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깨달음을 말하다>(345-397쪽)
13장 요약 부분과 부록의 '람림 예비 수행 기도문'을 읽었습니다.
'깨달음의 도시에 대해 말할 때, 이는 매우 가깝고 단박에 성취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 수행해 보면 불현듯 깨달음은 성취하기 매우 어렵고, 요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생각과 실제의 간극이다. 이 차이를 깨닫고 물러나지 말라.'
'수행하며 저지르는 일반적인 실수는 빨리 수행의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조바심이다.... 수행의 빠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수행의 진보를 막는다. 반면 이러한 기대 없이 수행하는 것은 모든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깨달음에 관해서 말하는 마지막 요약 부분에서 조바심을 내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게 와 닿았습니다. 무척 찔리기도 하구요. '조바심'이란 마음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 삼독심이 모두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깨달음을 도달해야 할 어떤 장소나(텍스트에서도 '깨달음의 도시'란 표현을 쓰고 있긴 합니다) 무엇처럼 실체화하고 이상화하는 어리석음, 올바른 정진이 아닌 들떠 있는 탐욕의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세 스스로에 대해 자책하고 실망하는 그런 마음들 말입니다. 이는 내 마음을 돌보거나 다른 이의 평화를 염원하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것은 내 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을 진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생각과 실제의 간극을 아는 것, 그리고 물러서지 않는 것, 수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베르그손-지속으로서의 시간>
베르그손의 철학
시간의 문제는 주체 그리고 의식과 연관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베르그손은, 과학이 시간을 공간적 표상으로 다루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철학은 측정하고 계산하는 과학의 사실의 선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지점까지 따라갈 수 있지만, 그 추구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거기에는 개념화하고 규정하는 지성이 아니라 직관이라는 방법이 요구된다.
베르그손에게도 시간이라는 건 일종의 체험이다(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을 주관적 경험이라고 한 것처럼). 그걸 체험하는 우리의 마음 작용과 무관하게 바깥에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시간성을 전제하는 의식적 체험 자체를 지속이라고 말한다.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어떤 매개도 거치지 않고 의식에 직접 주어진, 의식과 분리불가능한 것이다.
지속은 베르그손의 저작을 관통하는 개념이다.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에서는 의식에 더 초점을 맞춰서 얘기하고 있다면, 『물질과 기억』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성을 비판하면서 그 관계를 논증한다. 이를 더 큰 생명계 차원에서 얘기하는 게 『창조적 진화』이다. 마지막 저작이라고 하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는 자신의 이런 사유들이 결국은 어떻게 다른 도덕과 종교의 체험과 맞닿아 있는가를 얘기한다. 그는 종교라는 것을 체험적 차원에서 보는데, 그 체험이란 다름 아닌 의식의 변환을 말한다.
베르그손은 의식과 무의식을 이원적으로 뚜렷이 구분하기보다, 잠재적인 차원과 현실로 활성화된 차이로 설명하면서 이 두 차원이 늘 같이 나란히 진행되는 것을 더 강조한다. 우리의 일상적 표층 의식은 지성에 의한 분별로 인해 개념적 규정이 지배하고 있다. 개념들은 a는 b가 아니다와 같은, 서로에게 외재적인 방식으로 공간의 표상 위에서 작동한다. 의식을 변환한다는 건 이러한 지성이 철저하게 견지하고 있는 유용성의 관점을 벗어나 심층적인 차원과의 연결을 시도해 보려는 노력이다. 종교적 체험은 그 노력 속에서 가능해진다고 한다.
지속으로서의 시간
베르그손이 시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와 음악을 들을 때의 체험을 가지고 얘기한다.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분절된 음운의 소리를 듣거나 문장의 발음을 듣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말한 문장 앞에 어떤 문장을 말했는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말을 듣는다는 건 계속해서 개입해 들어오는 기억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베르그손에게는 그 기억이 과거다. 그것은 뇌 혹은 신체 부위 어딘가에 보존되어 있지 않고, 그 자체로 보존되어서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현행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금의 이 순간으로 매번 다른 방식으로 개입해 들어온다. 즉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계속 발화되는 문장 속으로 개입해 들어오는 과거와의 뒤섞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어떤 동일한 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 작동하도록 일정 시간 유지한다고 해 보자. 똑같은 하나의 음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경험에서 멜로디가 좋다고 느끼거나 감정이 고양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도입부가 없다면 다음에 이어지는 폭발적인 고음에서 감동을 느끼기는 어렵다. 동일한 음이라고 하더라도 앞 마디와의 관계 속에서 지금의 음을 느끼고, 똑같은 멜로디라고 하더라도 어떤 연속 속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다른 음악이 된다.
이처럼 현재적으로 감각 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은 거기에 계속 과거의 무언가가 개입해 들어감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자체의 말과 음악이 좋고 나쁨이 아니라, 내가 앞에 경험했던 시간들 속에 보존되어 있는 무언가가 지금 이것을 좋다 나쁨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게 베르그손에게는 지속이다. 이러한 지속은 존재가 무언가를 감각하고 의식한다는 것의 조건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인식하고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을 그저 반복하는 명멸이 아니라 명멸하는 그것들을 연결해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시간적 불가분성의 중단되지 않는 지속적인 흐름 위에 지금 무언가가 체험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시간의 이어짐이 아니라 질적 다양성으로서의 연속성이다. 앞의 것과의 관계에서 가능한 현재적 체험이 다시 현재를 포함한 과거 시간 전체의 뉘앙스를 다르게 만들면서 역동적 질적 변화를 이루어낸다. 그러므로 지속으로서의 시간은 우리를 언제나 또 다른 무언가로 인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해 보이지만 한 순간도 동일할 수가 없다. 우리가 순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계하고 있는 그 전체가 매번 달라지면서 현재 안으로 침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의 전체로서의 지속, 베르그손은 그것을 우주라고 부른다. 우주적 지속은 그렇게 매번 변화하는 흐름으로서의 이 세계 전체이다. 우리의 지속이라는 건 우주적 지속의 작은 현실화, 일종의 우주의 음악의 아주 짧은 마디와도 같은 것이다. 개체의 삶 역시 우주적 지속을 내재하고 있는 하나의 마디와도 같다. 인류의 지속이라는 것도 그런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종교적 체험은 개체의 시간이 이 우주적 시간 전체와 연동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서로 다른 시간의 리듬
베르그손은 물질과 정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파장이 가장 긴 적색 빛은 가장 적은 빈도로 진동하는데 1초에 400조의 잇따르는 파동들을 완성한다. 그리고 우리의 지각이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순간은 2/1000초라고 한다. 우리가 이렇게 짧은 순간을 연이어 지각할 수 있다고 가정하고, 또 400조의 빨간 빛을 벌려 놓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우리가 400조를 다 일일이 지각한다면 무려 2만 5천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가 1초라고 부르는 시간에 일어나는 400조 번의 진동은 빛이라는 물질의 리듬이다. 우리는 그것을 물질의 시간과 똑같이 400조의 진동을 하나하나 다 느끼지는 않는다. 그 400조를 한번에 압축해서 1초 만에 적색 불빛이라고 감지한다. 베르그손은 이러한 높은 긴장으로 인해 수축해서 감각할 수 있는 것이 지각의 능력이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의 지각의 리듬은 빛의 리듬하고 다르다. 즉 물질하고 정신이 다른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리듬을 물질과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베르그손이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넘어가는 몇 가지 논리 구도 중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의식과 동연적인 시간
물질 세계는 다가오는 힘에 비교적 결정되어 있는 힘을 가진 세계이다. 우리도 자신의 신체를 중심으로 작용 반작용을 겪는다. 그러나 신경계를 가지고 있어, 의식을 하는 우리는 작용 반작용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그 결과로서 행동을 준비한다. 물질적인 세계는 힘을 주고받는 것에 의해서 인과가 만들어지는 결정성의 세계라면 그 결정성을 유보할 수 있는 게 행동이다. 다가오는 힘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원시적인 단세포 생물과 달리, 점증하는 의식은 무엇인지를 포착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주저하는 비결정성의 지대를 갖는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의 틈을 만들어 내는 거다. 영화에서 각각의 장면을 어떻게 이어붙이느냐에 따라 의미 관계가 달라지는 몽타주 기법처럼 말이다. 비결정성이라는 것도 다음 행동을 준비하기 위해서 자극과 반응 사이에 심리적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외부 대상에 대해 일차적으로 어떻게 나의 존재에 가장 유용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인가를 선택하기 위한 비결정성의 지대를 도입하는데, 그것을 베르그손은 의식의 리듬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의식이 확장되고 자유롭다는 것은 이 비결정성의 영역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가의 여부와 직결된다.
베르그손은 우리의 의식에서 일어나는 직접적 체험인 정신적 삶에 주목했고, 그것을 위해 시간을 통해 물질과 정신의 존재 방식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의 철학을 시간의 일원론이라고도 부르는 이유이다. 그에게 물질이란 무한히 늘어지고 이완된, 좀 더 긴 시간의 지속을 가지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물질은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만 무엇이라고 인식되기 때문에 의식 바깥에 물질 세계가 따로 있지 않다고 말한다. 즉 의식은 시간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