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기술철학 세미나 시즌5 “버섯들과 함께, 세계의 패치들로서 살아가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병행해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인원도 많아지고, 음향이나 과제 공유 등 온라인 조작이 미숙해 삐걱거림이 좀 있었는데요. 하지만 모두가 임기응변을 발휘하여 책상도 모으고 기기들도 사용하면서 또 색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저희의 이야기들은 언제나처럼 하나로 정돈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몸들이 모였고 말들과 소리들이 섞인 자리이니 작지만 예기치 못한 생각의 스파크가 일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그 조각들을 주섬주섬 주워 모아 후기를 적어볼 텐데요. 그래도 어디까지나 제가 느낀 느낌들과 제가 겪은 경험들일 것입니다. 복수의 세계-만들기는 하나의 목소리로 꿰어질 수 없다고 배웠으니, 선생님들도 댓글로 각자의 패치들을 꼭꼭 이어 붙여주세요!
첫 시간에는 <세계 끝의 버섯>의 프롤로그와 1부 ‘남은 것은 무엇인가’를 읽고 만났습니다. 그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는데요. 텍스트를 만날 때, 그것을 버무려 과제를 쓸 때, 그리고 세미나 자리에서 나눌 때, 보이고 들리고 생각되는 것들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처음 1부까지 읽을 때 받았던 느낌은 ‘정말 멋있다’, ‘너무 따뜻하다’, ‘그래 이거지’ 등의 격한 울림이었습니다. 그렇게 다정한 시선과 문체의 따뜻함에 이끌려 후루룩 읽은 후, 과제를 하려 다시 펼쳐보니 애나 칭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알아차림’, ‘이야기하기’, ‘진보-붕괴 서사’, ‘불안정성’, ‘복수의 시간성’, ‘세계-만들기’, ‘오염’, ‘확장성’, ‘냄새’ 등. 하나하나가 결코 만만치 않은 심오한 개념들이었습니다. 핵심적인 사유들이 1부에 가득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단 노트에 옮겨 적어 보았지만 쉽게 소화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를 빨아들여 온 ‘진보 이야기’(그리고 파생물로서의 ‘쇠퇴 이야기’)에 대해 끄적여보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고민하고 있는 시대적 무기력과 연관된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든 생각은 저 개념들이 서로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져 있으며, 하나만 붙잡고 씨름해도 글 수십 편은 나올 수 있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하면서는 왜인지 또다른 경각심을 느끼게 되었는데요. 읽고 정리한 아름다운 개념을 우리의 일상적 언어나 생활과 분리시키지 않으려면 더 예리하게 질문하고 나눠야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낭만화의 문제, 혹은 쉽게 원리나 정답으로 가져가 버리려는(도그마화) 습관의 위험성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애나 칭이 권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그런 추상과 확대 적용을 멈추고, 잘 보이지 않는 데서 예측되지 않는 방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삶의 모습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었는데 말이죠. 그럼, 세미나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주섬주섬 더듬어보겠습니다.
협력으로서의 오염과 방사능 오염 : 오염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제를 하나하나 읽으면서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는데요. 길고 짧은 글들에 일종의 감동 혹은 여운 같은 것이 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끝의 버섯>의 문제의식과 멋진 개념들에 반했기 때문인지, 저희의 과제들에는 엉망처럼 보이는 현실에 무기력해질 게 아니라 그것을 ‘여전히 다종적인 삶들이 살아가고 있는 장’으로 볼 수 있고 보아야 한다는 취지의 이야기들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작업이 필요하고 중요했습니다. 텍스트의 문제의식을 곱씹고 개념들을 따라가는 일 말이죠. 과제를 볼 때까지 그런 정석적 진행을 예상했었지만, 세미나는 기대와 달리 더 재미있는 방향으로 흘러나갔습니다.
혼란 혹은 새로운 화학작용은 사소해 보이는 구석에서 시작되었는데요. 대략 이런 질문이었습니다. 애나 칭의 ‘오염’ 개념으로부터 후쿠시마 오염수의 ‘오염’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까? 두 ‘오염’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각각의 전제나 효과는 어떻게 다른지, 전자에 대한 사유로부터 후자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을지 등의 이야기였습니다. 언뜻 지엽적인 단어 하나에 걸려넘어진 지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마이크 쟁탈전을 벌일 정도로 이야기들과 생각들이 뭉게뭉게 솟아났습니다. 물론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지만, 그때부터 개념이 우리 발밑으로 내려와 생각 바퀴가 윙윙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애나 칭은 이렇게 말했었죠.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오염된다. 다른 존재들에게 길을 열어줌에 따라 마주침이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모든 존재는 오염의 역사를 수반한다. 순수성은 선택지에 없다.”(63~64쪽) 애나 칭은 존재의 근원적 차원의 오염을 말하고 있습니다.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취해야 하고, 다른 무언가에 기대야 하고, 다른 무언가에 내어줘야 합니다. 협력해야 하고 협력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살아감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존-협력은 순수성을 허용치 않습니다. “협력이란 차이를 수용하며 일한다는 의미로, 이것은 곧 오염으로 이어진다. 협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죽는다.”(64쪽) 협력은 생존의 근거이고, 이는 오염을 수반합니다. 거꾸로, 이는 곧 오염이 없다면 우리는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할 수 있죠. 오염이 생존의 요건이라면, 그래서 그것을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면, 우리가 곳곳에서 인간과 동물들의 생존을 실질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중금속, 화학물질, 방사능의 ‘오염’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한 다발의 질문이 놓입니다. ‘협력으로서의 오염’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화학적-의학적 오염을 환영해야 한다는 윤리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우리의 대체불가능한 삶의 소중함을 위해 오염에 거리를 두고 정화에 힘써야 할 것인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자면, 애나 칭은 우리에게 당위를 말하고 주입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현실 속 구체적 윤리는 각자가 매 배치에서 도출해내야 할 매번의 해(解)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정론은 없습니다. 어떤 해를 도출할 것인가는 우리가 얼마만큼의 강도로 존재를 이해하는가, 어떤 층위로까지 내려가 이야기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기도 합니다. 고로 고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모든 유기체는 살기 위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분합니다. 자신의 고유한 배열을 유지키는 접속은 영양이고 음식이지만, 해체하는 접속은 독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같은 조성의 유지 자체가 자신과 타자에게 해가 되기도 합니다. 현 배열을 일부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약이지요. 따라서 독과 약은 정확히 구분되지 않습니다. 둘 사이엔 정도적인 차이밖에 없지요. 그렇다면 오염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 아닌 것과의 변형적 마주침 혹은 위험할 수 있는 협력관계를 오염이라고 한다면, 문제는 그것이 어떤 속도와 어떤 수준에서 일어나는가입니다. 신중함이 요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경질적 경계심과는 다릅니다. 그 뒤섞임이 나의 장기 및 순환의 균형을 급작스럽게 와해시키고 생존을 중지시킨다면, 있는 힘을 다해 달아나야겠죠. 그것이 생을 긍정하는 일일 테니까요. 물론 그렇게 달아날 때조차도 이때 긍정되는 생의 범위에서 배제하고 있는, 그러나 함께 얽힌 채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존재들을 계속해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게 하는 그 물음이 우리의 도주가 편협해지고 폭력적이 되는 경향을 막아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현실은 이보다 훨씬 난감합니다. 우리는 유기체들 뿐 아니라 폐수, 쓰레기, 가스와 함께 살아갑니다. 화학물질이나 방사능 등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오염 물질’들은 감각 이하의 수준에서 생물들과 접속하며, 우리는 그것이 어느 정도로 위독한지 알 수 없습니다. 권력은 기술과 지식을 독점합니다. 국가나 국제기구들은 언제나 자본의 흐름에 서서 조작이 난무한 수치들을 들이댑니다. 때로는 안전하며 소리 질러대고 때로는 위험하다며 호들갑 떨면서 우리를 무지와 공포 안으로만 밀어 넣지요. 도쿄전력 데이터를 수용하는 IAEA를 믿을 수 있을지, 아이들에게 해산물을 먹여도 좋을지, 한 세대 뒤 생물농축은 어떨지,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먹지 않는다고 될 일인지... 명확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생화학적 불안정성 속에서 존재론적 불안정성을 체험하고 있는 듯합니다.
협력으로서의 오염과 생물학적 오염. 여전히 헷갈립니다. 허구이자 관념인 ‘순수성’을 넘어 실재하는 존재들의 비자립적 생존 양상이 오염 자체임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염, 방사능이나 중금속, 미세플라스틱 등 공해산업의 부산물이 생물종들의 신체에 미치는 영향인 오염 다른 층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그것은 훨씬 더 많은 프레임에 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오염은 백이면 백 우리에게 부정적인 뉘앙스를 띄는데, 이는 오염된다는 것은 때로 위험하고, 건강을 해칠 수 있으며, 순수하거나 예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염을 ‘안전’, ‘건강’, ‘청결’, ‘행복’, ‘정상’, ‘순결’, ‘아름다움’ 등을 망치는 파괴물로, 곧이어 ‘악’으로 두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치 평가 이전의 차원에서 보면 오염은 우리 안팎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죽게 하기보다는 살게 만드는 원리입니다. 오염되고 오염시키는 삶들은 “복합적이고, 추할 때가 많으며, 우리를 초라하게 만들”(76쪽)때가 많지만, 오직 우리 종의 유용성과 이 시대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만, 정확히는 진보라는 단일한 이야기의 선에서 볼 때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오염이 두렵고 기피된다면, 우선 그 ‘오염’에 전제된 특정한 권력들과 담론적 배치를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대의 오염물질들, 특히 핵폐기물은 어떤 생명 존재들에게도 파괴 외에 다른 접속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버섯은 히로시마의 폐허에서도 자라났기는 합니다. 그런 점에서 피폭된 흙과 물 역시도 우리의 협력적 타자이긴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버섯이 보여주는 그런 살아감이 너무나 어렵고 멀어 보이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즉각적으로 상상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피폭이 없었던(없어야 했던) 자연이 선명하게 아른거리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매연도, 플라스틱도, 폐수도 생겨나지 않았던 순수한 산과 들과 바다. 이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한 이곳은 계속 ‘잘못된 곳’, ‘살아갈 수 없는 곳’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애나 칭의 오염 개념은, 이전이 아니라 앞을, 저편이 아니라 여기를 보게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닥친 곳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입니다. 오염을 긍정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뒤섞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위가 아니라 태도! “원래 오염이야” “파괴를 통해 창발 돼”라고 말하면서, 지금과 같은 방류, 벌목, 폐기물 투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심각한 반동입니다. 선험적 원리를 만들고 선악을 세우는 것은 긍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염 개념은 그런 ‘원래’(순수-원본-기원)를 상정하는 사고와 싸우고 있기도 합니다. 존재론으로서의 오염은, 원래 그랬던 것, 회복해야만 하는 것은 없으니, 변변찮아 보이는 지금 이 상황에 함께 놓인 것들로 함께 놓인 존재자들과 뭐라도 엮어내 보는 공동-행위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존재들은 자기의 ‘원래’를 잃어버림으로서만, 이전의 배치가 흐트러짐으로써만, 다음의 국면으로 나아갑니다. 배치는 그렇게 새로이 만들어지고, 예기치 못한 존재들이 자라납니다. 그런 점에서 오염은 창조입니다. 그 과정은 슬프고 괴로울 수 있겠지만, 그건 이전의 배치와 자립에 대한 상이 진할 때뿐입니다.
다시 돌아가 어려운 질문에 맞서 봅니다. 오염 개념을 사유하는 것과 환경의 오염과 관계 맺는 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염수’와도 그렇죠. 이제 우리는 방사능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방사능이 아무리 두렵고, 방류를 승인하고 감행한 사람들이 아무리 싫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문명과 풍요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모두가 소금을 사재기하고 해산물을 거부할 때, 우리는 고민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바다가 오염됐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순수한 바다’ 이미지에 매달려 등 돌리고 살 것인가? <고해정토>에는 지금도 계속 저에게 강렬한 물음표를 남기고 있는 한 장면이 나옵니다. 미나마타 해역에서 온 미역을 사서 꼭꼭 씹어 먹는 이시무레 미치코. 이것은 단지 오염된 해산물을 먹는다는 행위로 요약될 수 없는, 하나의 심원한 애도의 태도처럼 생각됩니다. 당연히 안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아픔과 중독과 탄압이 이어지는 ‘고해’에서 어떻게 ‘순수’를 떠올리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담담히 떼어야 할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주절주절, 후기가 길어졌습니다. 세미나 때 오고 간 이런저런 생각의 파편들을 모아서 만만치 않은 실존의 문제와 맞서보려 하니, 뚫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맴 돌면서 진땀이 났습니다;; 이제 샘들이 좀 도와주시죠! 생-기 세미나의 명랑함을 담아 각자의 생각과 질문들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온라인 패치 워크를 만들어주세요~
- 다음 시간에는 <세계 끝의 버섯> 2부 ‘진보 이후에: 구제 축적’ (111쪽~265쪽)을 읽고 과제를 적어옵니다! 채운샘의 질문은 곧 드릴게요!
섬세하고 다정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댓글로 후기 남기자 했던 거 맞죠? 숙제도 제출 못한 어리바리 새내기로서 1차 세미나 참여했던 느낌이라도 남기고자 끄적입니다.
'오염'과 '진보'를 키워드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토론의 과정에서 '단어'의 정의와 해석에 집중(혹은 집착)하는 것이 언어를 매개로 사유할 수 밖에 없는 우리의 한계이자 또 다양한 세계와 마주치고자 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 새삼 흥미로웠습니다. '오염' - 더러워지고 훼손되었다는 부정적인 의미(사회적 동의)를 '이미' 가진 단어를 통해 존재론적인 '섞임'을 말하려는 것이 합리적인 접근인가 싶으면서도, 이러한 시도가 현재의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생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또렷한 '정의'와 명쾌한 '정리'의 유혹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 풀어나가는 시간으로 접근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궁금한 '단어'가 있어요) 윗 글에서도 또 이 책에서도 '패치'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어떤 맥락, 어떤 이야기의 흐름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건지 궁금합니다. '배치' 속에서의 특정 조각(부분)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생태학적인 특별한 정의가 있을까요?
저는 ‘패치’를 생각할 때, 우선 ‘접속면’이 많은 도형을 상상했어요. 그리고 ‘나’라는 존재로 대입해보면 상호적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나-존재-다면체를 생각해봤죠. 복식기법에서도 단일, 균질하지 않은 색, 소재 등이 서로 연결된 것을 패치워크라고 하잖아요. 패치워크엔 원래 그 자체라는 ‘원본’의 권위라든가 위계의 경계가 모호하게 되는, 서로 쪽모이로 계속 이어지죠. 연두샘의 말씀처럼 복식 기법의 배치를 생태학적 맥락에서 새롭게 배치했을 때, 새로운 정의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원래부터 고정된 정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두샘 말씀처럼 ‘오염’ ‘교란’ 등과 같은 단어를 가지고, 우리가 상식적으로 써오던 용법을 교란-오염시키면서 시작도 끝도 없는 의미화를 시도한 것 아닐까요? 같은 텍스트를 읽고, 같은 시간에 모였지만, 어쩌면 각자의 다른 욕구와 환경 상황 조건 속에서 다르게 느끼고 마주친 것들을 스스로 또 서로를 감당한다는 게 뭘까 라는 질문과 생태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지 않다고 저에게는 생각되거든요... ( ̄_, ̄ )
복식 패치워크에서도 정돈되고 동일한 것과 멀 때, 완전 생뚱맞고 너~~~무 다른 색과 소재와 모양이 서로 붙을 때 멋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정신없고 지저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겠죠. 우리의 첫 세미나도 서로의 말과 생각들이 엉키고 헤매고 정신이 없었고 서로 느낌이 매우 달랐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애나 칭의 말을 빌려서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활동적인 풍경’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럼에도 저는 매번 돌아서서 ‘난 도움도 안 될 쓸데없는 말을 왜 했지…’라며 자의식에 시달리는데, 매우 오산이죠. 다시 생각해 보면, 누가 누굴 돕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말을 잘 듣는 법에 여전히 서툴다는 의미같아요. 어쩌면 상대의 말과 내 생각이 잘 접속한다는 것은 어떤 좋은 일방향적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계속 이어지는 접속면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상대의 말을 잘 듣는 법을 배울 기회를 놓치곤 후회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공부는 어렵기도 하면서 자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기회가 되기도 하니 더듬더듬 조금씩 나아가갑니다. o(* ̄▽ ̄*)ブ
여하튼 이렇게 연두샘의 질문에 제 생각을 붙이면서 패치 워크를 시도하는 것이죠. ‘민호샘의 후기-연두샘-저-누군가의 생각들…’이 모인 패치워크! 민호샘의 글을 완결된 원본으로 두는 게 아니라, 연두샘의 글이 이어지면서 섬세함-다정함이라는 활동적인 글로 접속면을 연결시켜 주신 셈이죠. 또 연두샘의 질문이 저의 글로 이어지게 열어 준 셈이기도 하고요. (〃 ̄︶ ̄)人( ̄︶ ̄〃)
(연두샘이 요즘 MBTI, ‘부케’를 만드는 유행과 “복수의 시간-만들기, 복수의 세계-만들기”를 연관 지어서 말씀해 주신 게 기억나요. 이를 테면 회사와 집 혹은 세미나에서 우린 다른 혹은 여러 모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여러 요인과 환경 조건에서 자기 본성과 분리감을 느낄 때가 있죠. 그렇다면 원래의 나란 있나? 생각해 보게 되네요… (저는 INFP인데요…처음 MBTI라는 걸 알려준 분이 분명 ‘IN~’으로 나올 거라고 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저를 ‘E~’같다고 하더라고요 ㅎㅎ))
알 것 같다 생각했던 부분들이 더 헷갈리고 아리송해졌던 세미나였던 것 같아요. 후기를 읽으며찬찬히 그 날의 아리송 길을 되짚어볼 수 있었네요! 처음에 환경오염을 말할 때의 오염과 애나 칭의 오염이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애나 칭의 오염이 환경오염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지 않은지에 관한 질문을 들었을 때는 너무나 명확하게 두 오염이 구분되어 애매한 부분이 거의 없지 않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야기가 오갈수록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상태가 되더라고요. 마주침을 통한 변형인 오염을 긍정할 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자연을 순수한 상태로 보존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생태보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이런 저런 물음표들이 찍혔어요. 애나 칭은 이야기 듣기를 하나의 연구방법으로 말하는데 그 지점에 실마리가 있지 않나 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오염된 다양성은 근대 지식의 특징이 된 일종의 ‘요약하기’에 저항한다. 오염된 다양성은 특수하고 역사적이며 항상 변화할 뿐 아니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한다 … 만약 골치 아픈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이 오염된 다양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라면, 이제 그렇게 쏟아내는 것을 우리의 지식 실천의 일부로 만들 때다.” (76)
“이야기를 쏟아내고 귀 기울여 듣는 것은 하나의 연구 방법이다. 이때 연구 대상은 오염된 다양성이고, 분석 단위는 불확정적인 마주침이다. 무엇을 알려 하건 간에 우리는 알아차림의 기술을 회생시키고 민족지와 자연사를 아울러야만 한다.” (79)
도쿄전력의 요약된 데이터가 아니라, 하청 노동자, 바다의 생물들, 어민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이유가 달라질 것이고 그 다름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여전히 아리송하네요!
오! 민호샘 혼자서 '세미나 연습'을 한 거 아니에요? ^^ 그날 시간 관계로 풀리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많이 진전되었네요.
어떻게 하는거지요? 빈 책상에 가상의 샘들을 앉혀 놓고 계속 질문하면서 이야기 하는건가요? ㅎ 아무튼 그날 나왔던 '오염'과 관련된 이야기가 정리가 되는 듯 합니다.
저도 그날 세미나에서 '오염'의 개념을 혼동하여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음을 느꼈는데 샘의 노력으로 생각의 파편들이 모아져서 한 부분의 패치가 되었네요!
이 모든 공은 이시무레가 미역을 씹어먹듯이 세미나에서 쏟아져 나온 골치 아픈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은 민호샘에게 돌립니다~
후기 잘 읽었고 내일도 골치 아프지만 즐거운 이야기를 쏟아내 보아요~ ^^