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주디 와이즈먼의 <페미니즘과 기술>을 읽고 있습니다. 읽을수록 너무나 탁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등 기술철학의 모토들을 피부로 와 닿을 정도로 선명하게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저와는 다른 몸이 겪어야 했던 ‘현실’들을 점검해 볼 수 있어서 무척 유익하고 좋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재생산(임신, 출산, 돌봄) 영역’과 ‘가사 영역’에서의 기술이 어떻게 설계되고 채택되어 발전해갔는지를 배웠습니다.
어느 영역보다도 젠더 차이와 젠더 권력이 두드러지는 재생산기술과 가사기술은 결코 계급구도로는 설명할 수 없기에 사회주의 담론에서는 언제나 침묵해왔다고 합니다. 이 영역은 페미니즘의 입장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 왔는데요, 와이즈먼은 그런 주장들을 차분히 엮어내면서 기술본질주의나 기술결정론적 시각을 골라냅니다. 와이즈먼에게 기술은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권력관계의 반영물이기에, 젠더, 계급, 문화, 인종 등의 사안 사안들이 구체적으로 접근되어야 하는 주제입니다. 비록 이 모든 관점들을 완전히 고려하지는 않았지만, 와이즈먼은 성, 사회, 기술을 본질주의적으로 고정화하지 않기 위해 논의를 촘촘하게, 그리고 풍성한 예시와 함께 전개해 갑니다. ‘산부인과용 핀셋’을 둘러싼 여성 산파와 남성 산부인과 의사의 경쟁, 경구피임약을 둘러싼 전문가 이데올로기와 제약회사의 이데올로기, 가전제품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늘어나는 가사 노동의 범주 시간 등 우리 삶의 리얼한 국면들과 너무나 밀접하게 맞닿은 재미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책에 소개된 내용의 요약과 개론은 숙제방에 올라와 있으니 참고해주세요! 여기서는 세미나 때 나온 이야기를 짧게 스케치해보겠습니다.
기술이 여성을 해방시켰다고?
와이즈먼은 모든 챕터의 서두에서 하나의 오해와 싸우며 논의를 개진합니다. 바로 기술결정론인데요. 기술결정론은 저희가 앞에서 배운 바대로 ‘기술적 변화가 사회변화의 가장 큰 요인’이라는 관점인데, 와이즈먼이 이에 반대하는 이유는 아주 구체적입니다. 그것이 논지를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정론은 말합니다. 재생산 영역에서는 체외수정, 마취제, 제왕절개, 피임약, 중절 수술 등의 현대적 의학 약학 기술 덕분에, 가사 노동 영역에서는 세탁기, 청소기, 건조기, 수도와 가스 등의 기술 도구 덕분에, 여성이 더 자유로워지고 고통이 줄고,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요. 그래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108쪽)다고요. 우리는 쉬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예전’과 ‘오늘날’을 결과론적으로 또 표면적으로 단순 비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과도 정확하지 않고요. 그럴 때 우리는 사회의 여러 관계와 분위기가 바뀐 원인은 기술 진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 결과들은 ‘여성 해방’이며,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기술 덕분일까요?
결정론의 위험성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기술이 설계되고 전용되고 채택되는 동력과 역학관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와이즈먼이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고 자립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입니다. 즉 기술은 반드시 이 사회의 권력 구조 속에서 주조되며, 그렇기에 이 사회의 위계들과 모순들, 문화의 이데올로기들과 비평형적 관계들을 반영하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술은 과소결정됩니다. 사실 실험실이나 기업 연구소에는 현재 채택되어 상용화되는 기술 외에도 충분히 많은 후보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기술이 아니라 바로 이 기술이 사용될까요? 이는 그 기술을 요구하고 활용하려는 배치에서의 권력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상 체외 수정을 비롯해 체외 배아 성숙까지, 재생산 테크놀로지는 현재의 결혼 제도나 가족 개념을 무화시킬 정도로 다양하게 발전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오직 ‘자기 자식’을 갖는다는 가치관, 즉 자신과 유전적으로 연관된 자식을 갖는다는 가치관을 강화시킬 수 있는 기술들만 개발되고 있다”(119쪽)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수많은 피임방법 중에서 경구피임약이 선호되는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호르몬 조절방식의 경구피임약의 개발이 강화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체외 피임방법은 구식으로 분류되면서 거의 완전히 무시되어 버리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142쪽) “대부분의 의료피임 방법에 관한 연구에서 여성이 사용할 기술을 개발하는 사람은 남성들이다. (...) 여성과 남성의 성행위 형태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러한 차이가 피임기술의 설계에 반영되지 않겠는가?”(143쪽)
요컨대 기술의 올바른 사용이냐 오용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현재 작동 중인 관습과 이데올로기 같은 권력 배치입니다. 이 점에 주목한다면, 왜 여성이 당사자이고 여성이 그 결과를 받게 될 재생산기술의 지식과 결정권이 남성 전문가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풀립니다. 이는 기술의 발전부터 작동과 분리 불가능한 젠더 권력의 작동 때문입니다. 와이즈먼은 “기술의 총체적인 효과는 결국 이전에는 여성의 영역이었던 곳이 남성화된 것”이라고 정리합니다. “다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재생산영역에서도, 기술은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 내에서 작동하며 그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것이지요.
와이즈먼의 이 한마디는 무척 인상 깊은데요. 설령 기술이 여성의 출산과 섹슈얼리티에서 일종의 해방을 가져왔다면, 그것은 사회 윤리적 변화 즉 여성운동의 성과이지 기술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재생산 기술 및 가사 기술 자체는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여성은 지난한 사회적 정치적 동원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통제하게 된 것이죠.
차이를 없애는 것이 해결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체외수정 기술’은 지금의 임신과 출산이라는 젠더적 불평등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세미나는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이 문제-해결의 구도 설정은, 기술적 방법으로 불평등의 근원인 신체적 ‘차이’를 없애자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파이어스톤이라는 페미니스트의 주장과도 겹칩니다. 그의 주장에는(의도했든 안 했든), 현실 속 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억압과 고통의 이유가 여성의 몸이라는 전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근본적인 문제를 질문했습니다. 과연 차별의 원인이 차이에 있을까? 또한 과연 기술이 해결일 수 있을까?
해결이라는 상상과 관련해서, 남순샘께서는 일단 기술이 개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해보자고 하셨습니다. 체외수정 및 인공배아 기술은 반드시 유전자 조작과 연결됩니다. 만약 태아의 장애 여부 및 여러 재능을 ‘미리’ 조작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선택지가 된다면, 우리의 태도는 이전과 같을까요? 건강하고 똑똑하고 멋진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우리의 당연한 마음은, 이제 출생 혹은 수정 이전부터 아이의 존재를 직접 조작하는 실행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와이즈먼은 이렇게 말하죠.
“더 이상 ‘불임’은 여성이 자신의 삶에서 받아들여야 할 신체적 상태가 아니라 기술적인 개입이 가능한 의료상황이 되고 있다. 설사 불임여성이 그러한 의료기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기술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 자체가 상황을 바꾸어놓는다.”(118쪽)
이뿐만이 아닙니다. ‘일단’ 기술이 도입되면 이처럼 원래의 선한 의도와는 다른 오용들이 따라붙지만, 사실 기술은 이러한 선하지 않은 힘들과 더불어서 개발되고 추진됩니다. 배아 연구에 대한 투자금을 유지한 것은 우생학과 군사 산업의 입김에 힘입은 자본의 이해관계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정확히 핵발전에서 일어났던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칠 줄 모르는 폭탄의 열망이 맨해튼에서 핵융합을 성공시켰고, 한참 뒤에야 그것으로 전기를 만들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원자력 발전소를 수주한 모든 나라는 그것을 핵무기 제반시설로 간주합니다. 일부는 실제로 핵무장에 성공했고요. 기술의 사회성이란 바로 이런 날것의 욕망과 통하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후 저희는 ‘차이’와 ‘차별’의 문제를 더 논의해보았습니다. 젠더 뿐 아니라, 노년, 계급, 인종, 장애 등 우리 삶에는 수많은 ‘차이’를 가진 몸들이 함께합니다. 이들에 대한 차별의 원인은 결코 이 차이로 설정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차이를 없애는 방법이 해결이 될텐데, 그것의 실현은 폭력적일 뿐 아니라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A를 B로 만들어야 할지, B를 A로 만들어야 할지, 혹은 둘 모두를 C로 만들어야 할지 누가 알까요? 진짜 문제는 이러한 ‘변형’ 혹은 ‘해결’이 전제하고 있는 ‘도착집합’이 무엇인지를 폭로하는 일 아닐까요? 즉 우리가 선호하는 모델, 이 사회가 설정하고 있는 중심, 좋은 것으로 여겨지는 가치는 무엇인지를 되묻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쉽습니다. 우리의 기술은 이 차이 나는 몸들을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안티에이징은 2030의 피부로, 장애교정기술은 비장애인의 사지로, 체외수정은 자궁 없는 남성의 몸으로, 정신분석은 노동자의 사고방식으로. 우리는 종종 중심가치로의 회귀를 ‘치료’ 혹은 ‘해결’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퀴어를 이성애자로,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 여성을 남성(혹은 중성)으로 만들면 평등한 세상이 온다고요. 하지만 여기에는 중심과 주변의 위계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차이는 마이너스 요소이자 부정가치로 남습니다. 진짜 싸워야하고 없애야 할 것은 차이가 아니라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모든 인프라와 이데올로기 아닐까요? 중심가치와의 비교 속에서 자기 가치를 평가하는 뿌리 깊은 중력이 줄어들고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해 자긍심을 갖는 것이 해결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요?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차이만이 가득한 세계를 생각해봄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사회적 문턱들을 덜 만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기술들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피임약도, 휠체어도, 스마트폰도 어떤 점에서는 차이를 차별이 되지 않게 하는 기술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저희는 이러한 중심 가치의 범람에는 이미 기술이 있었다는 점도 짚어보았습니다. TV(미스코리아 및 온갖 스타들의 이미지), 성형 문화, 정상성과 경쟁을 불러일으키는 학교 교육 및 국가 행사들, SNS 속 잘나고 멋진 이미지. 이렇게 보면 기술은 우리에게 정신구조와 욕망까지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주(5.4) 공지입니다.
-<페미니즘과 기술> 5장, 6장, 맺음말(194~286쪽)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써 옵니다.
-과제의 주제입니다 : 이 시대에 젠더와 기술의 관계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구체적 영역을 찾아와서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우리 삶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기술 영역의 다양한 혜택 혹은 폐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 있는 주제였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했으면서도 여전히 어렵기는 합니다만, 기술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대 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꼭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이 귀한 자료를 소수만 전용하고 있는 것같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함께 하게 되길 바라게 되네요.
민호샘, 정리하느라 고생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