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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모아> 12월 9일 4학기 8주차 수업 후기]
『중론』십이지(十二支)에 대한 고찰
제1장 ‘연에 대한 고찰’ 이후에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다시‘연기’위에 서있습니다. <중론>도 26장 ‘십이지에 대한 고찰’ 과 마지막인 제27장 ‘견해에 대한 고찰’만을 남기고 있네요. 연기로 시작했으니 연기로 끝날 법한데 왜 “견해”를 논의 마지막에 두었을까요? 채운선생님께서 그 이유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해보자고 하셨어요.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저 같은 범부에게는 너무나 이국적이었던 <중론>의 한해가 벌써 저물어가네요. 연기를 잘 설명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연기가 곧 공성이니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쓰고 보니 깨달음을 얻었다니! 몇십 년 동안 수행한 보살님들이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올라 옵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에 깨달음에도, 열반에도 자성이 없다고 배웠으니 연기를 관하여 알아차리는 매순간이 곧 깨달음의 순간이며 배움의 자리가 열반인 것을! 연기, 공성 모두 규정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그 자체이니 다만 어설프게라도 이리저리 궁리하여 이해해보려고 애쓰겠습니다.
십이지는 연기 혹은 연기의 과정을 미세하게 12지분으로 분절해서 설명한 논리입니다. 無明, 行, 識, 名色, 6處,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로 나누어 설명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느 구간까지 행인지, 촉인지, 수인지 구별할 수도 없고 그 구별의 실익도 없습니다. 거칠게 이해하기로는 무명에 연해서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음(貪瞋癡)인 행들이 발생하고 이에 인하여 인식이 발생하고 이러한 식에 연하여 가치평가인 명색이 쏟아지게 되며 이와 동시에 혹은 의존해서 몸과 마음인 6처(오온)에 들어가고 이에 연한 촉이 발생하며 촉에 대한 경험이 수이고 수에 대한 집착이 애이며 애의 팽창이 취이고 취에서 발생하여 재유(再有)를 발생시키는 업이 유이고 유에 인하여 발생한 온들의 출현이 생이며 온들의 성숙과 소멸이 노화와 죽음이라고 합니다.(p1269)
무명(無明)은 연기의 출발이라고 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적멸을 위한 깨달음의 출발점임에는 확실합니다. 무명은 세계, 영원, 진리, 행복과 고통, 인간이라는 상부터 발생과 소멸, 과거, 현재, 미래, 시간, 자아, 속박, 윤회, 열반, 부처까지 관념적으로 구별하고 상을 짓는 모든 분별에 대한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이 세계의 실상은 구분할 수도 되지도 않는, 시작과 끝도 없고 모든 것이 서로의 결과인 동시에 원인이 되어 흐르는 그 와중에 있는 그 자체 즉 중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지 못하는 무지(無知)가 인간을 생하고 번뇌하고 사하는 끝도 없는 고(苦)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중론>의 후반부에 계속해서 언급된 “연기는 타자를 취해서 성립하는 시설(施設)이고 이것이 중도(中道)이고 공성(空性)며 연기를 보는 자는 고집멸도를 본다(p1228)”고 한 의미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심코 읽고 넘겼던 <십이지에 관한 고찰>의 첫 게송에 나오는 재유와 형성력에 대해서 채운선생님께서 짚어주셨어요. 무명에 덮인 자들이 다시있음(再有)을 위하여 행들을 형성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세계의 실상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무지자는 실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공, 중도를 알지 못하고 반복해서 허상을 짓고 다시 그 허상에 연해서 마치 허공의 매듭을 풀려고 하는 것과 같은 허상을 또 짓는다는 뜻입니다. 시설임을 알지 못하는 무지자가 스스로가 세운 유의 세계를 번식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실상은 있다고 할 것이 없는데 스스로가 “유”라고 믿음으로서 “유”가 지탱되고 이로 인해서 또 다시 “유”를 만드는 행(行)들을 형성시키는 거대한 순환확장패턴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형형색색으로 순환패턴을 완성하자마자 다시 흐트러뜨리던 만나라 의식도 생각이 났습니다.
무명에 연해서 윤회에 이르는 연기의 쳇바퀴를 고찰하였으니 끊임없이 윤회하는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덮인 무지를 걷어내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무명이 계속해서 윤회에 빠지게 하는 것도, 무지를 걷어내는 것에도 형성력이 작동됩니다. 한 순간에 모든 것이 변하는구나 하고 각성한다고 해서 무지가 완전하게 걷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고서는 허공에 휘젓고 있던 팔을 멈출 수는 있는 것처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는 매순간의 행위를 결정합니다. 그것에 따라 매번 그 다음의 행위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형성력에 어떤 방향성을 가지게 하는가 는 매 순간 내달리는 견해와 꽂히는 편견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저항은 할 수 있는 한 나의 견해가 지금 어떤 상을 짓고 있는지 질문하는 것으로 출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