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22일 불교+철학 4학기 8주차 후기
1.에세이 사전 리뷰
올해 처음이자 마지막인 에세이를 위해서 사전 리뷰를 했습니다. 4분이 써오셨고 5분은 구두로 나누어주셨습니다. 이번 에세이는 불교 개념인 무상, 무아, 고를 어떻게 풀어볼지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아직 주제들이 구체적이지 않지만 어떤 글들을 써보고 싶은 지를 두루뭉술하게 나누는 정도였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가족의 죽음을 재해석해보는 과정 속에서 '고'란 무엇일까 고민해보시겠는 분, 나아진다는 성장이라는 상식이 품고 있는 함정을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와 엮어서 써보고 싶은 분, 허무주의적으로 사용되는 무상이나 연기조건을 풀어보고 싶다는 분, 사회 전반적인 냉소의 문제를 불교의 무아와 연결해보고 싶은 분 등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산다는 것이 무엇일지, 공부와 수행을 어떻게 연결할지, <의식의 기원>을 통해 나를 추동하는 힘의 원천을 파보고 싶다는 분, 주변의 죽음들을 통해 무상을 사유해보고 싶다는 분 등등. 아직 구체적이 씨앗문장이나 전체적이 흐름이 잡힌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음 주에는 모두 써와서 나누는 걸로 했습니다.
2. 세미나 : <시간의 역사>
9장에서 결론까지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를 끝까지 같이 읽었습니다~ 어떤 물리학자가 일반인에게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네요. 본인도 물리학도 시절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다면서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었습니다. 책을 읽는 의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희도 내용을 이해해보려고 최선을 다하긴 했습니다요. 그러나 고것이 단지 저희 세미나의 목표는 아니지요. 어떤 개념이라도 우리 삶과 질문으로 연결시켜보려는 의도가 컸기에 까막눈 수준으로 읽었지만 그래도 열띤 토론이 가능했던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개념들이 창출되는 과정이 우리 공부를 통해 사유를 밀고 나가는 과정과도 유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통해 가설들을 세우고 증명하는 과정에서 질문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사건을 만나서 풀다 보면 ‘나’라는 존재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고, 그러면 의식은, 생명은 뭐지라며 기원이 궁금해지고 결국 우주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잖아요. 칸트가 말한 대로 이성이 외면할 수 없는 걸 질문하도록 만드는 이념에 도달하게 되는 과정이죠. 심리적 경험들이 향하는 궁극적 차원인 '영혼', 자연의 경험들이 향하는 궁극적 차원인 '우주', 도덕적 경험이 향하는 궁극적 차원이 '신'에 대한 물음, 각각의 이념에 다가가는 과정이 철학이나 과학이나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9장. 시간의 화살’에서 먼저 무경계 조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부분은 지난 시간 범위인데 왜 중요한지도 모르고 쓰윽 넘어갔더랬죠. 그런데 시간의 화살을 이야기하면서 ‘무경계 조건에서는’ 단서가 계속 붙어서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어쩌면 신은 우주가 어떻게 출발했는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가 다른 방식이 아닌 어느 하나의 방식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한 어떠한 특별한 이유도 제기할 수 없다. 반면에 양자중력 이론은 시공이 어떤 경계도 가지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그 경계의 움직임을 규정해야할 아무런 필요도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모든 과학법칙이 붕괴되는 특이점이나, 시공의 경계조건을 설정하기 위해서 어떤 새로운 법칙이나 신에게 호소해야 하는 시공의 가장자리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주의 경계조건은 그것이 아무런 경계도 가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우주는 완전히 자기-충족적이고 우주 밖의 그 무엇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주는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있을(BE)' 따름이다. (174쪽)
무경계 조건(no-boundary condition)은 우주는 명시적인 경계는 없지만 유한하다는 전제입니다. 매우 모순적이죠. 경계가 없는데 유한하다니요, 경계가 없으면 무한 아닌가요? 여기서 경계라기보다는 물리적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특이점’을 제외시키기 위한 하나의 제안입니다. 그래서 저희들 나름 이해해보기 위해 스피노자의 ‘신’ 개념과 불교의 무시이래(無始以來) 등등 이것저것 가져다 해석해보았습니다. 유한수 사이의 무리수는 유한 속의 무한입니다. 스피노자의 신은 무한한 존재이지만 모든 양태는 신 ‘안’에 존재합니다. 신의 ‘안’이 공간적 안과 밖은 아니겠지만, 우리 사유가 공간 베이스로 작동하는 한계를 갖기에 그래서 그 한계로 무경계 조건을 스피노자의 신으로 사유해 볼 수도 있는 거죠. 불교에서도 우주의 시작과 끝은 알 수 없지만 ‘무시이래’를 이야기합니다. 우주의 기원, 시간의 시작과 끝 등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에 대해 부처님는 답하지 않으셨죠. 무기(無記)의 영역입니다. 재밌게도 스피노자가 말한 무한양태 중 간접무한양태(매개적무한양태) 예가 ‘우주 전체의 모습’이었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신만이 무한한데, 유한한 양태가 무한하다니요 재밌는 발상입니다.
상대성이론으로는 특이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주의 기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을 사용해야 합니다. 특이점이란 기존의 법칙으로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불가지영역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우주의 가능한 역사들이 과거의 시공 경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 역사들의 무경계 조건을 전제합니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을 기술해야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화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시간의 방향인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 우리가 시간이 흐른다고 느끼는 방향인 ‘심리적 시간의 화살’, 우주가 팽창하는 시간의 방향인 ‘우주론적 시간의 화살’입니다.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은 소위 무질서가 높아지는 방향, 정확히 이야기하면 에너지 평형을 이루는 방향으로 시간의 흐름입니다. 컵은 깨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지 깨진 컵이 (추가에너지 없이) 다시 저절로 붙지는 않죠. 우리의 심리적 시간 즉 과거를 과거로 기억하는 주관적 느낌도 이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컴퓨터 메모리에 기록을 남기는 예로 설명한 게 신선했습니다. 메모리에 뭐라도 하나 기록하려면 컴퓨터가 ‘일’을 해서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메모리로 보자면 하나의 상태로 기록하여 고정하는 것은 무질서를 낮추는 것이지만, 이때 컴퓨터가 에너지를 사용하여 열을 내는데 이건 전체적으로 무질서를 더 높입니다. 아마 우리의 기억을 쌓는 과정도 이와 같이 무질서도가 높아지는 과정이기에 열역학적인 시간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근본적인 질문, “그렇다면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얼까요?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왜 우주는 흔히 과거라고 부르는 시간의 한쪽 끝에서 높은 질서의 상태에 있어야 하는가?”(189쪽) 이걸 증명하는 과정이 제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럽습니다. 뭔가 요목조목 논거를 바랬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진짜 우주의 기원은 형이하학(과학)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으로 봐야하나 싶어요. ㅎㅎ 만약 우주가 매우 무질서한 상태에서 시작되었다면 무질서는 유지되거나 감소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었을 겁니다. 만약 무질서가 유지만 되었다면 열역학적 시간은 없었을 거고, 또 우주의 무질서도가 감소하는 방향이었다면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이 우주론적 시간의 화살과 정반대방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관찰되는 상황들로는 둘 다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경계 조건에서 시간의 출발점은 규칙적이고 평활한 시공의 한 점일 것이고, 우주는 매우 평활하고 질서 있는 상태일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 열역학적 시간은 우주가 팽창할 때는 물론이고 수축할 때조차도 역전되지 않습니다. 중간과정을 빼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만약 우주 수축시 시간의 방향이 역전 된다면 지금 이걸 증명하는 나를 포함한 인류가 과거로, 탄생이전으로 되돌려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가 지금 이렇게 지적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 즉 약한 인류원리가 우주 수축 시에도 시간의 화살이 유지된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제가 생략한 중간 과정에 어마무시한 토론과 반박과 수식들이 들어있을 터이지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여기까지 입니다.
과학 세미나 4회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
혼미했던 과학 세미나를 가로지르던 질문들과 아이디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셨네요!
무경계 제안은 뭔가 과학이 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는 생각도 드네요. 써 주신대로 철학은 그 여러 경로로 그런 우주를 설명해왔던 것 같고요!
시간의 화살 증명은 흥미진진했지만, 인류원리로 증명되니 좀 아쉬웠고요. 그 외에도 웜홀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