니다. 들뢰즈는 칸트가 말하는 시간의 종합을 기반으로 흄, 베르그손, 니체를 통해 확장하면서 시간과 존재를 사유합니다.
유식에서도 아뢰아식이 있는데, 7식(말나식)이 나타나서 자기가 주체인 것처럼 대상 세계를 출현시킵니다. 말나식 역시 무의식적이지만, 무시 이래 습인 ‘나’입니다. ‘나’는 없는데 시간의 실에 의해 마치 있는 것처럼 인식(감각)하게 됩니다. 떨어져 있는 것들을 연속시켜주는 조작이 시간이고, 시간의 실에 의해 동일한 ‘나’가 있게 됩니다. 분열증자는 매 순간 자기를 느끼지만, 매번 느끼는 자기를 연결하는 종합인 시간을 잃어버린 자입니다. 칸트에게 시간은 실체가 아니고, 내성의 형식(내적 감각)으로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