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대해 배우고 있긴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벌써 4학기 8주차가 다가왔습니다. 우선 다음 시간(11.22) 공지부터 드리겠습니다.
1) 낭송 텍스트는 다 읽었습니다. 오전에는 에세이 토론이 있으니 주제에 맞게 개요나 씨앗문장 등 함께 나눌 프로포잘을 준비해옵니다.
2)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 9, 10, 11, 12(결론)(182~233)장을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옵니다. 발제는 정혜윤 선생님과 이미영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3) 간식은 김자영 선생님과 이기웅 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4) 후기는 김경아 선생님께서 써 주시겠습니다.
오전에는 <달라이라마, 깨달음을 말하다>의 요약 챕터와 부록으로 실린 ‘람림 예비 수행 기도문’을 읽고 에세이 주제와 입구를 이야기 나눴습니다. 앗,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착각(+무지)하여 일체개공(空)이라고 안내드렸는데요! 3법인은 일체개고(苦), 제법무아, 제행무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희 에세이 주제도 고, 무아, 무상이 되겠네요! 저희는 한명씩 돌아가면서 에세이의 간단한 방향들을 나누었습니다. 막상 준비해온 게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다가도, 차례가 되면 뭔가 흥미로워보이는 주제들이 나왔는데요. 시간을 중심으로 무상 개념을 풀어보고 싶다고 하신 선생님들도 계셨고, 죽음을 둘러싼 문제들을 다뤄보겠다는 선생님들도 계셨습니다. 또한 무아 개념을 가지고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시대적 문제를 살펴보고 싶다고 하신 케이스들도 있었구요. 죽음, 인간관계, 냉소주의, 회피기제, 무기력 등 키워드들이 흥미로웠는데요. 이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요! 다음 시간에는 더 진행된 에세이 준비글로 만나 이야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속으로서의 시간
과학에 있어서 시간을 ‘사유’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상대성 이론 이전까지의 과학은 시간과 공간을 균질하고 평평하게 주어진 캔버스처럼 간주했습니다. 그저 언제나처럼 존재하는 절대조건이었죠. 비록 상대성이론이 등장해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며 시공 자체는 운동 속도와 물질 및 중력의 영향에 의해 휘어진다고 이야기되었지만, 그렇다 해도 시공은 공간의 차원에서 개념화되어왔습니다. 공간의 차원이란 분할하고, 나누고, 구획할 수 있는 방식, 즉 이것과 저것이 상호 외재적인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어떤 것이든, 서로 다른 존재가 한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거나, 하나의 존재가 서로 다른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지성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공간적으로 세계를 구획하기. 이것은 지성-과학의 능력이자 한계입니다(물론 양자역학으로 태동된 현대과학의 이야기는 또 다릅니다_불확정성의 원리). 실재를 다룸에 있어서 과학이 고수한 상호 외재적 관계들을 넘어가는 일은 철학에서 시작됩니다.
베르그손은 철학과 과학이 어느 지점에서 함께 가고 어느 지점에서 따로 가는가를 질문했습니다. 양자는 세상의 실재를 질문하며 소통 가능한 언어들로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하지만 과학은 ‘사실의 선’을 따라야 합니다. 계산 가능하고 반복해서 측정 가능한 것 안에서 논의되어야 하기에 입증되지 않고 (사고로라도) 실험될 수 없는 것은 다룰 수 없지요. 그 과정에서 자동으로 전제되어 하나의 좌표축의 지위로 밀려납니다. 하지만 철학은 사실의 선을 따를 수 있지만 거기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시간 자체가 질문될 수 있습니다. 하여 철학에서는 지성보다는 직관이 요구되고, 배열보다는 지속이 더 중요한 문제로 남습니다. 개념화하고 규정하는 것은 동일해도, 무엇을 향하는지가 다른 셈이죠.
베르그손에 따르면 시간은 체험되는 것입니다. 아니, 체험 자체가 시간을 전제하지요. 그렇기에 시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처럼 주관적인 것으로만 한정되지도 않습니다. 시간은 모든 존재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의 주제는 ‘직관’이라는 사유의 능력이었습니다. 이는 공간적 분할을 전제하는 지성과 다르게 ‘지속’으로서의 이 세계를 매개 없이 이해하는 능력이 우리 의식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의식은 언제나 지속-시간과 함께 만들어집니다. <물질과 기억>에서는 이러한 시간-의식이 물질세계와 형성하는 관계가 분석됩니다. 여기서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이 이야기됩니다. 유용성이라는 기준에 맞게 지성에 의해서 개념화되는 일종의 분별지가 표층의식입니다. 칸트가 분석-비판했던 인간의 인식능력이지요. 심층의식은 잠재적인 무의식이며, 개체성을 넘어서는 기억이자 생명 전체의 기억이기도 합니다. <창조적 진화>에서는 인간만이 아니라 더 큰 생명의 차원에서 의식을 말합니다. 진화의 과정이 그 자체로 지속이요 창조라고 말하죠. <도덕과 종교>에서는 그러한 지속을 체험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체험의 이유는 의식의 변환으로, 분별지로서의 지성을 넘어가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해집니다.
지속으로서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베르그손의 두 가지 예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음악(멜로디)입니다. 음악은 그 진행에 따라 불가분의 연속성을 가진 동시에 역동적인 종합이 계속됩니다. 거기서 일부분을 떼어낸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 부분이 전에 갖던 효과와 뉘앙스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똑같은 후렴구더라도 전주가 조용한지 아닌지에 따라 전혀 다른 것처럼 들리죠. 앞뒤의 멜로디 없이 어떤 음만을 똑같이 감각해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상태로 듣느냐에 따라 양상과 톤은 또 달라집니다. 절대로 동일한 듣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매번의 순간마다 전체가 되돌아와 종합되고 해석되고 물들이고 있음. 이것이 지속입니다.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뭘까요? 그것은 분별적인 음운들을 듣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가 채운샘의 이 베르그손 강의를 들을 때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맥락과 기억을 동원해서 전문장과 다음 문장을 엮고, 표정을 읽고, 상황을 추측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뒤섞임, 되먹임, 분해-조합의 향연이 바로 지속입니다. 시간은 이러한 지속의 흐름 운동과 같습니다.
물질의 리듬과 의식의 리듬
두 가지 중요하고도 어려운 포인트가 남는데요. 하나는 베르그손에게 있어 물질의 지속과 정신의 지속이 그 자체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물질은 결코 단절된 흐름이 아닙니다. 베르그손은 이미지들의 절단 채취로 물질을 묘사했지만, 사실 이는 초당 4조번을 진동하는 적색 빛의 리듬으로 분해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의 지각은 이것을 따라갈 수 없죠. 아무리 예리해도 1000분의 2초가 최소치입니다. 이 정도 지각으로 1초 동안의 광파를 모두 확인해보려면 2만5천년이 걸린다고 하죠. 우리의 지각은 이 엄청난 물질 리듬을 압축 수축하여 1초의 단면들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그렇기에 물질에서 우리 의식과 같은 리듬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체로서의 지속은 언제나 생명 전체의 리듬을 포함하듯 물질 전체의 리듬과 우주적 지속을 포함합니다. 종교적 체험은 바로 그러한 함축관계와 연동성을 깨닫는 일이지요.
두 번째 문제는 왜 의식이 지속-시간인가는 것입니다. 위에서처럼 물질과 정신은 그 리듬에 있어서 광대한 규모적 차이를 보입니다. 이는 본성의 차이로 이어지는데요. 여기에서 물질과 생명의 경계가 생각될 수 있습니다. 물질은 상호 작용-반작용하는 이미지들의 운동입니다. 여기서는 전달이 완벽하지요. 일대일대응과 결정성이 지배적입니다. 돌이나 물의 흐름은 작용에 대해 예비적 영역을 만들어 놓지 않습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의식 혹은 마음 작용은 신경계를 전제합니다. 신경계는 물질 흐름에 비결정성을 도입하고, 인과의 복합성을 만들어냅니다. 예측불가능성이 커짐과 함께 물리적 차원과는 다른 유의 인과법칙이 필요해집니다. 신경계는 12연기 중 촉-수-상의 과정을 담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경계가 마련한 비결정성의 지대에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의식은 어떤 물질성에도 의존하지 않고 과거라는 기억과 함께 작동하면서 행동을 준비합니다. 예측하고, 준비하고, 지각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면서 자극에 대해 가능한 반응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유용성의 관점에서 준비되고, 길이 들수록 즉각적으로 행동이 됩니다. 의식의 역량이란, 삶의 유용성에서 굳어진 그런 습관적 이행에 머뭇거림과 거리를 도입할 수 있음입니다. 먹고사는 문제에 빠져들지 않고 계속 다른 물음들을 솟아나게 하기. 훨씬 더 많은 실재성 속에서 사건을 바라보기. 그것이 철학과 종교와 예술의 역할입니다. 불교로 따지면 지止(사마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왠지 앙굴리말라에게 “나는 이미 멈추었다”라고 말씀하시는 부처님의 의식 역량이 궁금해집니다. 이러한 의식의 리듬에 비하면, 물질의 리듬은 무한히 이완되어 있습니다. 의식 리듬은 단번에 수축되면서 이미지들의 운동에 기억을 개입시키죠. 그런 점에서 의식은 지속-시간입니다.
베르그손은 시간 일원론자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시간의 권리적 이완이 공간이고, 의식은 그것의 압축이라는 것! 그렇다고 해도 물질 세계는 언제나 의식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