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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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시간은 종강 수업을 제외한 중론의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중론』의 주석서인 찬드라끼르띠의 『쁘라산나빠다』로 공부를 하였는데, 드디어 4권의 마지막 장인 “견해들에 대한 고찰”에 이르렀습니다. 4권의 책이 모래알 마냥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빈 손을 대면하는 마음이 착잡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도반들과 함께 두 손 가득 모래알을 퍼올리고 또 퍼올리고 했던 기쁨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혼자라면 결코 시도하지 못했을 『중론』 모래알 유희, 이제 저희는 이 경험을 디딤돌 삼아 혼자서 또 인연 따라 같이 계속해서 모래알 유희를 해 나가려 합니다.
채운샘께서는 『중론』이 왜 견해들에 대한 고찰로 끝나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별 뾰족한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ㅠㅠ 다만, 희미하게 귀경게에서 본 “희론의 적멸”이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제27장. 견해들에 대한 고찰
27장에서는 『중론』에서 이제까지 여러 번 거론되었던 자아에 대한 상주론과 단멸론이라는 ‘견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하였는가?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는가?'라는 견해, '세계는 상주한다.' 등 견해들은 과거의 끝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게송 1)
“나는 과거에 존재하였다.'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과거에 (여러 번) 출생했던 자는 (현재의 자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송 3)
용수에게 상주론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먼저, 과거(전생)에 출생했던 자가 현재(현생)의 자기와 동일하다면, 이는 하나의 취(趣, 6도)에 머무는 자가 여러가지 다른 취에 있을 수 있다는 오류를 지니게 됩니다. 이럴 경우, 지옥의 취(趣)에도 있었던 존재가 인간계 또는 천상계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6취 윤회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6가지의 세계를 떠도는 것입니다. 상주론의 경우는 동일자를 상정함으로써 중생의 업이 부정됩니다. 따라서 상주자 즉 영원불변의 실체인 아트만이 윤회한다는 것은 사견(邪見)에 해당합니다.
대론자는 계속해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전생의 자아와 현생의 자아가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용수는 답변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아이다.’라고 한다면 취(取)는 구별된다. 그대에게 있어서 취(取)와 분리된 어떤 자아가 존재하는가?” (게송 4)
전생과 현생의 자아가 동일하다면, 색수상행식의 상을 지닌 취(取. 6도의 도를 의미하는 취(趣)와 구별)는 부정됩니다. 왜냐하면 전생과 현생에서 취자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용수에 의하면 전생과 현생에서 취자는 구별됩니다. 취자의 행위(karma)가 구별되며, 전생과 현생이라는 시간이 구별됩니다. 이와 같이 취의 구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동일한 자아를 상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대론자는 이러한 주장에 취(取)는 다르지만 자아는 동일한 것이라고 계속해서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대론자는 취와 취자를 실체화하여 구별하며 취와 자아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용수는 되묻습니다. “그대에게 있어서 취와 분리된 어떤 자아가 존재하는가?” 용수에게 취와 취자는 본래 정해진 실체가 없습니다. 대론자처럼 취와 구별되는 자아를 상정할 때, 자아는 취를 원인으로 삼지 않는 무원인으로 발생한 것이 됩니다.
취와 자아는 상이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취가 자아인 것도 아닙니다. 용수에게 ‘상이하지 않다’는 ‘동일하다’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취는 결코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생멸한다. 어떻게 취가 취자와 동일할 수 있는가?” (게송 6)
색수상행식의 오취온은 찰나마다 발생하고 소멸합니다. 하지만 자아(atman)는 변화가 없는 고정불변의 무엇입니다. 취와 취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때, 행위자와 대상 즉 인식주체와 인식 대상을 동일시하는 오류가 생깁니다. 나무꾼과 나무, 질그릇과 옹기장이, 불과 땔감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자아는 취와 다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으며, 취 없는 자도 아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게송 9)
취와 구별되는 자아도, 취와 동일한 자아도, 또한 취를 소유한 자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용수는 이것에 대해서도 타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취하여 존재한다고 인식되는 것이 있는데 어떻게 그것의 취자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론자들은 먼저 취와 취자를 실체화시키고 그것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파헤칩니다. 하지만 용수는 그것들이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순위와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에 의해 취와 취자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상주론의 오류를 지적한 용수는 단멸론 또한 타당하지 않음을 보입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현재의 자아는) 과거에 (여러 번) 출생했던 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게송 9)
“단멸, 업들의 소멸, 어떤 자에 의하여 지어진 업을 어떤 다른 자가 받는 것, 이와 같은 것 따위의 오류가 따라붙는다.” (게송 11)
자아가 단멸한다면, 그들에 의한 업들 또한 소멸하는 오류가 생기게 됩니다. 아니면 자아가 단멸하고, 업이 존속하는 겨우라면 ‘가’의 업을 ‘나’라는 다른 자가 상속하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업을 ‘가’가 짓고, 업의 과보는 ‘나’가 받게 되는 오류가 생깁니다. 또한 현생의 자아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자로 발생하였거나 무원인으로 발생한 것이 됩니다.
“이와 같이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과거에) 존재하였다.
양자(兩者)이다. 비양자(非兩者)이다.’라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게송 13)
색수상행식의 오온의 취(取)와 윤회의 장인 6취(趣) 그리고 자아, 어느 것도 실체화하는 것은 희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도 본래 정해진 것이 없으며, 주체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초월적인 것도 아닙니다. 자아라고 불릴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영원불멸의 어떤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과의 무한한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상주자는 발생이 부정됩니다. 상주하는 것, ‘영원불멸의 고유한 어떤 것’을 상정하는 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중생이 작동하는 방식이자, 무엇이라도 손에 꽉 쥐고 확인하고 싶은 중생의 욕망과 집착,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용수는 중생의 아둔한 생각과 견해들을 논파하며, 실체화의 오류를 말하고 붓다의 최상의 가르침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또한 붓다의 마음이었음을 알고 경배합니다.
“모든 견해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중생에게) 연민을 일으켜
정법을 가르치신 고타마께 나는 예배를 올린다.” (게송 30)
"자아라고 불릴 만한 것이' 설령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들과의 무한한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히지도 않는 나를 붙잡고 허우적 거리고 있음을 은주샘 덕분에
또 한번 알아차립니다. 정성가득한 후기를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